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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예견한 보헤미안 랩소디

담마다사 이병욱 2021. 2. 14. 10:39

운명을 예견한 보헤미안 랩소디

 

 

어제 SBS에서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았다. 이 영화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영국의 보컬그룹 퀸의 가수에 대한 것이다. 단편적으로 소개된 것만 알고 있었는데 설연휴를 맞이하여 공중파방송에서 그것도 저녁 황금시간대에 방영한 것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보지 못했다. 채널을 돌리다가 걸린 것이다. 그럼에도 비교적 처음부터 본 것이나 다름없다. 영화 초반부터 보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애잔한 느낌이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2018년 작품이다. 공항에서 수하물 노동자로 일하던 청년이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된다는 영화이다. 청년은 프레디 머큐리라는 예명이다. 파키스탄 이민자 출신의 아들이다.

 

영화에서 보헤미안 랩소디의 가사는 6분이다. 그런데 방송에서 6분은 매우 긴 시간이라는 것이다. 대부분 3분 이내이다. 그럼에도 6분짜리 음악이 대성공을 이룬다. 그룹 퀸을 대표하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영화를 보면서 짠한 느낌이 든 것은 주인공이 에이즈에 걸렸을 때 부터이다. 아웃사이더에서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지만 가혹한 운명에 걸린 것이다. 그가 에이즈 검사를 받고 난 다음 그룹 멤버들에게 나 걸렸어라고 말했다. 이는 체념과 절망의 말이다.

 

한시적 삶을 살아야 하는 그는 마지막 불꽃처럼 타오른다. 대형 스타디움에서 자신을 태워 버린 것이다. 노래 중에서 엄마, 인생은 방금 시작됐었는데. 그러나 방금 전 다 끝났어요(Mama,life had just begun, But now I′ve gone and thrown it all away..)”라는 가사가 있다. 보헤미안 랩소디 가사중의 일부이다. 이 노래를 들으면 마치 주인공의 운명을 예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룹 퀸은 6분짜리 보헤미안 랩소디로 유명해졌다. 이 노래가 데뷔작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주인공이 에이즈에 걸리고 나서 대형스타디움에서 마마하며 절규하듯이 불렀는데, 이 노래의 가사가 마치 주인공의 운명을 예견하듯 했다는 것이다.

 

흔히 말하기를 노래가사대로 된다고 말한다. 유행가 중에서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이 있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정말 낙엽따라 가버렸다. 어떤 이가 슬픈 노래를 부른다면 그 슬픈 감정이 마음을 지배하여 그 노래가사 대로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젠가 회사동료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노래가 있었다. 어떤 친구가 두 사람의 결혼식을 축하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불렀다. 왜 하필이면 그 노래를 불렀을까? 아마 자신 있게 부를 수 있는 노래가 그것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그 노래에 사람들은 약간 썰렁한 기분이 되었다.

 

대형스타디움에서 사람들은 프레드 머큐리의 노래에 환호했다. 프레드 머큐리는 엄마 , ,엄마 나를 보내줘. 마왕이 내 옆에다 악마를 보냈어요 나를 위해.”라고 애절하게 불렀다. 에이즈에 걸려서 죽음의 사신이 옆에 있는 것처럼 부른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들은 두 팔을 올려 흔들며 환호하며 따라 부른다. 이런 노래는 차라리 울부짖음에 가깝다.

 

노래에 대한 두 가지 시각이 있다. 하나는 대중이 보는 시각이 있고, 또 하나는 수행자가 보는 시각이 있다.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마이크를 막대삼아 열정적으로 노래할 때 대중은 환호하며 이를 즐긴다. 그러나 수행자는 정반대로 본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님의 계율 안에서 노래는 울음이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춤은 광기이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것은 장난이다.”(A3.103)

 

 

부처님은 노래는 울음이고, 춤은 광기이고, 웃는 것은 장난이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세계적인 아티스트의 대형스타디움 공연은 울음이고, 광기이고, 장난인 것이 된다.

 

그가 아무리 노래를 잘 불러도 공감하지 못한다면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큰 소리로 감정을 가득 실어서 부른다면 울부짖음으로 들릴 것이다.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춘다고는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았을 때는 미친 짓으로 보일 것이다. 그가 아무리 유머 있는 이야기를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흰 이를 드러내며 장난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노래와 춤을 대하는 것에 있어서 사람마다 다르다. 일반사람들은 즐기려 하지만 수행자는 즐기려 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부처님은 노래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자신도 그 소리에 애착되고, 타인도 그 소리에 애착되고, 재가자들은 우리가 노래하듯, 똑같이 이 수행자 싸끼야의 아들들도 노래한다.’라고 비난하고, 음조에 매혹되어 삼매를 잃고, 다음 세대들이 범례를 따르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법문을 길게 끄는 노랫소리로 암송하면,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재난이 있다.”(A5.209)

 

 

수행자는 노래를 불러서는 안된다. 부처님은 수행자가 노래를 불러서는 안되는 이유에 대하여 다섯 가지 재난이 있다고 했다. 자신이 낸 소리에 애착되는 것, 타인의 소리에 애착되는 것, 재가자의 비난, 음조에 매혹되어 삼매를 잃는 것, 후대에 나쁜 선례를 남기는 것을 들었다.

 

노래를 하면 노래에 빠져 든다. 이는 노래에 대한 갈애와 집착을 말한다. 무엇이든지 집착하면 해탈에 방해가 된다. 그래서 노래를 부르지 말라고 했다. 심지어 부처님 가르침을 암송한다고 하여 길게 끄는 가락으로도 노래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길게 끄는 가락에 맞추어 가르침을 노래해서는 안된다. 노래하면 악작죄가 된다.”(Vin.II.108)라고 했다.

 

가르침을 노래처럼 하는 것은 악작(惡作), 즉 나쁜 행위가 된다. 그러나 예외없는 법은 없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읊조리는 것은 허용한다.”(Vin.II.108)라고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읊조리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영창(詠唱)을 의미한다. 시를 읊듯이 가르침을 기억하며 읊는 것을 말한다. 노래(gāyana)와 읊조림(sarabhaññe)은 다른 것이다.

 

프레드 머큐리는 짧은 생을 살았다. 에이즈에 걸려서 199145세의 나이에 죽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면 프레드 머큐리의 일상적 삶에 대한 것도 보여 주었다. 그는 화려한 무대에서 열광하는 관중들에게 카리스마와 끼를 마음껏 발산했지만 홀로 있을 때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마치 절정에 이른 다음 찾아오는 허()와 무( )같은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늘 술병을 들고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 무료와 권태를 참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쾌락에 빠지게 되어 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자들은 쉽게 감각적 쾌락의 늪에 빠지기 쉽다. 부와 명성을 이룬 자들도 그러기 쉽다. 부자들이나 연예인이 내면적으로 공허함을 느낄 때 무언가 충족시켜 줄 것을 찾는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다. 처음에는 술이나 섹스에 빠지만 차츰 마약으로 옮겨 간다. 이것은 재난이다.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재난을 보았다. 이는 부처님이 감각적 욕망에서 재난을 살피고, 그것에서 벗어남을 안온으로 보고 나는 정진하러 가는 것입니다.”(Stn.424)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는 제자들은 악마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시간에 매인 것이고, 괴로움으로 가득 찬 것이고, 아픔으로 가득 찬 것이고, 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훨씬 더 크다.”(S1.20)라고 말한 것이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애잔한 마음으로 보았다. 짧고 굵게 살다 간 아티스트는 겉으로는 화려한 삶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공허한 삶이었다. 결국 무료와 권태를 이기지 못하여 감각적 쾌락의 삶을 추구한 결과 결국 에이즈라는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그가 대형 스타디움에서 병을 가진 채 공연했을 때 그것은 차라리 울부짖음이었고 광기였다.

 

 

 

2021-02-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