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드라마후기

나는 가련한 나그네, 영화 1917을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1. 2. 13. 07:38

나는 가련한 나그네, 영화 1917을 보고


영화 1917을 보았다. 숫자로 된 영화 제목이다. 1492, 1987 같은 영화이다. 신대륙 발견이나 6.10 항쟁 등 특별한 해에 대한 영화이다. 그렇다면 1917?

1917
은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영화이다. 1917하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전을 떠 오르게 한다. 유사이래 최대의 소모전이라 알려져 있다.

1917
은 여러 영화평론가들에 의해 소개된 바 있다. 영화채널 자막을 보니 첫방송이라는 자막이 떠 있다. 영화채널에서는 처음 방영된 것이다. 설날을 맞이해서 방영된 것일까? 관심을 가진 영화였는데 마침 영화채널에서 방영하길레 보았다. 중간에 보긴 했지만 그래도 초반에 보았기 때문에 끝까지 완주했다.

 


1917
이 주는 메세지는 무엇일까? 대부분 전쟁영화가 그렇듯이 전쟁에 대한 참상이다. 하필이면 그런 시기에 태어나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 갔을까?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을 때 억울한 생각이 들것이다. 좋지 않은 시기에 좋지 않은 상황에 놓인 자신을 발견했을 때 내가 이러려고 태어났나?”라는 생각도 들것이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중요한 메세지 전달임무를 부여받았다. 메세지를 전달해야 1,600명 연대 병력을 살릴 수 있다. 죽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전달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긴다. 마치 꿈꾸는 것 같다.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극적이다. 꿈속에서는 살인도 하는데 전장에서는 꿈속에서처럼 죽고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전장터에서 죽음은 일상이다. 동료의 죽음을 슬퍼하는 주인공에게 소령은 너무 마음에 두지 말게.”라고 말한다. 빨리 잊어버려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불과 몇 분만에 슬픔을 털어 버리고 일상으로 복귀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전장터에서는 재수 없으면 죽는다. 모든 것은 운에 달려 있다. 운이 좋으면 살아 남고 운이 없으면 죽는 곳이 전장터이다. 그래서 슬퍼할 겨를이 없다. 전투하다 죽었다면 죽었네.”하면 그 뿐인 것 같다. 자신도 그럴 운명에 처해 있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 장면이 있다. 전쟁에 지친 병사들에게 노래를 들려주는데 성가를 듣는 것 같다. 병사들은 아름다운 노래에 위로 받은 듯하다. 전쟁하다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은 노래이다. 특히 노래가사가 그렇다. 스마트폰으로 화면촬영한 것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가련한 나그네.
고통스런 세상을 한없이 떠도네.
이곳엔 병도 없고 위험도 없다네.
밝은 땅으로 나는 나아가네.
내 아버지를 만나러 그곳에 가네.
방황을 끝내러 그곳에 가네.
나는 이제 요단강을 건너네.
나는 이제 집으로 가네.”

 


참으로 구슬프고도 희망을 갖게 하는 노래이다. 전쟁하다 죽으면 천국에 태어남을 말한다. 진중에서 이 노래를 부르자 병사들은 숙연해진다. 아마 죽어도 좋다고 여길지 모른다. 살면 다행이고 죽으면 아버지가 있는 집에 간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두 곳에 집이 있는 셈이 된다.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면 아버지 어머니가 있는 곳에 가게 된다. 전장터에서 죽으면 하나님 아버지가 있는 천국의 집에 가게 된다. 이래도 집에 가고 저래도 집에 가는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목숨에 집착하지 않게 하는 노래라고도 볼 수 있다.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설령 그것이 정의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폭력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그래서 그 어떤 폭력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전쟁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것이 정의로운 전쟁일지라도 전쟁 그 자체는 폭력이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없다.

전쟁을 왜 하는가? 가만 따져보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때문에 전쟁을 한다. 어떤 전쟁도 이 세 가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전쟁광들의 탐욕, 분노, 어리석음 때문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전장터로 끌려 나간다. 더구나 전쟁광들은 끊임없이 증오와 적개심을 부추긴다. 증오와 적개심 없이는 전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증오와 적개심으로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한다.

전쟁하다 죽으면 정말 천국에 갈까? 증오와 적개심으로 가득 차서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서 죽으면 정말 천상에 태어나는 것일까?

상윳따니까야에 전사의 경이 있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촌장은 부처님이 마을에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촌장은 평소 궁금하게 생각한 것이 있었는데 부처님이 오면 물어보고자 했다. 마침내 부처님이 마을에 오시자 이렇게 물어보았다.


세존이시여, 저는 전사들의 옛 스승의 스승으로부터 이와 같이전사는 전쟁터에서 전력을 다해서 싸워야 하는데 전력을 다해서 싸우면서 적들에 의해 살해되어 죽임을 당하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전사자의 하늘에 태어난다.’라고 전해 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 하시겠습니까?”(S42.3)


촌장의 이와 같은 질문에 부처님은 어떻게 대답했을까? 촌장의 기대와는 달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촌장이여, 전사가 전쟁터에서 전력을 다해서 싸운다면 그의 마음은 이와 같이이 사람들을 구타하거나 결박하거나 절단하거나 박멸하거나 없애 버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이미 저열해졌고 불우해졌고 사악해졌습니다. 그 전력을 다해서 싸우는 자를 적들이 살해하여 죽인다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전사자의 지옥이 있는데 그곳에서 태어납니다.”(S42.3)


부처님 가르침은 충격적이다. 전쟁하다 전장터에서 죽으면 전사자의 지옥에 태어난다고 했다. 이는 증오와 적개심 때문이다. 죽고 죽이는 전장터에서 증오와 적개심이 없이는 전쟁을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전쟁하다 죽은 자가 천국이나 천상에 태어난다는 말은 목숨을 가벼이 여기게 하는 말과 같다. 그래서 예로부터 전쟁광들은 어차피 한번은 죽는 목숨이다. 목숨을 아끼지 말라.”라고 했다. 반면 평화주의지들은 오직 한번 뿐인 목숨이다.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라고 말했다.

 


전쟁없는 평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만약 전쟁의 시기에 태어나 전장터에 있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살인도 서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살아야 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죽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증오와 적개심이 없다면 용서될지 모른다. 증오와 적개심 없이 죽는다면 노래가사처럼 그곳에 갈지 모른다.


나는 가련한 나그네.
고통스런 세상을 한없이 떠도네.
이곳엔 병도 없고 위험도 없다네.
밝은 땅으로 나는 나아가네.
내 아버지를 만나러 그곳에 가네.
방황을 끝내러 그곳에 가네.
나는 이제 요단강을 건너네.
나는 이제 집으로 가네.”

 

 

 



2021-02-1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