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기

보고 싶은 것만 보면 이념의 노예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1. 5. 1. 11:18

보고 싶은 것만 보면 이념의 노예가

 

 

이 세상에서 쓰는 즐거움 만한 것이 있을까? 매일 아침 무언가 하나 써야 한다. 이른바 의무적 글쓰기를 말한다. 이런 세월을 십년이상 계속 해 오다 보니 오전은 쓰는 시간이 되었다.

 

가장 좋은 것은 미리 쓸 주제를 정하는 것이다. 그래야 머리 속에 정리가 된다. 일종의 머리속의 시나리오를 말한다. 그러나 오늘 같은 날은 주제가 정해지지 않았다. 이런 날은 책을 보아야 한다.

 

최진석 선생의 책 나홀로 읽는 도덕경을 열어 보았다. 한꺼번에 많이 보지 않는다. 하루에 조금씩 본다. 한번 읽고 깨끗이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할 만한 구절이 있으면 새기고자 한다. 그런데 모두 새기고 싶은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진도를 빨리 나갈 수 없다.

 

 

책을 읽다가 한 곳에서 멈추었다. 그것은 법가사상에 대한 설명에 대한 것이었다. 그 중에 한 구절은노자는 보고싶은 대로봐야 하는 대로가 아니라 보이는 대로봐야”(51)라는 내용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주관성을 배제하고 이 세계를 보라는 것이다.

 

최진석 선생의 책을 보면 읽는 맛이 있다. 강연도 듣는 맛이 있다. 이는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남에게 들은 것도 자신이 소화해서 이야기하면 자신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공감한다면 자신이 이야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노자의 이야기도 그렇다.

 

사실 중국철학에 대하여 관심 없었다. 초기불교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쓰기 하다 보니 다른 학문이나 다른 철학은 시시하게 보였던 것이다. 이는 어쩌면 조금 아는 자의 자만일지 모른다. 그러나 불교 밖에서도 위대한 사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사상 중의 하나가 노자인 것이다.

 

노자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상이 법가사상이다. 또한 순자의 성악설 또한 노자사상 계통이다. 이에 대하여 최진석 선생은 유가와 비교하여 설명한다. 유가의 사상이 주관적이라면 노자는 객관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대상을 어디에 두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대상을 사람에게 두면 유가의 사상이 된다. 대상을 자연에 두면 노자의 사상이 된다. 그런데 인간은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유가의 사상은 주관적 사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관이 개입되면 사물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자의 사상은 자연이 대상이기 때문에 사물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음을 말한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과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을 말한 것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은 주관적인 것이다. 반면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은 객관적인 것이다. 이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블로그에 쓴 글을 찾아보니 2014년에 쓴 것이다. 그때 당시 EBS에서 최진석 선생의 노자 강연을 듣고 블로그에 보여지는 대로 있는 사람은” 최진석교수의 노자강의’(2014-10-14)라는 제목으로 후기를 남겼다.

 

2014년 당시 최진석 선생이 이야기한 것을 녹취하여 글로 남겼다. 그 중에 상사문도, 중사문도, 하사문도에 대한 이야기는 신선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도를 이야기하면 크게 웃어 버린다는 이야기를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위빠사나 법사는 세상 사람들이 비난하지 않는 도는 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어디 가서 수행한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다. 세상사람들은 수행한다는 사람이또는 도 닦는다는 사람이라며 비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여 가족에게라도 수행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최진석 선생이 2014년 노자강연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때 당시 후기를 보니 “세계를 보여지는 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 하는대로 보는 사람을 항상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적어 놓은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어서 이렇게 인식하였을 때 특정한 이념이나 개념, 지식 등에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나름대로 정리해서 써 놓았다. 이념의 노예가 되지 말자는 것으로 이해했다.

 

강연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이야기는 앞서 언급한 대로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과 보이는 대로 보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이 말은 불교에만 있는 줄 알았으나 노자강연에서 이 말을 하는 것이 매우 놀라웠다. 노자 텍스트에는 없는 말로 알고 있다. 그래서 혹시 최진석 선생이 불교경전을 보고서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다나에 이런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바히야여,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바히야여, 볼 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므로 바히야여, 그대는 그것과 함께 있지 않다.”(Ud.6)

 

 

이 경과 유사한 문구는 상윳따니까야 말룽끼야뿟따의 경’(S35.95)에서도 발견된다. 여기에서는 시각, 청각과 같은 감각기관에 대한 인식작용을 설명했다. 한마디로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이다. 주관적으로 보지 말고 객관적으로 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볼 때는 보여질 뿐이다.(diṭṭhe diṭṭhamatta bhavissati)”라고 했다.

 

제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있다. 또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말도 있다. 자신이 해석한 방식대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이는 주관적 인식에 대한 것이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아서는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자신의 기준으로 하여, 자신의 잣대로 세상을 재단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념이나 사상, 신앙 등이 그렇다. 그 결과 긴장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이념의 노예가 되었을 때 전쟁이 일어난다.

 

노자사상은 법가로 연결되었다. 법가는 법대로라는 말이 연상된다. 이에 대하여 최진석 선생은 보이는 대로 보라는 노자의 사상이 법가에서 법대로 보라는 말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51)라고 했다.

 

노자의 무위자연은 법대로로 바뀐 것이다. 둘 다 모두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것이다. 내면적 주관을 철저하게 배제한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노자의 사상은 불교와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부처님은 볼 때는 보여질 뿐이며로 시작되는 가르침을 바히야에게 주었다. 더 나아가서 그대가 그것과 함께 있지 않다.”라든가, “그대는 그 속에 없다.”라고 했다. 그대는 이 세상에도 저 세상에도 그 양자에도 중간세상에도 없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다름 아닌 열반이다.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물도 없고 땅도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다.

거기에는 별도 반짝이지 않고

태양도 비추지 않는다.

또한 거기에는 달도 빛나지 않고

어둠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자인 바라문이 스스로

자신의 체험으로 이것을 알면

그는 물질계와 비물질계,

즐거움과 괴로움에서 벗어나리.”(Ud.6)

 

 

열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언어로 표현한 것은 비유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부처님은 언어로서 설명할 수 없는 진리에 대하여 비유로서 설했다. 열반도 그렇다. 열반을 설명하기 위하여 해와 달 등이 동원된 것이다.

 

노자를 보면 불교와 유사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서일까 불교가 처음 중국에 전래되었을 때 노자사상이 어느 정도 습합 되었다고 한다. 인도불교를 이해 못하니 노자사상 방식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를 격의불교라고 한다. 열반을 무위로 보고, 공을 무로 본 것도 이에 해당된다.

 

초기불교경전만 접하다가 노자를 접하면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비슷한 사상이 노자철학에도 있음을 발견한다. 그런데 불교인이다 보니 아무래도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이다. 열반의 경지에 이르면 불사가 된다. 불사이기 때문에 태어남이 없다. 그래서 불생불사가 된다. 모든 괴로움과 윤회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대자유를 맛보는 것이다.

 

노자사상 또는 노자철학에서도 수행도 있고 궁극적 목적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노자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자 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런 철학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족한다. 무엇보다 노자를 통하여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래서 보고 싶은 것만 보면 이념의 노예가 되지만, 보이는 대로 보면 이념의 자유인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2021-05-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