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겐(道元)선사의 일대기 영화 젠(禪)을 보고
우리는 일본불교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고작 왜색불교라고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머리 기르고 대처하는 스님 같지 않은 스님을 연상할 수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일본불교는 매우 다양하다. 그것은 종파불교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의 특징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통불교이다. 모든 불교를 하나로 통합한 불교를 말한다. 그래서 한국불교 안에는 갖가지 불교의 종파가 있고 갖가지 불교역사가 들어가 있다. 이를 좋게 말하면 융합불교이고 화쟁불교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좋지 않게 말하면 혼합불교가 된다.
종파불교를 지향하는 일본불교에서 머리 기르고 대처하는 종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엄격하게 수행만 하는 종파가 있다. 조동종이 대표적이다. 선종계통의 조동종은 한국의 임제종과 여러 모로 비교된다. 한뿌리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임제종은 화두선에 대한 것이고, 일본의 조동종은 묵조선에 대한 것이다.
유튜브에서 우연히 일본영화를
유튜브에서 우연히 일본영화를 보게 되었다. 유튜브에서 일드, 즉 일본드라마를 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일본영화를 보기는 어렵다. 일본영화 하면 야동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에 본 일본영화는 불교영화이다. 제목은 ‘선(禪)(2009)’이다. 일본말로 ‘젠’이라고 한다.
일본불교영화 젠은 도겐선사의 일대기에 대한 것이다. 도겐선사(1200년-1253년)는 일본 조동종의 개산조로 알려져 있다. 선사의 나이 23살 때 1223년 입송하여 5년간 선을 공부했다. 중국 선승 여정 밑에서 깨달음을 얻고 1227년 귀국했다. 영화는 도겐의 입송때부터 시작된다.
영화에서는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가장 크게 와 닿는 말이었다. 도겐이 가마쿠라막부시대 5대 집권 호죠 토끼요리와의 대화에서 잘 드러난다. 도겐은 목숨을 건 여행을 한다. 권력투쟁으로 피폐해진 최고 실력자의 정신을 치유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의 심기를 건드리면 죽음을 면할 수 없었다.
어느 것이 정법인가?
집권 호죠 토끼요리는 도겐에게 이것 저것 물어본다. 도겐이 송나라로부터 올바른 불법을 가져왔다고 하는데, 누구나 올바른 불법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외도들이 “세계는 영원하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Ud.66, D9.50)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도겐 당시 일본에는 갖가지 불교가 난립해 있었다. 서로 자신의 불교가 바른 불교라고 했다. 이에 최고 실력자는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마치 초기경전에서 아자타삿투왕이 외도 스승들의 주장에 혼란스로워하는 것과 같다.
막부의 최고실력자는 도겐에게 계속 묻는다. 실력자는 “당신이 말하는 새로운 정법이란 무엇인가?”라며 묻는다. 마치 사무라이가 둘이서 진검승부를 펼치는 것 같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도겐은 “지관타좌(只管打坐)”라고 힘주어 말한다.
지관타좌란 무엇일까? 이는 도겐의 이어지는 설명에서 알 수 있다. 지관타좌는 “그저 한결 같이 앉습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지관타좌에 대해서 검색해 보았다. 도겐의 조동종에서는 지관타좌라 하여 오직 죄선만 하는 선을 내세운 것이다. 오로지 참선에만 전념하는 불교를 말한다. 중국 선종에서 묵조선에 대한 것이다. 이는 한국의 간화선과는 다른 것이다.
바다의 비유를 들어
영화에서는 지관타좌에 대한 설명이 계속 이어진다. 실력자 토끼요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앉는 것에 무슨 처방이 있단 말이냐?”라고 물어본다. 이에 도겐은 바다의 비유를 든다.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유만큼 적절한 것이 없다.
부처님도 수많은 비유를 들어 진리를 설명했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의 탁월한 비유를 볼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이 “왕자여, 그렇다면 제가 비유를 들겠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 비유를 통해서도 말한 의미를 이해합니다.”(D23.24)라고 말했다.
과연 가마쿠라막부 실력자 5대 집권 호죠 토끼요리는 도겐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까? 도겐은 “토키요리님, 그 말은 큰 바다 안에 물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실력자는 발끈 한다.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도겐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는다.
“봄에는 꽃,
여름에는 두견새,
가을엔 달,
겨울엔 눈이 쌓여
서늘할지니.”
이 게송은 무슨뜻일까? 토끼요리는 “도겐, 당연한 말 아닌가?”라며 묻는다. 도겐은 당연한 말을 한 것이다. 도겐은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참된 모습을 보는 것이야말로 깨달음이옵니다.”라고 말한다.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는 것은
도겐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했다. 이는 초기경전에 무수하게 나오는 야타부따냐나닷사나(yathābhūtañāṇadassana)와 같은 말이다. 한자어로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초전법륜경에서 여실지견을 말했다. 이는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S56.11)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있는 그대로 알고 보면 청정해짐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연기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을 보면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타파 하고 있다. 이는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에서 가능하다. 그래서 부처님은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라고 했다.
세상의 발생을 관찰한다는 것은 연기의 순관을 말한다. 세상의 소멸을 관찰한다는 것은 연기의 역관을 말한다. 조건발생하여 일어나는 것을 보고서 허무주의는 타파되고, 소멸하여 사라지는 것을 보고서는 영원주의는 부서진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알고 보면 잘못된 견해에서 벗어 날 수 있다.
보름달의 비유를 들어
있는 그대로 알고 보면 진리를 볼 수 있다. 영화 젠에서 도겐은 막부의 실력자에게 여실지견을 말했다. 그러나 실력자는 지혜가 없어서 알아듣지 못했다. 이에 도겐은 바다의 비유를 들었다. 그래서 “좌선이란 큰 바다 안의 물을 보는 것입니다. 허나 스스로의 불성을 모른다면 큰 바다 안에 물이 있단 걸 알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도겐은 불성을 말했다. 여기서 불성이란 무엇일까? 이를 실력자에게 설명하기는어려웠을 것이다. 실력자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겐은 실력자에게 보름달을 보자고 한다. 도겐은 보름달을 가리키면서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달이야 말로 불성입니다.”라고 말한다.
달은 차면 기운다. 실력자는 달은 저 하늘에 있는 것으로 차면 기우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에 도겐은 수면에 비친 보름달을 베어 보라고 말한다. 보름달은 칼로 베어지지 않는다. 복원되는 달을 보여 주면서 “설사 구름이 달을 가려도 혹은 하늘에서 그 모습을 감추어도 달이 없다고 말해선 안됩니다.”라고 말한다.
도겐은 불성을 달에 비유했다. 그리고 누구나 불성이 있다고 했다. 이는 사람들 마다 순수한 때묻지 않은 마음의 보름달이 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불성론은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과 같다. 이에 대하여 도겐의 조동종에서도 주관적 관념론의 철학사상이 드러난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불성론은 임제종의 철학사상과도 같은 것이다.
니까야에서 보름달의 비유는
니까야에도 달의 비유가 있다. 앙굴리말라 게송을 보면 “악한 짓을 했어도 착하고 전전한 일로 덮으면, 구름에서 벗어난 달과 같이 이 세상을 비춘다.”(Thag.872, M86)라고 했다. 게송에서 말하는 달은 불성과는 다른 것이다. 앙굴리말라 게송에 나오는 보름달은 악행과 선행에 대한 것이다.
연쇄살인자 앙굴리말라가 부처님의 교화로 인하여 부처님의 교단에 들어오게 되었다. 앙굴리말라는 아라한이 되었다. 앙굴리말라는 임종시에게 이 게송을 읊고 열반에 들었다. 그럼에도 수행승들은 궁금했던 것 같다. 연쇄살인자가 완전한 열반에 들었는지에 대해서 의심한 것이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의 질문에 답을 해 주었다. 앙굴리말라는 완전한 열반에 들었음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서는 “예전에 한 명의 선한 친구도 얻지 못해 이와 같은 악을 저질렀으나 나중에 선한 친구의 도움을 얻어 방일하지 않아 그로써 악업을 선업으로 덮었다.”(DhpA.III.169-170)라고 말해 주었다.
초기경전과 논서에서 보름달과 관련된 것이 종종 발견된다. 그러나 대승에서 말하는 불성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달이 차면 그 보름달에
사람들이 합장하듯이,
세상 사람들은 고따마께
예배하고 공경합니다.”(M98)
“빛을 비추는 태양 같은,
가득 찬 보름달과 같은,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을
아지따는 보았다.”(Stn.1016)
“보름달 밤에 떠오르는 달처럼
그대의 마음은 완전히 해탈되었으니
일어서소서, 영웅이여, 전쟁의 승리자여” (S11.17)
“그런 아는 사유가
원만함이 보름달과 같았다.
모든 번뇌 다했으니
이제 다시 태어남이란 없다.”(Vism.1.130)
“계를 성취하여 빛나는
비구는 고행의 숲에서 빛난다.
마치 보름달이 허공에서 빛나듯이.” (Vism.1.159)
“구름없는 하늘에 둥근 보름달처럼,
황금색 돌 위에 놓인 보석처럼 청정하다.
그러므로 있기 때문에, 청정하기 때문에
와서 보라고 초대할만하다.” (Vism.7.82)
일상의 당연한 것이 깨달음
도겐선사의 일대기 젠을 유튜브에서 보았다. 일본불교에서 그래도 초기불교에 가까운 것이 조동종이라 보여 진다. 그러나 불성에 대한 것도 있어서 초기불교라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좌선을 통하여 있는 그대로 실상을 여실히 보아야 한다는 것에 있어서는 부처님 가르침과 같다.
영화 젠에서는 일상의 당연한 것이 깨달음이라고 했다. 그래서 “봄에는 꽃, 여름에는 두견새, 가을엔 달, 겨울엔 눈”이라고 했다. 어쩌면 진리는 바로 우리 옆에 있는 것인지 모른다.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야말로 진리라고 할 수 있고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2021-04-0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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