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히 원한다면 운명도, 맷 데이먼의 ‘컨트롤러’를 보고
믿고 보는 영화가 있다. 맷 데이먼이 나오는 영화도 그중 하나이다. 어제 저녁 맷 데이먼이 나오는 영화에 집중했다. ‘컨트롤러(The Adjustment Bureau, 2011)’라는 타이틀을 가진 영화이다.
믿고 보는 효과는 있었다. 믿고 보았기 때문에 끝까지 본 이유도 있다. 영화 후기를 쓸 정도라면 남는 영화이다. 시간낭비가 아니라 건질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운명에 대한 것이다. 운명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바꿀 수 있음을 말한다.
나의 운명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는 어떤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일까? 현재 육체적 정신적 조건은 운명 지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남들과 비교하여 열등한 육체적 정신적 조건은 불리한 것이다. 그래서 이모양 이꼴인지 모른다. 또한 나는 욕망의 지배를 받고 있다. 먹는 것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운명지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으로 본다면 운명을 믿는다.
사람들은 일상을 살아간다. 대개 비슷비슷하다. 특별한 마음을 내지 않는 한 운명대로 살아가기 쉽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주어진 조건대로 사는 것이다. 그러나 포부가 있는 사람이 있다. “나는 이렇게 될거야!”라며 큰 결심을 내는 사람이다. 정말 포부대로 된다. 이는 운명을 거부한 것이다. 결심으로 운명의 물줄기를 바꾸어 버린 것이다. 영화 컨트롤러에서 주인공도 그랬다.
맷 데이먼은 한 여인과 사랑을 하여 결혼하도록 운명지어져 있었다. 그러나 컨트롤러의 방해로 인하여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이를 주인공은 눈치 채지 못한다. 우연이라고 보였던 것이 사실은 컨트롤러의 조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컨트롤러는 보통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이다. 다만 맨인블랙처럼 검은 양복에 모자를 쓰고 있는 점이 다르다. 그들은 인간보다 오래 산다. 인류가 시작되기도 전에 있었다. 여러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서 인류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이끌어 준다. 인류의 문명도 그들이 기획한 것이다. 심지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등 역사적으로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조정자라 불리우는 컨트롤러가 의도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한때 방심한 적이 있다. 그 결과 제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애써 관심을 기울여 왔던 존재들이 스스로 멸망하게 될 것을 우려하여 인간사에 적극 개입하게 된 것이다.
컨트롤러는 인간의 미래를 암울하게 본다. 내버려 두면 멸망하고 말 것이라 여겨서 미래 지도자를 선정한다. 그 사람이 맷 데이먼이다. 뉴욕주의 상원의원인 펫 데이먼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도 네 번이나 하게 하는 대통령이다. 맷 데이먼을 통해서 인류의 멸망을 막아 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컨트롤러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주인공은 한 여인과 사랑에 빠지기 때문이다.
맷 데이먼은 컨트롤러의 조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는 여인과 도피행각으로 나탄난다. 컨트롤러의 추적을 피하여 도망간다. 이 과정에서 어느 고위 컨트롤러의 도움을 받는다. 비밀의 문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 준다. 손잡이를 왼쪽으로 돌리면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진다. 마침내 컨트롤러 본부에 이르게 된다. 인간을 조정하는 곳이다. 운명대로 살도록 조정하는 본부가 있는 곳이다.
컨트롤러는 인간이 정해진 운명대로 살지 않으면 즉각 개입한다. 이는 우연으로 나타난다. 우연한 사건으로 인생의 물줄기가 바뀌는데 사실은 컨트롤러가 개입한 것이다. 그래서 “우연은 없다”라고 말한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인 것이다.
평범한 일상을 살면 운명지어진 것이다. 사람들이 자유의지로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컨트롤러의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 고작 “커피를 마실 것인가 차를 마실 것인가?”정도의 의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개입하지는 않는다.
컨트롤러는 운명의 궤도를 이탈하면 개입한다. 그것은 큰 결심했을 때이다. 이는 정해진 궤도에서 일탈하는 것이다. 이때 컨트롤러는 우연한 사건을 만들어 본래 궤도로 되돌려 놓고자 한다. 그러나 미래 미국의 4선 대통령이 되도록 설계되어 있는 맷 데이먼은 이를 거부한다. 여인과 도피행각을 함으로 인하여 정해진 운명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맷 데이먼의 도피행각은 성공했다. 두 사람의 사랑 앞에 운명이 무릎 꿇은 것이다. 컨트롤러가 직접개입하여 두 사람을 벌려 놓고자 갖가지 우연한 사건을 만들거나 직접 개입했지만 두 사람의 사랑을 이겨 내지 못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강한 의지는 운명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음을 말한다. 컨트롤러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영화에서 컨트롤러는 조정자이다. 조종이 아니라 조정이다. 이는 인간이 컨트롤러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어느정도 의지를 가진 존재임을 말한다. 그러나 큰 틀은 벗어나지 못한다. 현실에서 일탈을 꿈꾸는 순간 우연으로 가장하여 개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해진 운명을 거부했을 때 희생이 따른다.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모르 파티, 이 말은 “네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뜻이다. 니체가 한 말이다. 강한의지는 때로 가혹한 운명에 처할 수 있다. 또한 강한 의지에는 많은 희생이 따른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운명을 거부했을 때 험난한 여정이 된다. 그러나 가혹한 운명을 극복했을 때 컨트롤러도 어찌할 수 없다.
한 여인에게 헌신했을 때 컨트롤러도 감동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컨트롤러는 그들의 운명을 다시 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드물다. 어쩌다 한번 가끔 나타난다. 컨트롤러는 이런 사람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정해진 운명에 저항하는 사람이야말로 콘트롤러가 바라던 것이다. 운명을 다시 쓰게 하는 사람이야말로 컨트롤러의 의도대로 사는 사람이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의지라고 보는 것이다.
인간에게 과연 자유의지는 있는 것일까? 습관대로 산다면 자유의지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알코올 중독자에게 자유의지가 없는 것과 같다.
알코올 중독자는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금단 현상으로 인하여 자신도 모르게 술병을 잡는다. 술 마시는 것은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술이 해로운 것을 알아 술을 끊지 못한다면 자유의지가 없다고 본다. 이는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는 세상을 욕계라고 한다. 욕망으로 사는 세상을 말한다. 욕계중생은 욕망으로 살도록 세팅되어 있다. 그래서 식욕과 성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욕계 중생은 오욕락으로 살아간다. 시각과 청각 등으로 즐기는 것을 말한다. 이는 어쩌면 운명 지어진 것인지 모른다. 사람들이 자유의지가 있다고는 하지만 욕망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의지는 없다. 마치 알코올 중독자와 같다.
정해진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을 때 자유의지는 없는 것과 같다. 커피나 차를 선택할 수 있는 의지는 있지만 운명을 바꿀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만약 그가 운명을 극복했다면 그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마치 알코올 중독자가 알코올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다.
알코올 중독자는 알코올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가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났다면 그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욕망의 세계에서 욕망을 벗어난 자가 있다면 그도 역시 자유의지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대부분 욕망대로 살아간다. 그래서 자유의지가 없다.
영화 컨트롤러는 자유의지에 대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강하게 원했을 때 전혀 다른 운명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거기에는 희생이 따른다. 목숨을 걸 정도의 용기가 있어야 한다. 맷 데이먼은 여인을 위하여 목숨걸고 사랑했기 때문에 컨트롤러도 운명을 다시 써야 했다. 과연 나는 운명을 바꾸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 왔던가?
운명을 바꾼 사람들이 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자라 해야 할 것이다. 만일 어느 수행자가 세 가지 결박을 풀어 예류자가 되어 사악처에 떨어지지 않고 해탈하기를 원한다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그것은 먼저 계, 정, 혜 삼학을 닦는 것이다. 계행을 바탕으로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했을 때 원하는 바가 이루어질 수 있다. 범부중생에서 성자로 계보가 바뀐 것이다. 운명이 바뀐 것이다. 그러나 원한다고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운명을 바꾸려면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운명은 정해져 있지만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노력한다면 그 운명은 바뀔 수 있다. 때로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 우리의 운명도 간절히 원한다면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자유의지란 그것을 얻기 위해 투쟁해야만 선물로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라고 영화에서는 말한다.
2021-02-2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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