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폭력을 여읜 사유를 해야 하는가?
과달카날, 이 말을 안다면 그는 상당한 지식인이라 볼 수 있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이 말을 몰랐었다. 역사에 무지 했던 것이다.
과달카날은 남태평양에 있는 작은 섬 이름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과 일본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미국은 과달카날 전투로 전세가 역전되어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요즘 유튜브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특히 ‘닥터제이’라는 타이틀의 유튜브를 즐겨보고 있다. 구독자는 만5천명가량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소위 밀덕(밀리터리 덕후) 사이에서는 꽤 인기가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진행자의 차분한 설명이 매력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 풍부한 영상자료에 기반한 세심하고 치밀하고 논리적 설명을 듣고 보고 있다보면 주어진 8분이 금방 지나가 버린다. 터치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다음 영상과 연결되도록 되어 있다.
과달카날에 대한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다. NHK에서 특집으로 다룬 것도 보았다. 일본어로 한 것이긴 하지만 자막을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무모한 전쟁이었다. 전쟁광들에 의해 아까운 목숨이 희생되었음을 알게 해주는 것 같았다.
과달카날과 관련된 영화도 많다. 그 중에 ‘씬 레드 라인(The Thin Red Line, 1988년)’이 대표적일 것이다. TV에서 본 것이다. 후기도 남겼다. 후기에서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영화는 미군의 입장에서 바라 본 것이다. 그것은 전쟁의 참상에 대한 일종의 고발영화라 볼 수 있다. 특히 일본군이 포로로 잡혔을 때 지옥이 연상되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위치하였을 때 다양한 반응에 대한 것이다.” (두려움과 공포가 일어났을 때, 2015-06-18)
과달카날을 다룬 영화는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고발영화였다. 월남전을 다룬 ‘디어헌터’나 ‘지옥의 묵시록’ 등과 같은 고발영화가 있었지만 이 영화보다는 못한 것 같다. ‘스탈린그라드’도 이차대전 참상을 고발한 것이지만 이 영화보다 못한 것 같다. 그것은 세밀한 감정 묘사에 있기 때문이다. 지옥과 같은 상황을 담담히 그려 내고 있는데 영화를 보는 것 자체로 전쟁을 혐오하게 된다.
전쟁은 지옥이다. 공격과 수비에서 살육전이 벌어진다. 병사들은 소모품처럼 죽어 나간다. 전쟁을 기획했던 자에 의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을 보았다. 근원을 쫓아 가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기인한다. 전쟁광의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모두를 지옥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동타지옥(同墮地獄)이다.
전쟁관련 영화나 유튜브를 보면 “전쟁은 미친짓이다.”라고 말 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미치지 않고서는 전쟁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전쟁을 벌인 자들은 모두 미친 자들이다. 그래서 전쟁광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전쟁은 모두를 미치게 만든다는 것이다. 전쟁은 모두를 사지로 몰아넣고 모두 지옥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지옥은 따로 없다. 전쟁 현장이 바로 지옥이다. 전쟁터에서는 죽느냐 사느냐의 싸움을 한다. 사활을 건 싸움에서 동료의 죽음을 보았을 때 분노와 적개심이 일어날 것이다. 맨정신에서는 싸울 수 없다. 피를 보아야 흥분해서 싸운다. 그래서 전쟁광들은 증오와 적개심을 고취시킨다. 전쟁은 증오와 적개심 없이는 할 수 없다.
전쟁없는 평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침략자가 있다면 물리쳐야 한다. 방어적 차원의 전쟁은 할 수 있는 것이다. 자국 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적의 침략으로 부터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그럼에도 침략을 위해 군대를 가지고 있다면 전쟁광들의 손아귀에 있는 것과 같다. 이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그랬다.
전쟁은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 지옥으로 변한다. 지옥은 악업을 지어 죽어서나 가는 곳이 아니다. 전쟁터가 바로 지옥인 것이다. 누군가 전쟁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다면 지옥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전쟁이라 하여 반드시 총 들고 싸우는 것만이 아니다. 마음의 전쟁도 있는 것이다. 미워하고 증오하고 적개심으로 가득하다면 이미 지옥에 있다.
어떤 경우에서라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설령 방어적 전투일지라도 폭력은 폭력이다. 전쟁의 시기에 태어나 전쟁터에 끌려간 사람들은 시기를 잘못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때 어떤 생각을 할까?
수많은 전쟁영화가 있다. 대부분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있다. 이런 영화를 접했을 때 전쟁의 참상에 대한 후기를 남겨 놓았다. 전쟁관련 영화나 다큐, 유튜브를 볼 때 마다 드는 생각은 한마디로 “전쟁은 미친짓이다!”라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사유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 욕망을 여읜 사유를 하고, 분노를 여윈 사유를 하고, 폭력을 여읜 사유를 하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사유라고 한다.”( S45.8)
팔정도에서는 폭력을 여읜 사유를 말하고 했다. 이를 아위힝사쌍깝뽀(avihiṃsāsaṅkappo)라고 한다. 이를 불상해사유라고도 해석한다. 상해뿐만 아니라 살생하는 것도 폭력에 해당된다. 아위힝사정신에 따르면 어떤 폭력도 정당화 될 수 없다
폭력은 마음 속에서 부터 시작된다. 마음 속으로 “저놈 죽여 버려야 겠다.”라고 생각하면 언젠가 실행에 옮겨진다. 모든 전쟁은 폭력적 사유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신에게 폭력적 생각이 일어난 것을 아는 것은 지혜에 속한다. “아, 나에게 미워 하는 마음이 있었구나!”라고 알게 되었을 때 멈출 것이다. 그럼에도 미움이 증오로, 증오가 적개심이 되었을 때 폭력이 발생한다. 전쟁광들은 끊임없이 증오와 적개심을 고취하여 사지로 몰아넣는다.
폭력을 여읜 사유는 지혜의 영역에 속한다. 그런데 팔정도에서 지혜의 다발은 정견과 정사유라는 것이다. 둘 다 지혜의 영역에 속하지만 특히 정사유는 자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분노를 여읜 사유를 하면 자애의 마음이 되고, 폭력을 여읜 사유를 하면 연민이 되기 때문이다. 분노와 폭력을 여의었을 때 그 자리에는 자비가 들어차게 된다. 그래서 지혜의 다발에는 지혜의 정견과 자비의 정사유가 있게 된다.
불교를 흔히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한다. 그런데 지혜와 자비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라고 한다. 지혜가 있으면 자비가 있고 자비가 있으면 지혜가 있는 것이다. 팔정도에서 정견과 정사유를 지혜의 다발로 넣는 이유가 될 것이다.
닥터제이의 유튜브 영상을 보면 전쟁의 참상을 알리려는 것 같다. 동시에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가득한 전쟁광들을 고발하려는 것 같다. 과달카날에 대한 영상을 보면 지옥이 따로 없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유튜브 영상을 보았다. 오물장과도 같은 유튜브에서 진주를 발견한 느낌이다.
2021-04-1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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