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기

존재의 이유가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산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1. 3. 4. 08:56

존재의 이유가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산다

 

 

작가의 상상력은 어디까지 가능한 것일까?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의 상상력에 놀라게 된다. 섬세한 묘사는 둘째 치고 전체적인 구도를 설정하여 이야기를 이끌고 나가는 능력이 탁월하다. 아마도 오랜 세월동안 갈고 닦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요즘 소설을 읽고 있다. 의무적으로 읽고 있다. 한번에 다 읽지 않는다. 하루밤만에 읽는 일은 없다. 하루에 한단락씩 조금씩 읽고 있다.

 

등장인물이 나오면 밑줄 친다. 이름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명도 기억해야 한다. 상황도 이해해야 한다. 작가와 호흡을 맞추어 가는 것이다. 작가는 이 모든 과정을 글로써 표현한다. 이런 노력을 무시할 수 없다. 빨리 읽고 빨리 잊어버린다면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강명희 작가의 소설 히말라야바위취를 읽고 있다. 여러 편의 단편소설을 모아 놓은 것이다. 그 중에서 순무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이혼한 가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의 말미에 새겨 놓을 만한 문장을 발견했다.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든 세상에 태어난 것들은 살게 마련이다.”라는 말이다. 이 구절을 접하고 잠시 멍했다.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말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든 세상에 태어난 것들은 살게 마련이다. 조건이 맞지 않으면 다른 모습으로 변해서라도 산다. 아들이 죽었어도 살고 딸이 도망갔어도 산다. 있는 재산 다 없애고도 살고 빚을 산더미처럼 짊어지고도 산다. 존재의 이유가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산다. 순결해도 살고 그렇지 않아도 산다. 물결의 흐름을 따라서도 살고 거슬러도 산다. 사랑해도 살고 미워해도 산다.”(히말라야바위취, 93)

 

 

작가는 이 말을 하기 위하여 소설을 쓴 것이 아닐까?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쓴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상력은 어디서 나왔을까?

 

현재 읽고 있는 소설의 작가를 보면 나이가 지긋하다. 이순이 넘은 작가들이 많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생에 있어서 산전수전을 다겪었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고 다 경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감옥에 대한 이야기가 좋은 예이다.

 

감옥을 한번도 가보지 않았다. 경찰서 유치장에도 간적이 없다. 그래서 감옥에 대하여 잘 모른다. 그러나 감옥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책을 통해서 알고 있고 영화로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감옥에 대하여 쓰고자 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감옥에 대한 세밀한 묘사를 하기 위하여 꼭 감옥에 다녀와야만 하는 것일까? 일부러 죄를 지어 감옥에 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 글을 쓰기 위해 악행을 할 수는 없다. 이런 경우 작가는 상상력을 발휘할 것이다. 감옥에 다녀온 사람에게 듣는다면 간접경험이 된다. 직접 경험하지 않았어도 공감한다면 감옥에 다녀온 것이나 다름없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스님은 시어머니와의 갈등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다. 결혼도 해 보지 않은 스님이, 그것도 며느리의 입장에서 해법을 제시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들어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신도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공감했을 때 꿰뚫게 된다. 직접 경험을 하지 않았아도 해법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남자의 입장에서 소설을 썼다. 이순이 넘은 여성작가가 이혼한 중년남자가 되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간접경험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본다. 비슷한 사례를 들어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옮긴 것일 수 있다. 작가의 상상력은 자신의 경험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내가 소설을 쓴다면 자전적 소설이 되기 쉬울 것 같다. 더 나아가 가족이야기, 친족이야기, 친구이야기를 쓰게 될 것 같다. 더 멀리 나아간다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자료를 보고서도 소설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작가의 상상력에 따른다.

 

누구나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이 세상 사람 수만큼이나 소설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다 쓸 수는 없을 것이다. 평범한 인생을 소설로 쓴다면 그다지 재미가 없을 것이다. 책도 팔리지도 않을 것이다. 가슴을 울리는 소설을 써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굴곡진 인생을 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야 한다. 짧고 굵게 살다 간 사람도 좋은 소재가 될 것이다.

 

작가는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든 세상에 태어난 것들은 살게 마련이다.”라고 했다. 이 말을 접하자 만든 물건은 팔리게끔 되어 있다.”라는 말이 생각났다.

 

시장에 가면 수많은 물건이 있다. 물건중에는 상품도 있고 중품도 있고 하품도 있다. 백화점에서 팔리는 물건도 있고 편의점에서 팔리는 물건도 있고 재래시장에서 팔리는 물건도 있다. 어떤 물건이든지 일단 만들어 놓으면 어디에서든지 팔린다.

 

여기 의류가 있다. 어떤 디자이너가 나름대로 고심해서 옷을 만들었다. 그러나 팔리지 않는다. 백화점에서 팔리지 않으면 재래시장으로 갈 것이다. 그곳에서도 팔리지 않으면 아울렛에서 방출될 것이다. 그것도 안되면 땡처리 될 것이다. 그것도 안되면 저울로 무게를 달아 가난한 나라로 수출될 것이다. 물건은 일단 만들어 놓으면 팔리게끔 되어 있다

 

이 세상에는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만 사는 세상이 아니다. 못난 사람도 살아 가는 세상이다. 일단 세상에 태어났으면 살아 갈 수밖에 없다. 잘난 자나 못난 자나 밥 세끼 먹고 사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행복하고 부유한 사람들만 사는 세상이 아니다.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들도 살아가는 세상이다. 똑같이 밥 세끼 먹고 살아 간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살아 갈수밖에 없다. 잘살아도 살고 못살아도 산다. 행복해도 살고 불행해도 산다. 누구나 죽기 전까지는 밥 세끼 먹고 산다. 태어났으니까 사는 것이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살 수 없다. 언젠가는 그만 두어야 한다.

 

죽음이 오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행복한 자나 불행한 자나 죽음 앞에서는 평등하다. 그렇다면 죽는다고 다 끝나는 것일까?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내생이 전개된다. 자신의 지은 업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나는 것으로 본다.

 

오늘도 나는 밥을 먹어야 한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먹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존재의 이유가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산다.

 

 

2021-03-0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