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기

80년 광주는 대동세상(大同世上)이었다, 광주 아리랑 2권 5.21-5.23

담마다사 이병욱 2021. 3. 21. 10:58

80년 광주는 대동세상(大同世上)이었다, 광주 아리랑 2권 5.21-5.23

 

 

5.18의 주체는 누구였을까? 요즘 소설 광주 아리랑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소설읽기가 중반을 넘어선 시점에서 불현듯 이런 생각이 떠 올랐다. “5.18광주민중항쟁의 주체는 시민군이었다!”라고.

 

 

시민군이 왜 주체인가?

 

시민군을 왜 5.18의 주체로 보는가? 이는 5.18광주묘역을 가보면 알 수 있다. 거기에 수많은 비석에 새겨진 이름을 보면 시민군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결정적 증거는 묘역 앞에 있는 동상이다. 트럭을 탄 시민군이 총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 5.18의 주체는 시민군임에 틀림없다.

 

시민군은 소설속에서도 주체이다. 광주 아리랑 521일부터 23일까지 읽어 보니 5.18의 주체는 시민군인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그때 당시 참여한 모든 시민들이 주체라고 볼 수 있다.

 

총은 들지 않았지만 시위에 참여하 시민들도 5.18의 주체이다. 시민군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한 사람들도 주체이다. 부상당한 사람들에게 헌혈한 사람들도 주체이다. 심정적으로 동조한 사람도 주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항쟁의 선봉에 섰던 사람들이 시민군이기 때문에 5.18 민중항쟁의 주체를 시민군으로 보고자 하는 것이다.

 

만일 그때 내가 거기에 있었더라면

 

5.18 민중항쟁의 주체가 시민군이라면 소설 속에서 주인공도 시민군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소설 속에서는 주인공이 따로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영화와는 다른 것이다. 광주를 소재로 한 영화를 보면 반드시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소설 광주 아리랑에서는 뚜렷한 주인공이 없다.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에 대하여 아마도 증언을 바탕으로 소설을 구성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만일 그때 내가 거기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해 보았다. 총을 들고 시민군이 되었을까? 소설에 등장하는 동국대생 1학년이었던 박병규처럼 시민군이 되어서 총을 들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총을 들지 못했을 것 같다. 그 대신 부상당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역할 정도는 했었을 것 같다.

 

소설에서는 김동수도 등장한다. 그때 당시 김동수는 조선대 전자공학과 3학년 학생이었다. 조선대불교학생회 회장이었고 동시에 대불련 전남지부장이었다. 그런데 김동수 친구를 만났다는 것이다. 2006년 일 때문에 만난 것이다. 한학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친구처럼 지내고 있는 K를 말한다.

 

 

K는 안양에 살고 있어서 종종 만나서 저녁식사를 했다. 그때 들은 이야기가 있다. 김동수에 대한 이야기이다. 같은 학과 친구였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고 볼 수 있다. K는 그때 당시 구호대로 활약했다고 한다. 부상당한 사람들을 돌보아 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K는 구호대로 활동하면서 총상입은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고 한다. 총을 맞으면 맥이 탁 풀리듯이 스러진다고 했다.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맞서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K와 그의 친구들은 해마다 오월이 오면 김동수를 추모했다고 한다. 친구 서너명이 술집에 모여서 술을 마시는 것이 추모하는 것이라고 했다. 어떻게 추모하는 것일까? 그들은 첫 잔을 반드시 턴다고 했다. 첫 잔 가득 부은 술잔을 들고서동수야, 미안하다.”라며 바닥에 뿌리는 것을 말한다. 이후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마신다고 했다.

 

내가 만약 그때 광주에 있었다면 K와 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K도 증언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그는 김동수가 시위 도중에 총에 맞아 죽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때 당시에는 김동수가 누구인지도 몰랐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불교계에서는 열사를 넘어서 보살로서 인식되고 있었다.

 

K는 김동수가 저격수에 의해서 죽었다고 했다. 그의 시신이 상무관에 있었는데 하얀 소복을 늙은 여인이 구슬프게 울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그의 기억의 착각이었다. 김동수는 마지막날 도청을 사수하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알려 주었더니 자신의 기억이 잘못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누가 시민군이 되었을까?

 

누가 시민군이 되었을까? 이는 소설 속에서 그래도 도청 안팍에서 몸 사리지 않고 활발하게 움직이는 시민군들은 김원갑처럼 재수생이거나 고등학생, 식당종업원, 영업사원, 공장노동자, 넝마주이, 구두닦이 등이었다.”(광주 아리랑 2, 129)라고 표현된 것에서 알 수 있다.

 

시민군들은 이 땅에서 지위가 낮은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대학생이나 지식인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총을 든 사람들 대부분 재수생, 고등학생, 노동자. 구두닦이, 심지어 넝마주이까지 이 땅에서 소외받고 사는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난리가 났을 때 대학생들은 대학생의 역할이 있을 것이고 지식인은 지식인의 역할이 있을 것이다. 총을 들고 싸우는 것도 좋지만 이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후세에 알리는 역할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할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소수의 지식인들은 나름대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럼에도 대학생과 지식인들은 광주항쟁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이는 소설에서 실제로 총을 들고 싸운 사람들은 서민과 빈민층의 청년 및 보통 항생들이었던 것이다.” (광주 아리랑 2, 71)라고 했기 때문이다.

 

권력에 미친 자들에 의해서

 

어느 시대에서는 항상 희생당하는 사람은 힘없고 못 배운 사람들이었다. 역사적으로 민란이 일어났을 때도 죽은 자들은 가장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었다. 근세 동학농민운동도 이에 해당된다. 일본군의 기관총에 의해 추풍낙엽처럼 스러져간 생명들은 무명의 농민들이었다.

 

전쟁이 나면 젊은 사람들이 많이 죽는다. 전사로 징집되어서 마치 소모품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이에 전쟁광들은 증오와 적개심을 끊임없이 불어넣는다. 역사적으로 영웅호걸이라는 사람들은 전사들을 사지로 몰아넣어 영웅호걸이 되었다. 19805월 광주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광주에서는 시민들만 죽은 것이 아니다. 공수부대원들도 죽었다. 대부분 스무살 안팍의 젊은 사람들이다. 나이 든 사람들이 총을 들고 싸워 죽었다는 이야기는 보지 못했다.

 

난세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 희생된다. 공수부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왜 죽었을까?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숨듯이 살아 가는 것일까? 이는 권력욕에 가득 찬 자들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권력에 눈이 먼 권력광 들의 야욕에 놀아나서 희생당한 것이다.

 

진각스님의 최후

 

난세에 영웅난다는 말이 있다. 광주에서 10일간도 난세였다. 이때 수많은 영웅들이 탄생했다. 그것은 시민군이라는 영웅이다. 그런데 대부분 스무살 안팍이라는 사실이다. 죽어서는 묘비에 이름을 남기고 살아서는 증언자로 이름을 남겼다. 이렇게 소설 속에서 부활하여 이름을 남기기도 한다. 그 중의 하나가 진각스님이다.

 

소설 속의 진각스님이 있다. 소설은 증언자를 바탕으로 하여 쓴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진각스님의 최후는 어떠했을까?

 

진각스님은 구호대로 활약했다. 스님이 총을 들고 싸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명색이 중인디 어처께 사람을 죽이겄소.”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진각스님은 승복을 벗고 병원에서 준 가운을 입었다. 적십자 완장을 차고서 부상자들을 실어 날랐다. 진각스님은 시청 앞에 쓰러져 있는 부상자들을 구하고자 차를 몰고 접근했다. 그러나 총탄세례를 받았다. 적십자 마크를 한 차량에 공수부대 저격병들이 사격을 한 것이다. 그때 진각스님은 총에 맞았다.

 

진각스님은 자신만의 의미 있는 최후를 맞이하고 싶었다. 이는 절 옆 토굴에서 연탄을 피워놓고 죽고 잪소. 나 죽으믄 독경이나 해주씨요. 인간 몸으로 태어나 부처님 제자로서 멋지게 수행을 한번 해야 겄소.” (광주 아리랑 2, 134)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중상을 당한 진각스님은 증심사로 옮겨졌다.

 

성직자도 총을 들어야 할까? 이런 질문은 우문에 불과하다. 성직자는 총을 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칼과 창은 어떠할까? 사명대사의 호국불교 개념이라면 칼과 창을 들어도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는 부처님 가르침에 위배된다. 만일 스님들이 계를 반납하고 총과 칼을 들면 문제는 덜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진각스님의 행위는 정당한 것이었다. 진각스님은 죽어서 영웅이 되었다.

 

시민들이 총을 든 것은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정당화할 수 없다. 설령 그것이 정의라는 이름이라 하여도 폭력은 폭력인 것이다. 그렇다면 광주에서 시민들이 총을 든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광주에서 시민군들이 총을 든 것은 정당방위차원에서였다. 마치 폭도와 같은 공수부대원들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을 때 죽음을 느꼈을 것이다. 살고자 총을 든 것이다. 그래서 먼저 공격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방어차원에서 총을 든 것이다.

 

 

폭력을 먼저 행사한 자들은 공수부대원들이었다. 시민들은 방어차원에서 무장했다. 이렇게 본다면 시민들이 총을 든 것은 폭력적 행위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때 당시 신문과 방송 등 언론에서는 총을 든 시민군을 폭도라고 했다.

 

시민군이 폭도였다면 시민들이 협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민군이 폭도였다면 가게가 털리는 등 도시는 혼란의 도가니가 되었을 것이다. 시민군은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시민들은 시민군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어느 부자집 소녀가 시민군에게 오빠, 광주 사람이 시민군을 돕지 않으면 누가 돕겠습니까?”(광주 아리랑 2, 115)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자유광주인가 해방광주인가?

 

광주는 해방되었다. 권력에 눈먼 미치광이 집단들의 군대를 몰아낸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폭력을 자행한 폭도와도 같고 미친개와도 같은 군대를 시민들이 쓸어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꽃잎처럼 떨어졌다.

 

시민들은 자위적 차원에서 무장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공수부대를 몰아 내었다. 이와 같은 광주에 대하여 박효선은 광주가 자유 세상이 돼부렀그만이라!”(광주 아리랑 2, 152)라고 말했다.

 

이십대 후반의 지식인 박효선은 광주를 자유 세상이라고 했다. 하루 밤 자고 났더니 세상이 바뀐 것이다. 공수부대가 물러난 광주는 자유의 광주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를 해방광주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80년 당시에는 해방이라는 말은 생소했을 것이다. 8.15해방이라는 말은 있었어도 광주를 해방광주라고 쓰는 것은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해방을 뜻하는 해방구라는 말은 80년 광주이후 대학가에서 등장한 말이기 때문이다.

 

80년 이후 학원가에서는 해방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공권력의 범위가 미치지 않는 곳은 해방구라고 불렸다. 이렇게 본다면 805월 계엄군이 물러간 광주는 자유광주라고 할 수도 있지만 오늘날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해방광주가 될 수도 있다.

 

자유광주, 해방광주에서 거리는 어떠했을까? 이는 나명관 형제에 대하여 무작정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만도 뿌듯하고 행복했다.”(광주 아리랑 2, 153)라고 표현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어서 계엄군이 물러간 광주는 자유세상 바로 그것이었다.”라고 한 것에서도 알 스 있다.

 

해방광주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폭도와 같은 공수부대가 물러난 광주는 진공상태나 다름없었다. 일종의 무정부상태와도 같았다. 마치 아나키스트의 도시와도 같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혼란이 극에 달한 도시가 아니었다. 자유를 만끽하는 평온한 도시였던 것이다. 이렇게 된 것에는 시위가 정당했기 때문이다.

 

해방광주의 주인은 시민들이었다. 시민군이 생겨났지만 이는 자발적이었다. 그러나 분위기는 폭풍전야와 같은 같았을 것이다. 언제 다시 밀고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마치 진공상태와 같은 도시에서는 나름대로 질서가 유지되고 있었다. 폭력, 방화, 약탈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민군 나명관은 세상이 바뀐 것을 실감했다. 이는 나명관은 1945815일 해방이 되던 그때도 사람들 마음이 지금의 광주시민과 같았을 것이라고 짐작했다.”(광주 아리랑 2, 154)라고 표현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자유광주 보다는 해방광주가 더 맞을 듯하다.

 

해방이 되었을 때도 권력의 진공상태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35년 후 광주에서도 시민들은 해방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안한 것이다. 언제 어떻게 또다시 밀고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광주, 해방광주에서 10일간은 광주시민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었다. 이는 다름 아닌 대동세상(大同世上)이다.

 

80년 광주는 대동세상(大同世上)이었다

 

작년 5월 김동수열사 추모제에 참석했다. 이에 대하여 김동수열사의 승의적 초월의 ’(2020-05-25)라는 제목으로 기록을 남겼다. 5.18묘역을 참배하고 추모제를 마친 후에 상무대 투어를 했다. 상무대 영창이 있었던 곳이다.

 

상무대 투어 때 해설사는 단체관람객들을 모아 놓고 광주정신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때 들은 인상적인 말이 대동세상이라는 말이다.

 

 

해설사는 5.18민중항쟁 당시 광주에 대하여 왜 대동세상이라고 했을까? 해설사에 따르면 광주항쟁에는 두 가지 키워드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민주(民主)’이고 또 하나는 대동세상(大同世上)’이라고 했다.

 

광주항쟁에 대하여 민주라는 명칭을 붙여 주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대동세상이라는 말은 생소하다. 아직까지 들어 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주항쟁을 제대로 안다면 10일간의 항쟁이 대동세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광주를 왜 대동세상이라고 했을까? 해설사에 따르면 무기를 가지고 있었어도 은행이나 금은방이 털리지 않았고 모든 것을 자율적으로 했기 때문에 극히 안정적이었다고 말했다. 이는 그때 당시 사진과 이후 제작된 판화로도 알 수 있다.

 

 

광주가 대동광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시민군들을 지지했고 시민군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는 월산동 주민들은 나명관 형제가 시민군인 줄 알고 김밥과 요구르트, 우유, 빵 등을 주었다.”(광주 아리랑 2, 156)라고 소설에서 표현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또한 한 할머니가 주먹밥과 찐 계란을 가지고 나와 울면서 나쁜 놈덜이 우리 손자를 죽였다고 허요. 우리 손자 원수를 갚아 주씨요.”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렇게 광주는 5.18당시 이미 대동세상을 구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광주정신은 시대정신

 

사람들은 광주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평소 광주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리 많이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년 대불련의 김동수 열사 추모제에 참여하면서 어느 정도 윤곽을 잡고 있을 뿐이다. 하물며 무관심한 일반인들은 어떠할까?

 

광주에서 10일간의 항쟁기간 중에 광주는 대동세상(大同世上)이었다. 대동세상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는 모든 사람이 함께 어울려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말한다. 폭도와도 같은 공수부대원들이 물러 갔을 때 광주는 자유광주가 되었다. 후대에는 이를 해방광주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해방광주는 대동세상이었다. 정부도 없고 지배자도 없는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었다. 그럼에도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폭풍전야와 같은 상황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민 모두가 한마음이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해방도시에서 총을 들 사람은 총을 들었다. 총을 든 시민군은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사람들은 평소 때와 마찬가지로 생업에 종사했다. 지배와 피지배자가 없는 무정부 상태가 되었지만 질서는 유지되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총을 든 자나 들지 않은 자나 모두가 평등했다. 광주항쟁 기간 동안 광주는 대동세상이었다.

 

오늘날 광주를 민주주의 성지라고 한다. 해마다 5월 그날이 오면 대통령도 참석하여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광주정신은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광주정신은 해설사가 말한대로 민주와 대동세상으로 요약된다. 이런 광주정신이 있었기에 빚진 자들이 19876월항쟁을 이끌어 내었고, 2016년 광화문에서 촛불혁명을 이루어 내었다.

 

광주정신이 살아 있는 한 대한민국은 선진국이다. 미얀마 사람들도 광주를 본받고자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광주는 민주와 대동세상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2021-03-2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