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 있는 자만이 세상을, 영화 그린북을 보고
초등학교 삼사학년 때인 것 같다. 어느 해 봄날 창경원에 갔었다. 그때 흑인을 처음 보았다. 벗꽃놀이 철에 사람들로 가득했었는데 그중 눈에 띈 것은 새까만 피부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 옆에는 아가씨도 붙어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흑인은 미군이었고 아가씨는 양공주, 양색시, 양갈보 등으로 불리는 여자였다.
흑인에 대한 인상은 강렬했다. 어린 마음에 “어떻게 저렇게 새까맣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피부색은 새까맣지만 분명히 사람이었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옆에 있었던 아가씨였다. 어른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속 시원하게 알려 주지 않았다.
중학교 다닐 때 혼혈아가 있었다. 한명은 겉으로 보기에 흑인혼혈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이다. 머리가 곱슬곱슬하고 피부가 까무잡잡한 것이 눈에 띄었다. 생김새도 흑인처럼 생겼다. 같은 반이었는데 어느 누구도 혼혈아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마 마음 속으로는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누구 하나 놀리거나 차별하지 않았다. 앞 번호인 그 친구는 외톨이처럼 사람도 사귀지 않았다.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였다.
중학교 때 또 한명의 혼혈이 있었다. 이번에는 백인혼혈이다. 아무도 그가 혼혈아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백인 피가 섞인 것이 분명했다. 번호가 비슷해서 종종 말을 했었다. 그 친구는 경계선상에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보면 한국사람처럼 보이고 또 저렇게 보면 백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흑인 혼혈은 표가 나지만 백인 혼혈은 경계에 걸쳐 있어서 아리까리 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기가 막히게 잘 생겼다는 것이다. 누가 보아도 사귀고 싶을 정도로 미남형이었다. 그래서인지 교생들도 관심을 보였다. 동국대 사대학생들이 교생실습하러 왔을 때 관심을 보인 여자 교생선생도 있었다. 동대부중 2학년 때이다.
두 명의 혼혈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살아 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피부색이 다름으로 인하여 차별 받았을지 모른다. 출신이 달라서 고단한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어느 하늘 아래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당연히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다.
어제 저녁 영화채널에서 ‘그린북(Green Book, 2019)’을 보았다. 마침 영화가 시작 되고 있어서 완주했다. 사실 이전에 한번 본 적이 있다. 도중에 본 것이다. 결과적으로 두 번 보았다.
두 번째 보았을 때는 집중해서 보았다. 영화 줄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당기는 것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문제인가? 자막에 ‘편견에 맞선 두 남자의 특별한 여행’이라고 소개 되어 있는 것처럼, 영화에서는 “이런 시대도 있었다.”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 같다.
두 남자가 여행을 떠났다. 한사람은 흑인이고 또 한사람은 이탈리안이다. 흑인은 상류층 사람이고 이탈리안은 하류층 사람이다. 위치가 뒤바뀐 듯해 보인다. 그러나 엄연한 현실이다. 흑인은 성공한 피아니스트이고 박사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이탈리안은 운전사이며 처자식을 부양해야 하는 빈민층 사람이다.
영화는 두 남자가 뉴욕을 떠나 중부와 남부로 여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흑인 피아니스트가 일종의 전국순회 공연을 하는 것이다. 때는 1963년이다. 케네디가 집권하던 시기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때 당시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이 매우 심했다는 것이다. 특히 남부로 내려갈수록 절정에 달했다.
그린북은 흑인 여행자를 위한 여행안내서이다. 흑인들만이 머물 수 있는 숙박업소와 식당이 소개되어 있다. 영화에서는 피아니스트이자 박사이고 명사인 흑인이 겪는 수난에 대하여 잘 묘사해 놓았다.
화장실도 흑백 차별이 있어서 들어가지 못한다. 할 수 없이 자동차를 이용하여 30분 걸리는 숙소까지 가서 해결해야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영화에서 “여긴 그런 동네에요.”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오래 전부터 내려온 관행이라는 것이다. 대체 이런 법은 누가 만든 것일까? 편견과 차별하는 것도 지역에 따라 법이 된 것이다.
영화에서 클라이막스가 있다. 미시시피주 잭슨빌 공연을 가다가 경찰에게 걸린 것이다. 경찰은 차에 흑인이 있는 것을 보고서 연행하려 했다. 미시시피에서 흑인은 일몰 후에 돌아다닐 수 없는 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폭행사건이 발생했다. 이탈리안이 격분해서 경찰을 갈긴 것이다. 경찰은 백인이 흑인 따가리나 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 어디 출신이냐고 물었다. 이탈리아 출신이라고 말하자 “너는 반검둥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말에 자극받아 참지 못한 것이다.
두 명의 여행자는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경찰을 폭행하여 감금된 것이다. 그런데 죄 없는 흑인도 함께 감금되었다는 것이다. 흑인은 이와 같은 억울한 사실을 로버트 케네디 법무징관에게 알렸다. 흑인피아니스트는 법무장관과 친구였던 것이다. 결국 전화 한통화로 즉각 석방되었다.
두 명의 여행자는 차안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흑인피아니스트는 “난 평생 그런 모욕을 참았는데 겨우 하룻밤을 못참아요?”라고 말했다. 이후 차안에서 대화는 흑인뿐만 아니라 차별 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전개된다. 흑인만 편견과 차별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이민자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뉴욕 브롱스에서 대가족을 이루고 살아가는 이탈리아 이민자는 하류인생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탈리안 운전기사는 “내인생이 훨씬 흑인에 가깝죠.”라고 말한다. 하류층 이탈리아 이민자들은 사실상 흑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탈리안 이민자들은 흑인을 차별한다. 흑인을 벌레보듯이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콤플렉스를 가진 이탈리안 운전가사에게 미시시피 경찰이 “너는 반검둥이다.”라고 도발한 것이다. 이에 격분하여 갈긴 것이다.
영화 그린북은 이미 보았고 내용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빨려들어 가듯이 본 것은 메세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 보아도 새롭다. 두 번, 세 번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만약 영화가 질린다면 메세지가 잘 전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편견과 차별에 대한 메세지를 말한다.
피부색깔이 다르면 차별받는다. 중학교때 두 혼혈친구도 살면서 차별받았을 것이다. 피부색깔이 같아도 출신이 다르면 역시 차별받는다. 영화에서는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이라 해서 ‘반검둥이’라고 차별 받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편견과 차별은 없을까?
뉴욕 브롱스는 주로 빈민들이 사는 곳이다. 영화에서는 이민자들이 집단으로 사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다. 서울에서도 이농민들이 사는 곳이 있었다. 서울 변두리에 산동네, 달동네라고 불리던 곳이다. 마치 유럽 이민자들이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었듯이 산동네, 달동네에서도 이농민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 대가족을 이루며 사는 이탈리아 이민자들을 보니 60년대 말에 산동네, 달동네에서 살았던 이농민들이 오버랩 되었다.
미국은 국토가 거대한 나라이다. 인종도 다양하다.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이민자들이 사는 나라이다. 편견과 차별이 없지 않을 수 없다. 국토가 작은 한국 역시 편견과 차별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생긴 모습은 같아서 피부에 따른 차별은 없다. 그러나 말씨나 출신에 따른 편견과 차별은 엄연히 존재한다. 영화에서는 이런 편견과 차별을 부수고자 했다.
흑인 피아니스트가 뉴욕에 살면 편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남부로 순회공연 떠난 것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꾸어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편견과 차별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면서 바꾸고자 했던 것이다. 마치 케네디가 바꾸고자 했던 것과 같다. 영화에서 흑인 피아니스트가 “케네디 형제는 이 나라를 바꾸려고 애쓰고 있어요.”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 흑인피아니스트와 협업관계에 있던 백인은 “사람들을 바꾸려면 용기가 필요하죠.”라며 이탈리안 운전기사에게 말해 주었다.
어느 나라이든지 주류가 있으면 비주류가 있기 마련이다. 지역, 출신, 성별, 종교, 직업에 따라 차별이 없지 않을 수 있다. 더 무서운 것은 편견이다. 특히 인종편견과 지역편견은 망국적이다. 영화에서는 이런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양반이다. 지역편견과 차별이 있다고 해도 미국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문제를 던지는 영화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단지 감각을 즐기는 영화는 보면 볼수록 고문이지만, 문제의식을 가진 영화는 보면 볼수록 되씹어 볼 만 하다. 더구나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입해 보았을 때 공감한다면 메세지는 분명하게 전달된 것이다. 그것은 “용기 있는 자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라는 사실이다.
2021-01-2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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