나는 현역이다
일이 있음에 감사드린다. 일을 할 수 있는 한 현역이다. 친구들은 정년이 되어 정년백수가 되고 은퇴아닌 은퇴를 하여 놀고 있지만 일감이 있는 한 나는 현역이다.
현역이 있으면 예비역이 있다. 남자들에게 예비역이라는 말은 익숙하다. 예비역 장병이라 하여 군대용어이다. 현역병에서 제대하면 자동으로 예비역이 되는 것이다. 예비군이라고도 한다. 예비군아저씨라는 말이 더 어울릴 때도 있다. 아마 서른 살까지 일 것이다. 동원예비군이라 하여 유사시에 차출될 수 있는 병력을 말한다.
현역 다음에 예비군이다. 예비군도 동원예비군이 있고 소집예비군이 있다. 소집은 35세까지 일 것이다. 그 다음은 민방위이다. 40세까지 일 것이다. 그 다음은 부르지 않는다. 군역이 면제되었을 때 더 이상 자원으로서 가치가 상실된다. 민방위도 졸업하면 인생 다 산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때 되면 물러나야 한다. 한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 없다. 나이가 차면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나와야 한다. 대개 60세 전후에서 은퇴한다. 더 이른 경우도 있고 늦은 경우도 있다. 공직이나 교직이 아니라면 신분은 보장되지 않는다. 일반기업에서 정년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새로 생겨난 회사의 경우 정년까지 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오정이라는 말이 나온다. 민간기업에서는 45세가 한계일 것이다.
정년까지 간 사람들은 복받은 자들이다. 65세까지 채웠다고 하면 축복이다. 더구나 '명예'타이틀까지 붙었다면 행운아라 볼 수 있다. 대부분 정년까지 가기 전에 그만 둔다. 월급생활자의 수명은 짧다. 그 다음은 각자도생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생존해 나가야 한다. 일거리를 찾아 도시의 들개마냥 헤매기도 한다. 설령 잡았다고 해도 질이 좋지 않다. 오래 가지 않는다. 또다시 일자리를 찾아 헤맨다.
일을 하고 있는 한 현역이다.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백수이다. 군복무 중이면 현역이듯이, 현업에 종사하고 있으면 현역이다. 이렇게 본다면 현역은 좋은 것이다. 일감이 있어서 일을 하고 있다면 현역이다.
현역은 진취적 기상의 이미지이다. 현역군인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젊고 패기 넘치고 공세적 이미지이다. 일감이 있어서 일하는 모습에서 진취적 기상을 본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나이를 불문하고 현역은 좋은 것이다.
하루가 빨리 지나간다. 아침인가 싶으면 저녁이다. 한주도 빠르다. 월요일인가 싶으면 금요일이다. 한달도 마찬가지이다. 월초인가 싶으면 월말이다. 그렇다면 일년은? 연초인가 싶으면 연말이다. 그럼 인생은? 소년인가 싶으면 노년이다. 그러고 보니 노년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법적으로 65세이니 점차 가까이 가고 있는 것이다. 65세가 되면 인생 끝나는 것일까?
민방위가 끝나면 인생도 끝난 것처럼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40세 이후를 상상도 해 보지 못한 것이다. 청춘이 지나면 삶의 의미가 없을 것처럼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이를 '젊음의 교만'이라 해야 할 것이다.
교만은 자만, 아만, 오만과 같은 뜻이다. 공통적으로 '만(mana)'자가 붙는데 이는 "내가 누군데"라는 우월적 자만을 특징으로 한다. 자만은 불선법이다. 불교에서는 탐, 진, 치, 만, 견이라 하여 5대 불선법 중에 자만이 있다.
젊은 시절에는 젊음의 교만이 있다. 젊음의 교만에 빠지면 어떻게 될까? 이는 "그 교만에 빠져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한다."(A5.57)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젊음의 교만에 빠지면 방종하기 쉬움을 말한다. 그래서 젊음은 즐기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늙어지면 못노나니"라는 유행가 가사와도 관련이 있다.
젊음의 교만이 있는 자에게 나이 40은 죽음이나 다름없다. 하물며 60은 어떠할까? 생각도 하기 싫은 끔찍한 일일 것이다.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좀비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런 논리라면 40세 이상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상실해야 할 것이다. 젊은 청춘이 아니면 죽은 목숨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젊음의 교만에 가득찬 자도 세월 앞에 속수무책이다. 그토록 혐오해 마지 않던 40세가 되고 60세가 된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살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해할지 모른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늙음에 종속되었으며 늙음을 벗어날 수 없다." (A5.57)라고 남녀와 출재가를 막론하고 자주 관찰하라고 했다.
"죽으면 늙어야 한다." 는 말이 있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이다. 코메디에서 본 것이다. "늙으면 죽어야 한다."라는 말을 뒤집은 것이다. 늙으면 죽어야 할까? 나이 40이 되고 60이 되면 더 이상 삶의 의미는 없는 것일까? 그럼 70대와 80대는? 젊음의 교만에 가득찬 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늙으면 죽어야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젊음은 늙음에 종속된다."고 말씀하시고서는 이런 사실을 새기라고 했다. 그렇다면 젊음의 자만이 생겨난 이유는 무엇일까?
젊음의 자만이 생겨나는 것은 유신견 때문이다.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고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M22)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몸에 대해서는 "이몸은 나의 것이고, 이몸이야말로 나이고 이몸이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는한 젊음의 자만에서 벗어날 수 없다.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늙어지면 못노니"가 되어서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 그 결과 비참한 노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젊음의 자만을 가진 자는 무엇이든지 자신만만해 할 것이다. 그래서 '건강의 자만'도 가지게 되고, '삶의 자만'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변한다. 어느 것도 가만 있지 않는다. 젊음은 늙은에 종속되어 있듯이, 건강은 질병에 종속되어 있고 또한 삶은 죽음에 종속된다. 부처님은 이렇게 관찰해야 한다고 말씀 하셨다.
나이 먹은 것은 죄가 아니다. 늙으면 죽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무상하게 변화 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이와 같이 관찰하면 지혜가 생겨난다. 불교적 자혜를 말한다. 그래서 젊음의 교만과 건강의 교만, 삶의 교만으로 인한 '사랑하는 것과의 탐욕'에 대해서는 "나는 모든 사랑하는 것과 마음에 드는 것과 헤어지고 이별해야 한다."(A5.57)라는 지혜가 생겨나게 된다. 또한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악행'에 대해서는 "나는 업의 소유자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업의 원인자이고 업의 친연자이고 업의 의지처이고 내가 선이나 악을 지으면 그 상속자가 될 것이다." (A5.57)라는 업자성정견이 생겨나게 된다. 이것이 불교적 지혜이다.
가르침을 접하니 안심이다. 더 이상 젊음의 교만, 건강의 교만, 삶의 교만에 빠지지 않는다. 젊음은 늙음에 종속되기 마련이고, 건강은 질병에, 그리고 삶은 죽음에 종속되기 마련이다. 어느것에도 집착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젊음과 건강과 삶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고,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긴다면 절망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늙으면 죽어야 된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이 40을 넘어 이제 60이 넘었다. 젊음의 교만, 건강의 교만, 삶의 교만으로 가득했다면 죽었어야 하는 나이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지혜를 알기에 절망하지 않는다. 일감이 있는한 현역으로 산다.
오늘도 일을 했다. 아들뻘 되는 담당자와 전화소통을 하고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딸뻘 되는 담당자와도 통화해서 내용을 확인했다. 일거리가 있는한 정년은 없다. 나는 늙지 않았다. 나이도 먹지 않았다. 일을 하고 있는 한 청년이다. 나는 현역이다.
2021-01-2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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