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기

그들이 그토록 지켜 내고자 했던 것은? 광주 아리랑 5.25-5.26

담마다사 이병욱 2021. 3. 30. 23:09

그들이 그토록 지켜 내고자 했던 것은? 광주 아리랑 5.25-5.26

 

 

무려 41년전의 일이다.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직접 현장에 있지도 않았음에도 가슴이 절절하고 우울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생명이라고 밖에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 광주 아리랑을 읽고 있다. 이제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것 같다. 525일과 526일 것을 읽었다. 이틀 동안 벌어진 일들이 하루가 일년처럼 길게 느껴지는 것 같다. 마치 현장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져서 감정이입이 되는 것 같다.

 

총을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525일 독침사건이 있었다. 이번에 제대로 실상을 알게 되었다. 자작극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방송에서 보도된 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보도했을 때 나중에 진실이 밝혀진다고 해도 잘못된 정보가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독침사건도 그런 것 중의 하나라고 본다.

 

공수부대가 물러가고 도청과 광주는 시민군이 장악했다. 그러나 하루하루 날짜가 지나갈수록 파국을 향해 가는 것 같다. 계엄군이 언제 재진입해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언제까지나 불안정한 평화가 계속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태가 엄청나게 벌어졌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불과 1주일 전 까지만 해도 시민들이 총을 드는 것을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이는 시민군 상황실장 박남선의 도청앞 궐기대회 연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 없어서 너도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광주아리랑 2, 228)

 

 

일이 이렇게 크게 벌어진 것은 공수들의 만행 때문이었다. 젊은 사람을 닥치는 대로 때려 죽이고 말리는 사람도 때리는 폭력을 보았을 때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더 이상 당하지 않기 위해서 자위차원에서 무장을 한 것이다.

 

밑바닥 인생 시민군

 

시민들은 총을 들었다. 그렇다고 일반시민이 든 것은 아니다. 어느 시대에서나 혼란기에 앞장서는 사람이 있다. 젊은 사람들이다. 그것도 목숨을 걸고 앞장서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많다. 광주에서도 그랬다. 이는 시민군의 직업을 보면 알 수 있다.

 

광주에 수많은 시민군이 있었다. 어느 시민군 독립부대에 대한 설명을 보면시민군 소대장은 예비군 출신이었고 시민군 대부분 10대 후반의 넝마주이나 구두닦이 청쳔, 고아들이었다.”(209)라고 되어 있다.

 

시민군들은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평소 소외 받고 살던 시민군은 우리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습니다요. 무기반납은 절대로 못헙니다요.”(210)라고 했다.

 

 

시민군 중에는 밑바닥 인생이 많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들을 무시하기도 했다. 지식인이나 대학생 등 일반시민이 총을 든 경우는 많지 않았다. 총을 든 것은 밑바닥 인생들이 많았다.

 

밑바닥 인생들도 광주 시민이었다. 대학생이나 지식인, 일반시민들은 총을 들지 않았지만 밑바닥 인생은 총을 들었다. 그리고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그래서 고뇌하는 지식인 박효선은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그들이 우리보다 더 용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배웠다는 우리가 그들보다 정의감이 더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까?”(235)라며 밑바닥 시민군을 대변했다.

 

지식인들은 머리로는 싸우지만 몸으로는 싸우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몸으로 싸우는 밑바닥 인생이 많이 죽었다. 그러나 지식인은 지식인 나름대로 역할이 있을 것이다. 후대 이런 사실을 알려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도청에 죽으러 들어가지 않았다. 일부 극소수 지식인만 밑바닥 시민군들과 함께 죽으러 들어갔다.

 

강온파간의 갈등으로 인하여

 

시민군에게 믿을 것은 무기밖에 없다. 그런데 수습위원들은 무기를 회수하고자 했다. 계엄군과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시민군을 비롯한 강경파들은 광주시민의 피의 대가를 받기 전에는 무기를 내놓을 수 읎소.”(209)라고 말했다. 이는 강온파간의 갈등에 따른 것이다.

 

어느 시대에서는 위기가 닥치면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하게 되어 있다. 둘 다 명분이 있다. 광주에서도 그랬다. 온건파는 무기를 회수하여 협상할 때 최대한 이득을 내자는 것이었다. 반면 강경파는 무기를 가지고 있어야만 협상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강경파가 우세했다. 마지막 계엄군 도청 진입을 앞두고 온건파는 자취를 감추었다.

 

강경파들은 왜 도청을 사수하고자 했을까? 계엄군과 전력면에서 비교 대상이 되지 않음에도 왜 지키고자 했을까? 이는 안종필이 누나와 대화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안종필은 누나, 광주 사람들이 왜 이렇게 죽은지 알아?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 죽은 것이여. 긍께 헛된 죽음이 아니여. 오히려 지금 포기허믄 헛된 죽음이 돼버릴 수 있어.”(171)라고 말했다.

 

시민군은 뻔히 죽을 줄 알면서도 도청에 남았다. 죽음이 두려운 사람들은 가도 좋다고 했다. 그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왜 도청에 남았을까?

 

재작년 오월 유튜브에서 한홍구 교수의 한국현대사 강의를 들었다. 한홍구 교수는 ‘1980 광주, 5·18 다시 생각한다’라는 제목으로 2시간 40분 강의 했다. 이 강의를 듣고 장엄한 패배 거룩한 부활’(2019-05-29)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서 블로그에 올려 놓았다.

 

한홍구 교수는 805월 광주항쟁에 대하여 알고자 한다면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 라며 솔직하게 답해 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 왜 그들은 도청에 남았을까?”라는 말에 알아야 할 것이 다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왜 도청에 남았을까? 마지막날 도청에 남는다는 것으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살고자 할 사람은 떠나야 할 것이다. 대부분 도청을 떠났다. 남은 사람들은 고작 200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

 

도청에서 저항하지 않았다면 한국 현대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한홍구 선생은 매우 설득력 있는 말을 했다. 그것은 “빼앗길 망정 내 주지 말라.”라는 말을 했다. 왜 그런가? 빼앗기면 되찾을 수 있지만 내주면 되찾을 수 없음을 말한다.

 

온건파들은 계엄군이 진입한다는 소식에 인명 피해를 우렸다. 무장을 하고 있으면 피해자가 속출할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 도청을 비워주자는 식으로 말했다. 그러나 강경파는 이제까지 흘린 피를 생각하면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다.

 

온건파는 현실적 선택을 하고자 했다. 더 이상 피해를 줄여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래서 도청을 비워주고자 했다. 그런데 한홍구 선생 말에 따르면 내주면 되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스스로 백기 투항했을 때 나중에 다시 찾을 명분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키다가 빼앗겼을 때 되찾아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빼앗기면 되찾을 수 있지만, 내주면 되찾을 수 없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들이 그토록 지켜 내고자 했던 것은

 

그들은 무엇을 지키려 했을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죽고자 하는 사람들만 남았을 때 그들은 무엇을 지키고자 했을까? 마치 수성하듯이 도청건물 하나 지켜내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겨우 200명가량 되는 시민군이 카빈소총과 M1소총으로 지킬 수 있을까?

 

막강한 화력과 전투력을 가진 공수부대를 당해 낼 수 없다. 결사항전 한다고 하지만 전투를 시작하자 마자 모두 몰살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렇게 지켜 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한홍구 교수는 “그것은 싸운 것에 대한 의미를 지키려 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들은 싸운 것에 대한 의미를 지켜내고자 한 것이다. 단지 도청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지키고자 죽음을 각오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소설에서 윤상원이 그런데 왜 무장해제를 한단 말입니까? 죽어간 영령들의 피를 팔아서는 안됩니다.”(191)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도청을 순순히 내 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신수동 시민군이 신부에게 선후배덜이 죽었는디 우리만 살아서 뭣 허겄습니까?”(208)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다 떠나고 죽기를 각오한 사람들만 남았다.

 

광주항쟁 최고 가치는

 

소설에 김종배가 등장한다. 강경파로서 끝까지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막바지에 학생투쟁위원장을 맡았다. 김종배 위원장은 20195월 김동수열사 추모제에 참석하여 증언했다. 이를 잘 듣고 기억해 두었다가 블로그에 기록해 놓았다.

 

김종배 위원장은 몸집이 크다. 재작년 김동수열사 추모제에서 봤었다. 소설에서도 덩치가 큰 사람으로 나온다. 그는 그때 당시 조선대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강경파 중의 한사람으로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어쨋든 살아 있기 때문에 증언한 것이다.

 

김종배 위원장 역시 도청에 남은 이유에 대하여 소설에 써 있는 내용대로 이야기했다. 이는 지금까지 희생당한 광주시민의 목숨을 어떻게 보상받느냐? 평화적인 수습방안이 없다면 불명예스럽게 항복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도청을 나가겠다는 사람들을 붙잡지는 않겠다. 자유롭게 선택하라.”(261)라는 말로 있다.

 

시민군이 막강한 공수부대를 이길 수 없다. 해보나 마나 지는 게임이다. 모두 몰살로 끝날 것이다. 그럼에도 도청을 지켜 내고자 했다. 그러나 도청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지켜 내고자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지켜 내고자 했던 것이 있었다. 먼저 죽은 자들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 없었던 것이 큰 이유일 것이다.

 

그들이 지켜 내려고 한 것이 있다. 그것은 “싸운 것에 대한 의미를 지키려 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도청을 순순히 내 주어서는 안된다. 빼앗길 망정 내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빼앗겨야 나중에 되찾아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김종배 선생은 2019년 김동수 열사 추모식에서 “그 죽음이야말로 광주항쟁의 최고 가치입니다.”라고 말했다.

 

 

2021-03-3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