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기

부서져 가는 몸을 바라보면서

담마다사 이병욱 2021. 3. 24. 06:51

부서져 가는 몸을 바라보면서

 

 

양쪽으로 씹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왼쪽과 오른쪽 이빨로 씹는 행복을 누리고 있다. 치과에서 이빨 하나를 씌우고 난 다음 먹었더니 씹는 맛이 난다.

병원에 가지 않는다. 다만 치과는 예외이다. 이가 아프거나 불편하면 즉시 치과로 달려간다. 예전에는 참았으나 그런 어리석은 행위는 더이상 하지 않는다.

 

한쪽이 아파서 다른 한쪽만 계속 사용하던 적이 있었다. 피로가 누적됐을 뿐만 아니라 맛도 느낄 수 없었다. 병원 가는 것만큼이나 치과 가는 것도 싫어 하던 때가 있었다. 참을 게 따로 있지 치통을 참으려 하다니!

치과에 가면 즉각적인 효과를 본다. 대게 씌우는 것으로 결말 난다. 이빨이 썩어서 신경치료를 하고 씌운다. 그 과정에서 마취가 있다. 서너 번 다녀와야 한다. 이런 과정이 번거롭긴 하지만 그래도 씌어 놓으면 오래간다. 새 이를 얻은 것 같다. 때로 자동차 부품을 교환하는 것 같기도 하다. 다행인 것은 아직 임플란트는 없다는 것이다.

 


사무실 대로 건너편 치과에 다니고 있다. 12년 단골이다. 그동안 씌운 것이 다섯 개 된다. 이번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니 또 썩었다고 한다. 나름대로 관리를 잘 해 왔다고 생각해 왔으나 이런 말을 들으면 서글퍼진다. 몸이 부서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하나 썩어서 씌운 이빨이 한두개가 아니다. 이제 아래 이 대부분을 씌웠다. 앞에 몇개 밖에 남지 않았다. 요즘은 일이 년이 멀다 하고 씌우는 것 같다.

병원에 대한 막연한 불신이 있다. 왜 병원을 싫어 하는 것일까? 어쩌면 잘못된 정보를 접해서 그런 것인지 모른다. 이른바 의료사고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검진을 받지 않는다. 꽤 오래 되었다. 직장에 다닐 때는 의무적이었지만 개인사업자로 살면서 의무에 얽매이지 않는다.

끊임없이 건강검진 받으라는 메세지를 받는다. 받지 않아 일이 생겼을 때 불이익에 대한 것도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병원의 이익과 관련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병원도 이익을 내야 하는 사업체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병에 걸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어느 때 공짜로 검진을 했는데 암이더라는 것이다. 의사의 말만 믿고 수술했는데 어찌 된 일지 더 악화되어 죽었다는 것이다. 차라리 공짜검진표가 없었다면 더 오래 살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의료사고와 관련하여 최근 읽고 있는 책이 있다. 고미숙 작가의 동의보감이 그것이다. 책은 현대의학에 대해 비판적이다. 이윤만을 추구하는 기업형 의학에 대한 것이다.

 

현대의학은 각종 첨단 기계에 크게 의존한다. 그런데 책을 보면정보의 양이 많아질수록 의술의 수준은 떨어진다.”라고 했다. 옛날에는 맥을 보아 병을 알 수 있었고 심지어 얼굴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요즘은 각종 데이터를 이용하여 판단하지만 옛날만 못하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설득할 때 자료를 제시하면 효과적이다. 전자제품을 개발할 때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엔지니어는 데이터 가지고 말해야지 입으로 말해서는 안된다.”라는 말이다. 이는 마우스엔지니어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입으로만 개발하지 말라는 뜻이다. 의료계에서도 데이터를 중시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데이터는 완전한 것일까? 이에 대하여 책에서는 어느 의사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진단검사는 항상 그 자체로 엄청난 오진의 가능성까지 가지고 있으며, 반복하여 조직을 떼어 내거나 반복하여 방사선 촬영을 해서도 안됩니다….그러나 진단장비가 정밀해질수록 몸속 어딘가에는 반드시 이상한 조직이 있기 마련이며, 현대의학이 발달할수록 예방적인 제거수술은 급격히 증가할 것입니다.”(을지의대 임종호교수, 동의보감 305)

 

 

병은 예방하는 것이 최고라고 한다. 병이 나면 이미 늦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건강검진을 받아서 미리미리 예방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검진을 받아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것이 발견된다면 조기에 수술하자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다.

 

장비가 발달하면 할수록 이상한 조직을 발견해 내기 쉽다. 그런데 조기 예방 차원에서 시술에 들어 간다면 오진으로 인하여 잘못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방적 차원에서 제거수술을 했다고 하더라도 완치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하여 임종호 교수는 또한 진단검사에 상응되는 방사선 조사, 침습적 제거수르 뒷처리 방사선 조사 등등, 이 그 자체로 발암원인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305)라고 했다.

 

의사들은 조기검진만이 살길이다.”라고 말한다. 병은 미리미리 예방해야 하는 것이지 병이 나면 이미 늦음을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오진율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종종 의료사고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뉴스에 보도되기도 한다. 아마 보도되지 않은 것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고미숙 작가의 동의보감은 현대 의료시스템에 대해 부정적이다. 이는 이 장비의 천문학적 비용을 감당하려면 검진과 수술을 일상화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306)라고 했다. 마치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병원에서 환자의 몸을 보는 것에 대하여 자본의 논리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탈탈 털면 나오게 되어 있다. 아무리 깨끗한 사람도 탈탈 털면 어느 것 하나라도 걸릴 것이다. 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첨단 장비를 이용하여 몸의 구석구석을 세밀하게 촘촘하게 검사하면 걸리게 되어 있다. 이를 예방적 차원에서 시술했을 때 잘 되면 다행이지만 잘못될 수도 있다. 긁어 부스럼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검사과정에서 잘못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병원가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전국민 의료보험시대이다. 사람들은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 있으면 병원에 가서 검진받는다. 각종 첨단 장비를 이용하여 검진을 받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다. 검진결과 이상 없으면 안도한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것이 있으면 예방적 치원에서 수술할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시기에 병원에 가지 않는다고 한다.

 

약국을 운영하는 법우가 있다. 약사에 따르면 요즘 병원이 잘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2백만원도 가져 가지 못하는 의사도 있다고 말한다. 병원 운영이 잘 되지 않아 문을 받는 병원도 있다고 말한다.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코로나 이전과는 다른 양상인 것만은 틀림없다.

 

병원에 가 본지 오래 되었다. 요즘은 감기도 걸리지 않는다. 코로나 이전에는 일년에 한두 번 감기 때문에 내과병원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마다 병원 대기실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번호표를 뽑아 들고 순번을 기다렸다. 대부분 나이든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이 이제 병원을 즐겨 찾지 않는 것 같다.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한다. 누군가 아프면 병원에 가보라고 말한다. 병원에 가면 다 해결하는 듯이 말한다. 이는 병원과 의사를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 의사도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다. 각종 첨단기계에서 추출된 데이터를 제시하며 수술하자고 했을 때 이를 거절할 사람이 있을까?

 

자신은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자신에 남아 있는 번뇌는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하기 위한 수행을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병도 자신이 잘 알고 있다. 몸에 이상이 오면 스스로 치유하는 방법도 알고 있다.

 

동물도 병에 걸린다. 동물이 병에 걸리면 일단 먹지 않는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 웅크리고 몇 날을 보낸다고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조용한 곳에서 음식을 조절하며 보냈을 때 자연적으로 치유될 것이다. 인디언들은 병이 났을 때 땅구덩이속에서 보낸다고 한다. 이렇게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몸에 조금만 있어도 병원으로 달려 간다.

 

 

코로나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지난 1년 동안 병원에 가지 않았다. 그 흔한 감기한번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치과병원만큼은 예외이다. 이빨 통증은 참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치과에 가면 즉각적 효과를 본다는 것이다. 썩은 부위를 신경치료 하고 씌우면 양쪽으로 씹는 행복을 맛본다. 그런 한편으로 서글퍼진다. 몸이 점점 부서져 가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제자 박깔리가 있었다. 박깔리는 중병에 걸렸다. 그럼에도 부처님을 친견하기를 원했다. 박깔리는 부처님의 3280종호에 반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설법을 하면 설법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아름다운 용모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박깔리에 대해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박깔리여, 그만두어라.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하느냐? 박깔리여,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박깔리여, 참으로 진리를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진리를 본다.”(S22.87)

 

 

몸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부서져 가고 있다. 몸이 부서져 가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빨이 썩어서 씌웠을 때 비애를 느끼지만 이는 과정에 지나지 않다. 언젠가는 다 갈아야 될지 모른다. 더 이상 이빨이 이빨로서 기능을 못할 때 삶도 끝날 것이다. 이럴 때 무엇에 의지해야 할까?

 

부처님은 박깔리에게 부서져 가는 몸을 보지 말라고 했다. 가르침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몸은 부서져 가는 것으로 한계가 있지만 가르침은 부서지지 않는다. 그래서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라고 했다. 부서져 가는 몸을 바라보면서 믿을 것은 부처님의 담마밖에 없다.

 

 

2021-03-2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