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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마스크를, 인페르노(Inferno)와 자업자득(自業自得)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2. 30. 10:00

 

오늘도 마스크를, 인페르노(Inferno)와 자업자득(自業自得)

 

 

오늘도 마스크를 쓰면서 엘리베이터를 탄다. 일터로 가는 길 첫 관문은 엘리베이터이다. 이제 마스크를 하지 않으면 예의가 아니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으면 공공의 적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어제 저녁 채널을 돌리다가 한 영화채널에서 멈추었다. 영화가 막 시작하려고 했다. 이런 경우 놓치지 않는다. 대개 중간쯤에 보게 되어서 그만 두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경우는 행운이라 해야 할 것이다.

 

요즘 영화채널에서 머무는 경우가 많다. 의도적으로 뉴스를 보지 않는다. 종편은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할 것 같다. 세상만사 내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관심을 다른 곳에 돌리는 것이 좋다. 영화처럼 만만한 것이 없다.

 

걸린 영화는 인페르노(Inferno, 2016)’이다. 채널을 돌리다가 종종 보았지만 끝까지 집중하지 못했다. 쫓고 쫓기는 장면이 많다. 스토리를 모르고 보려하니 끝까지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보기 시작했으니 영화가 끝날 때까지 몰입하게 되었다.

 

 

영화는 오늘날 코로나상황을 예측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다. 또한 음모론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지구인구가 계속 늘어나 이제 80억명이 된 시점에서 앞으로 40년후가 되면 320억명이 될 것이라 한다.

 

유사이래 인구는 꾸준히 늘어 왔다. 가면 갈수록 가파르게 상승하여 최근 50년 동안 두 배로 늘었다. 이런 추세라면 기간은 반으로 줄어 들고 인구는 배가 된다. 마침내 지구가 사람으로 가득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영화를 보면 어떤 음모가 진행된다. 현재 이 시점에서 인구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산아제한정책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고 한다. 지금은 인류멸망 자정 1분전이라 하며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이러스를 유포하여 인구조절을 하겠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바이러스가 든 기폭장치 박스를 찾기 위해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진다. 기폭장치가 가동되면 바이러스가 급격하게 확산되어 인류는 절반가량 죽을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지옥과 같은 상황을 맛볼 것이다. 영화제목이 인페르노인 것은 단테의 신곡에 있는 지옥을 의미한다.

 

현재 유럽과 미국의 상황을 보면 지옥과 같은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백신이 개발되어서 접종에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지난 1년동안 세계는 지옥과 같은 삶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갑작스럽게 발생되었다는 것이다. 처음 중국 우한에서 시작되어서 우한코로나라고 했다. 음모론자들은 중국을 지목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빌 게이츠가 타겟이 되고 있다.

 

 

코로나는 언제 종식될까? 갖가지 음모론 속에서도 하나의 희망이 보이고 있다. 백신이 개발된 것이다. 그것도 코로나가 발생된지 1년 만이다. 백신 개발하기가 힘들다고 하는데 이렇게 빨리 개발되는 것도 음모론적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코로나는 인류에게 있어서 재앙이다. 인구가 불과 50년만에 배로 늘어났는데 앞으로 배가 되는 데는 더 짧아 질 것이라고 한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인구만 늘어나면 어떻게 될까?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는 세상으로 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역병이 돌 수밖에 없다. 이를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바이러스를 유포한다는 것은 망상이다. 영화에서는 이런 망상을 분쇄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극단적인 조치 말고 인류를 구원하는 방법은 없을까? 이럴 때 불교적 해법을 생각해 본다.

 

 

인구가 이렇게 급격하게 불어난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욕망에 있다. 욕망을 자제할 줄 모르는 것이 결국 파국적 상황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런데 본래 인간은 욕망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오취온적 존재임을 말한다.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 , 나의 자아라고 집착되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은 본래 악하고 불건전한 존재이다. 성악설이 힘을 받는 이유이다.

 

왜 인간은 본래 악한 존재인가? 그것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잠재적 성향을 타고 났기 때문이다. 아기 때는 천진무구해 보이지만 자아의식이 생겨나면서 숨겨져 있던 잠재성향은 차츰 발현된다. 사춘기가 되면 대부분 발현되는데 마치 움직이는 폭탄과도 같은 존재가 된다. 언제 어느때이건 조건만 맞으면 폭발하게 되어 있다. 이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오취온적 존재로서 바탕에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욕망의 존재이다. 그래서 부처님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욕계(欲界)’라고 했다. 그런데 욕망은 언제든지 탐욕이 될 수 있고, 또한 성냄이 될 수 있다. 탐욕과 성냄은 항상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탐욕으로 살아가고 성냄으로 살아간다. 이런 삶은 필연적으로 괴로움을 야기한다. 그래서 어리석다고 한다.

 

욕망의 세계에서 욕망으로 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만일 욕망이 없다면 식욕도 성욕도 없을 것이다. 인류가 유지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욕망이 결국 파멸로 이끈다는 것이다. 이는 십이연기정형구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욕계에서 욕망의 존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해법을 제시했다. 그것은 팔정도의 삶이다.

 

팔정도의 삶을 살면 욕망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 중에 하나가 감각적인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에서 떠난 뒤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S45.8)라는 정형구이다. 이 구절은 삼마사마디에서 초선정에 대한 것이다.

 

욕계를 떠나는 첫번째 조건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는 오욕락을 추구하는 삶을 떠난다는 말과 같다. 눈과 귀, 코와 현, 그리고 감촉으로 즐기는 삶에서 벗어남을 말한다. 그러나 쉽지 않을 것이다. 본래 오취온적 존재로서 바탕에는 욕망이 세팅 되어 있는데 욕망을 포기하라는 것은 죽음과도 같을 것이다. 그럼에도 욕계를 탈출하려면 먼저 감각적 욕망을 포기하라고 했다.

 

중학교 때의 일이다. 중학교 1학년 때 사회시간에 선생님은 인구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그때도 인구문제가 심각했었던 것 같다. 특히 석유파동으로 인하여 미래가 암울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때 한 한생이 인간도살장을 만들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경악했다. 선생님도 나무랐다. 그 친구는 왜 이와 같은 무시무시한 말을 했을까? 지금도 의문이다. 아마도 책을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그때도 음모론이 있었을 것이다.

 

영화에서처럼 바이러스를 유포하여 인구조절하겠다는 발상은 인간도살장을 만들자는 말과 같다. 아무리 말세라 해도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없다. 중세시대 때처럼 흑사병이 돌아서 전멸되다시피 한적도 있지만 인위적으로 인구조절하겠다는 발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때 불교적 해법이 요청된다.

 

 

불교적 해법은 근본적이고 근원적이다. 욕망을 바탕으로 깔고 있는 존재에게는 악하고 불건전 것(akusala)’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인간은 본래 악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근본은 악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팔정도경을 설했다. 만약 인간이 선하게 태어났다면 팔정도경을 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악설 존재로서 인간은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한다. 불선법이 일어나지 않게 제어해야 한다. 이는 팔정도에서 삼마와야모(정정진)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다. 불선법은 끊어야 한고 선법은 증장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늘 지켜보는 것이다. 그래서 눈과 귀 등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는 것을 제어해야 한다. 그래서 감각적인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에서 떠나라고 했다. 이렇게 해야 욕계를 탈출할 수 있다.

 

부처님은 욕계뿐만 아니라 삼계를 완전히 탈출할 수 있는 길도 제시했다. 그것은 팔정도의 길이다. 팔정도의 길로만 죽 가면 다시는 태어나고 죽는 일이 없는 완전한 열반에 들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 가르침에 희망이 있고 구원이 있는 것이다. 그 첫번째 출발은 감각적인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에서 떠나는 것이다.

 

오늘도 마스크를 쓰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누구하나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은 없다. 거리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 일년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앞으로 백신을 맞아서 집단면역이 생긴다면 마스크를 벗을 수 있을까? 아마 당분간 벗지 못할 것이다. 습관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스크는 근본 대책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마음 속에 있는 욕망을 제어하는 것이다.

 

욕망의 제어야 말로 인류가 사는 길이다. 바이러스를 유포하여 인구조절하겠다는 발상은 지옥문을 여는 것과 같다. 영화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욕망의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악행을 저지를지 모른다. 이런 때 불교적 해법이 요청된다. 인류가 팔정도의 가르침대로 산다면.

 

 

2020-12-3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