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기

곤(鯤)이 붕(鵬)이 되는 것처럼 이제는 건너가야, 최진석 선생의 대한민국읽기

담마다사 이병욱 2021. 4. 29. 10:13

곤()이 붕()이 되는 것처럼 이제는 건너가야, 최진석 선생의 대한민국읽기

 

 

한때 도올 김용옥에 열광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은 김용옥 선생 인줄 알았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다. 그런데 대한민국에는 김용옥 못지 않은, 김용옥을 능가하는 똑똑한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사람 중의 하나가 최진석 선생일 것이다.

 

똑똑하다는 말을 싫어 한다.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똑똑하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군계일학으로 여러 사람들 가운데 출중한 사람들이다. 한분야에서 일가견을 이룬 사람들도 그렇다.

 

노자를 알게 된 것은 김용옥 선생 때문이다. 서기 2000년이 시작되었을 때 김용옥 선생이 EBS에서 노자강연을 수십회 했었다. 노자의 내용 보다는 김용옥 선생의 카리스마에 반했다. 어쩌면 선생의 파격에 반했는지 모른다. 강연 도중에 욕설은 카타르시스였다. 강연을 듣고 나면 왠지 속이 후련했다. 그러나 기억나는 내용은 별로 없다.

 

노자 하면 김용옥인 줄 알았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몇 년 전 또다시 EBS에서 노자강연을 듣게 되었다. 이번에는 최진석이다. 노자 전매특허는 김용옥인 줄 알고 있었는데 또 다른 사람이 노자강연을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다. 아마 드문드문 어쩌다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튜브에서 최진선 선생의 노자강연을 모두 듣고 나서 완전히 달라졌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이 있다. 어려운 한자용어이다. 국어사전을 찾아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말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에 대하여 문자 쓴다고 할 것이다.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라는 뜻으로 말할 때 이런 말을 쓴다. 최진석 선생이 김용옥 선생의 제자는 아니지만, 노자와 관련하여 최진석 선생이 김용옥을 넘어섰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것일까?

 

최진석 선생은 노자만 강연하지 않았다. 장자도 강연했다. 또 반야심경도 강의했다. 모두 유튜브에서 본 것이다. 그것도 여러 번 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그런 강연인 줄 알았다. 텍스트나 읽고 해설하는 정도로 생각했다. 약간 고리타분하게 여긴 것이다. 그러나 들어 보니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함량, 추상, 건너기 등 이제까지 들어 보지 못한 것들이다. 노자나 장자와 전혀 관련 없을 듯한 이야기를 한 것이다. 최근에는 책 읽고 건너가기도 즐겨 듣고 있다.

 

최진석 선생이 보내 준 책을 읽고 있다. 어떤 인연으로 인하여 문자메세지로 소통하게 되었는데 책을 받는 인연으로까지 전개되었다.

 

두 권을 받았다. 하나는 나홀로 읽는 도덕경이고, 또 하나는 최진석의 대한민국읽기이다. 두 권은 성격이 다르다. 전자는 철학에 대한 것이고, 후자는 정치색이 짙은 것이다.

 

두 책은 아직 다 보지 않았다. 다만 서문을 읽고 책의 초반부만 접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대강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책의 서문이나 초반부에 말하고 싶은 것이 다 나와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두 책에서 공통적으로 언급한 것이 있다. 그것은 추상에 대한 것이다. 철학은 고도의 추상적 사유라는 것이다. 그런데 추상적 사유에 따라 그 사람의 현재 위치가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 사람의 눈높이와 관련이 있음을 말한다.

 

멀리 나는 새가 있다. 멀리 나는 새는 높게 난다. 그런데 높게 나는 새는 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추상적 사유를 하는 사람은 멀리 보고 높게 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인식의 지평이 넓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불교를 접하면서 나의 앎이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방대한 빠알리니까야를 접했을 때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그야말로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었다. 세상에 이런 세계에도 있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모르고 살았던 것이 분하고 억울한 느낌도 들었다.

 

흔히 소크라테스를 언급하며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라는 말이라는 것이다. 뭘 좀 안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통쾌한 한방을 날리는 말과 같다.

 

그동안 너무 무지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배운 것에서 멈추어 버린 것이다. 잡다한 것을 배웠지만 깊이 있는 것은 아니다. 취직을 위해서 공부한 것도 있다. 단지 습득지식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에 어떤 철학적 사유가 있을 수 없다.

 

세상을 살다 보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마치 에스컬레이터 타듯이 인생이 스스무스하게 흘러 가지 않는다. 학생 때는 공부하기 때문에 스무스한 것처럼 보였으나 이후 전개 과정을 보면 우여곡절을 겪는다.

 

인생의 파란이 일어났을 때 ?”라고 묻는다. “하필이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라며 억울해하는 것이다.

 

한계에 부딪쳤을 때 비로소 되돌아본다.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그것은 아무 생각없이 살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막행막식으로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감각적 삶이고 즐기는 삶이다.

 

오로지 즐기는 삶을 살았을 때 과보를 받는다. , , , , 몸으로 즐기는 삶을 살았을 때 재난이 닥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모른다. 남들이 그렇게 사니 나도 그렇게 산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주로 큰 길로 다닌다. 사람들이 가니 나도 따라 가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 길이 반드시 바른 길은 아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부처님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이는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나서 흐름을 거슬러가는, 심오하고, 보기어렵고, 미묘한 진리를 어둠에 뒤덮이고 탐욕에 불붙은 자들은 보지 못하네.”(S6.1)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은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삶과는 다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탐욕, 분노, 어리석음으로 살아가지만, 부처님 가르침은 이와 정반대로 무탐, 무진, 무치로 살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반대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가는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도 흐름을 거슬러가는 (Paisotagāmi)”이라고 한 것이다.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가르침을 역류도(逆流道)라고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고,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가기 때문에 역류도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대부분 성현들의 가르침은 역류도라는 사실이다.

 

성현들의 가르침에서 시류에 편승하라는 가르침은 찾기 힘들다. 노자도 그렇고 장자도 그렇다. 소크라테스도 그렇고 예수도 그렇다. 붓다는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성현들 대부분 가르침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가르침이다.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세상의 시류에 편승하지 말라는 말도 되지만 세상을 뛰어 넘으라는 말도 된다. 이는 세상을 초월한다는 말도 된다. 이에 대하여 최진석 선생은 건너기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최진석 선생의 최근 책 중에 최진석의 대한민국읽기가 있다. 올해 봄에 발행된 것이다. 그런데 책의 서문을 보니 독자들을 의식하는 표현이 눈에 띈다. 이는 책이 정치적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도 정치에 대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철학자가 정치에 대하여 말하는 순간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정치에 개입한다는 것이다. 이런 비난은 자신과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최진석 선생에 대한 글을 썼더니 비판하는 댓글을 받았다. 어떤 이는 격렬하게 비난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진영과 관계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저는 그사람의 장점만 보고 가렵니다.”라고 간단하게 적어 놓았다.

 

2016년의 일이다. 블로그에 글만 쓰다가 어떤 계기로 재가불교활동을 하게 되었다. 어느 단체의 들어가게 되었는데 대표와 운영위원간의 불화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어 탈퇴가 이어졌다. 대표에게 실망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동요되지 않았다. 그때 그는저는 그사람의 장점만 보고 가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크게 깨우쳤다.

 

그 사람의 단점만 본다면 모두 떠나고 말 것이다. 그 사람에게는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있다. 장점이 있기에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의 단점만 보고 떠난다면 이 세상은 홀로 사는 사람들로 넘쳐 날 것이다.

 

누구나 대한민국이 잘 되기를 바란다. 보수진영사람들도 애국자이고 진보진영사람들도 애국자이다. 그런데 이념 갈등이 심하다는 것이다. 단지 내편이 아니라는 이유로 미워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증오하고 혐오한다. 이는 다름 아닌 이념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자유, 평등, 평화, 행복, 참으로 좋은 말이다. 이런 말이 구호가 되면 이데올로기가 된다. 그런데 이데올로기는 폭력적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면 폭력성을 띠는 것이다. 특히 자유와 평등의 관계가 그렇다. 보수와 진보는 말할 것도 없다.

 

불교에서는 중도를 말한다. 이는 양극단을 배격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S56.11)라고 했다. 여기서 두 극단은 쾌락과 고행을 말한다. 이른바 고락중도(苦樂中道)를 말한.

 

부처님은 고락중도를 설했다. 그런데 고락중도는 다름 아닌 팔정도라는 것이다. 팔정도는 바른길이다. 이렇게 본다면 중도는 바른길이 된다.

 

자유와 평등, 보수와 진보는 양립되는 것이다. 이는 양극단이라는 말 과도 같다. 양극단에 치우쳐 있으면 긴장과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런데 모든 전쟁은 증오와 적개심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진영논리에 매몰된 사람들이 있다. 이를 이념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럴 때 중도의 길로 가야한다. 그렇다고 중간길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중도는 다름 아닌 바른길이다.

 

불교에서는 중도를 팔정도라고 한다. 바른길로 가는 것을 팔정도(八正道)의 길이라고 하고, 바르지 않은 길로 가는 것을 팔사도(八邪道)의 길이라고 한다.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으면 팔정도의 길이고, 양극단에 치우치면 팔사도의 길이 된다.

 

팔정도의 길은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이다. 팔정도의 길을 가면 다툼이 있을 수 없다. 긴장과 갈등이 없어서 전쟁도 없다. 팔정도의 길로 주욱가면 무엇이 나올까?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커다란 넓은 물이라는 것은 네 가지의 거센 물결 즉 감각적 쾌락에 대한 거센 흐름, 존재의 거센 흐름, 견해의 거센 흐름, 무명의 거센 흐름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두렵고 위험한 이 언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개체를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안온하고 평온한 저 언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열반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뗏목이라는 것은 바로 여덟 가지의 고귀한 길이다. 그것은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수행승들이여, 두 손과 두 발로 노력한다는 것은 바로 정진과 노력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건너서 피안으로 가서 땅위에 서 있는 거룩한 님’이라는 것은 아라한을 말한다.(S35.238)

 

 

이 언덕과 저 언덕 사이에는 강이 있다. 그런데 건너기 힘든 강이다. 거센 물살로 인하여 떠 내려 가고 말 것이다. 저 언덕으로 건너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팔정도라는 뗏목을 타고 건너 가야 한다. 팔정도를 닦은 만이 저 언덕, 열반의 언덕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최진석 선생 팬이다. 최진석 선생의 유튜브 강연을 듣고 팬이 되었다. 도올 김용옥만 있는 줄 알았는데 최진석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 최진석 선생이 유튜브 채널에서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밝히자 이에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최진석 선생은 어느 한편을 들어서 말한 것이 아니다. 이는 끝까지 들어 보면 알 수 있다. 또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최진석 선생이 정치적 발언을 한 것은 건너기로 본다. 이는 어느 진영에 치우친 것도 아니고 어느 진영에 유리한 것도 아니다. 좀더 사유해 보자는 것이다. 좀더 넓게, 높게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올 봄에 나온 책 최진석의 대한민국읽기도 책의 띠를 보니 이제는 건너가자라는 구호가 적혀 있다.

 

 

최진석 선생의 강연을 듣다 보면 건너기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바리밀과 같은 말이다. 산스크리트어로는 빠라미타(paramita)이고, 빠알리어로는 빠라미(paramī)라고 한다. KPTS(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초월의 길로 번역했다.

 

최진석 선생이 말하는 건너기는 불교로 말하면 바라밀이다. 이는 다름 아닌 초월의 길이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 가는 것이다. 그런데 저 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탈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팔정도라는 뗏목이다.

 

팔정도는 중도이고, 중도는 바른길이라고 했다. 양극단을 떠나 중도의 길로 가면 바른 길로 가는 것이다. 이렇게 바른길, 팔정도의 길로 갔을 때 마침내 저 언덕에 우뚝 서 있는 자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건너서 피안으로 가서 땅위에 서 있는 거룩한 님’이라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아라한을 말한다.

 

최진석 선생은 이제는 건너가자고 했다. 더 이상 여기서 머물지 말고 저기로 건너가자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유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두께를 키워야 할 것이다. 마치 곤()이 붕()이 되는 것처럼 자신의 함량을 키워야 함을 말한다.

 

멀리 나는 새는 높이 난다. 높이 나는 새는 모든 것을 다 내려다본다. 대붕이 되었을 때 모든 것이 아래로 보일 것이다. 저 언덕으로 건너 간 자와 같다. 그래서 최진적 선생은 최근에 발간된 책 최진석의 대한민국읽기머리말에서 인간은 건너가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제 건너가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저 언덕에 도달한 사람들,

사람들 가운데 매우 적으니

다른 많은 사람들은

이 언덕에서 매우 분주하네.

 

진실로 바르게 설해진 가르침을

원리에 맞게 따른다면,

저 언덕에 도달하리.

뛰어넘기 힘든 죽움의 왕국을 건너.(S45.34)

 

 

2021-04-2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