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기

광주는 함평사건의 데자뷰, 광주 아리랑 5.24

담마다사 이병욱 2021. 3. 27. 13:04

광주는 함평사건의 데자뷰, 광주 아리랑 5.24

 

 

어쩌면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을까? 어제 유튜브로 함평학살사건을 보면서 광주학살을 떠 올렸다. 30년 간격을 두고 벌어진 역사적 사건이다. 두 사건은 시간과 공간만을 달리 했을 뿐 학살이라는 점에서는 똑 같다.

 

함평 민간인 학살사건

 

요즘 유튜브시대이다. 유튜브서핑하다가 함평학살 사건을 보게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11사단에 의한 양민학살사건을 말한다. KTV에서 올린 것으로 언젠가 공중파방송에서 방송했던 것이다. 제목은 [진실과화해] 제6회 50 일간의 죽음의 공포‘함평 11사단 사건’ Full ver’(2020-09-28)이다.

 

한국전쟁 당시 전국에서 수많은 학살사건이 있었다. 놀랍게도 상당수가 국군에 의한 학살이었다는 사실이다. 빨치산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함평도 예외는 아니었다.

 

함평에 불갑산이 있다. 함평과 영광에 걸쳐 있는 산이다. 산은 높지 않지만 평지 돌출형 산이라서 산도 높고 골도 깊다. 북한 추종세력들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불갑산에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남한에서는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하여 국군 11사단을 창설했다. 그 중에 2대대 5중대가 함평학살사건 주역이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놀랍게도 지휘관의 사적 복수심때문에 아무런 죄 없는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다는 것이다.

 

발단은 이렇다. 5중대 병력이 함평 해보에서 장성방향으로 이동중에 있었다. 그때 매복해 있던 빨치산 병력과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국군 두 명이 사망했다. 다음날 중대장은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서 현장에 왔는데 죽창 등으로 처참하게 살해된 모습을 보았다. 이에 중대장은 보복을 결심하게 된다.

 

 

중대장의 보복은 엉뚱하게 민간인 학살로 나타났다. 주변 마을 사람들을 죽여 버린 것이다. 청년과 장년 등 젊은 사람들은 모조리 죽여 버린 것이다.

 

50일 동안 모두 249명이 학살되었고 1,500여채 가옥이 소실되었다. 이는 11사단의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에 따른 것이다. 이는 부득이하게 적에게 내놓을 지역은 모든 것을 깨끗하게 없애 적이 이용하지 못하게 한다.”라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

 

양민학살의 주역 국군11사단은 지금도 있을까?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다. 놀랍게도 지금까지 남아 있다. 창설일은 1950827일이다. 2000년대 들어와서 명칭은 바뀌었지만 11이라는 숫자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1사단은 거창양민학살 사건과도 관련이 있다.

 

공수들은 어떤 짓을 했나?

 

함평학살 사건으로부터 30년이 흘렀다. 19805월 광주에서도 학살이 있었다. 그것도 국군에 의한 학살이다. 소설 광주 아리랑’ 5.24 편을 보면 송암동 주민학살이야기가 실려 있다.

 

광주 도심에서 퇴각한 공수부대는 이동중이었다. 광주에서 마치 미친개처럼, 폭도처럼 무자비하게 때려 죽이고 쏘아 죽인 공수들이다. 그들은 광주 재탈환을 위해 이동중이었다. 그런데 이동 중에 민간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였다는 사실이다. 송암동 주민 학살이 대표적이다. 소설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저수지 물은 멱을 감기에 아직 차가웠다. 그러나 전남중 1학년 방광범과 친구 10여 명은 저수지 둑에서 마치 내기라도 하듯 몸을 풍덩풍덩 던졌다….그런데 아이들이 자맥질을 막 시작할 때였다. 주월동 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공수부대가 지나가면서 일부러 주민들에게 겁을 주는 총격이었다. 공수부대는 마을 주민만 보이면 총을 쏘았다. 잠시 후에는 저수지에서 멱감는 아이들에게도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광주 아리랑 2, 194)

 

 

소설은 증언을 바탕으로 구성된 것이다. 일종의 역사적 기록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때 일어났던 일을 소설적 구성으로 생생하게 증언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공수부대는 멱 감는 아이들 에게까지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는 사실이다.

 

공수부대는 정예부대이다. 특수부대로서 신체적 조건도 우월하고 훈련도 세게 받는다. 그런데 나라를 지켜야 할 부대가 국민을 때려잡는 부대로 전락한 것이다. 더구나 몽둥이를 휘두르고 총을 쏴서 죽이기까지 했다. 세상에 이런 군대가 있을까? 국민의 군대가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며 쏴 죽였을 때 더 이상 국민의 군대라고 볼 수 없다. 이에 광주시민들은 자위권 차원에서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공수부대원들은 훈련을 잘 받았다. 훈련을 잘 받은 맹견과도 같은 것이다. 광주 도심에서 시민들의 저항으로 물러난 그들은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았다. 죽은 동료도 있었을 것이다. 마치 복수를 하듯이 주민들에게 총을 쏜 것이다. 그것도 멱을 감는 아이들에게 총을 쏘았다.

 

공수들은 어떻게 쏘았을까? 놀란 중학생들을 향해 조준 사격한 것이다. 중학생들이 도망 갔다. 이에 대하여 소설에서는 그러나 공수부대원이 쏜 총알은 정확히 박광범의 모리를 관통했다.”(광주 아리랑 2, 195)라고 했다. 공수들은 물가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조준사격을 하여 머리통을 날려 버린 것이다.

 

다음으로 국민학생들이 희생되었다. 전재수 학생은 총소리에 놀라 집으로 뛰었다. 도중에 신발이 벗겨져서 되돌아 가져오고자 했다. 공수부대원의 사격은 인정사정없었다. 이에 대하여 총알 세 발이 전재수 어린이의 가슴과 옆구리, 넓적다리에 명중했다. 전재수 어린이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광주 아리랑 2, 195)라고 했다.

 

공수들의 만행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만행 중의 극히 일부만 알려진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상무대 보병학교 교도대의 무반동총 공격으로 인하여 희생자가 발생하자 민간을 보복차원에서 학살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동료를 잃은 공수부대원들은 갑자기 퍼붓는 소나기를 맞으며 미친듯이 흥분했다. 교도대에 당한 화풀이를 송암동 주민에게 했다.”(광주 아리랑 2, 199)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공수들은 젊은 청년들을 찾기 위해 마을을 수색했다. 여기에 재수없게 청년 세 명이 걸려들었다. 하사관은 부대원에게 처치해 버려.”라고 명령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청년 세 명을 끌고 갔다. 어떻게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소설에서는청년 세 명 모두 총을 맞고 맥없이 쓰러졌다. 총소리에 놀라 40대 후반의 행은 하수구에 피신했다가 공수부대원의 조준사격을 받고는 숨이 끊어졌다.”(광주 아리랑 2, 199-200)라고 증언했다.

 

광주는 함평사건의 데자뷰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많다. 공수부대원들이 이동 중에 화풀이로 아이들과 청년들을 죽이기도 했다. 국민의 군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런데 30년전인 195012월 함평에서도 똑 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30년 간격을 두고 함평사건의 데자뷰를 보는 것 같다.

 

고향이 함평이다. 함평사건이 난 장교는 고향마을 가는 중간에 있다. 장교를 진다리라고 부른다. 긴다리를 진다리로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긴 다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얕은 하천에 있는 작은 다리에 지나지 않는다. 긴다리를 한자식으로 장교(長橋)라고 한 것이다.

 

유년시절 고향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나왔지만 몇 해 동안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특히 불갑산에 대한 기억은 무서운 것이었다. 그것은 1950년 함평사건과도 관련이 있다.

 

어른들은 한국전쟁 당시 이야기를 종종 했었다. 항상 듣는 말은 낮에는 대한민국이었고 밤에는 인공(인민공화국)이었다.”라고 말했다. 장교에서 5리가량 더 산쪽으로 들어간 곳에 마을이 있었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유튜브로 본 함평학살은 처참한 것이었다. 어른들에게 들었던 학살에 대한 이야기가 어느 정도 이해되었다. 195012월부터 50일가량 주변 마을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었는데 같은 날 제사 지내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어른 들에게 이런 이야기도 들었다. 주민을 모아 놓고 한꺼번에 쏴 죽였는데 그 중에서도 목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구덩이에 손톱자국을 남겼다고 한다. 언땅을 손톱으로 판 자국을 말한다. 구덩이에서 나오기 위해 필사적으로 긁은 손톱자국을 말한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눈물겨웠다. 유튜브 영상물에서 이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19805월 광주에서 민간인 학살 사건은 1950년 함평학살을 떠 올리기에 충분하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30년 만에 똑 같은 현상을 본 것이다. 그것도 국민의 군대에 의해서 학살된 것이다.

 

내가 만약 그 부대에 있었더라면

 

역사는 자꾸 반복되는 것 같다. 한국전쟁 당시 양민학살이 19805월 광주에서도 재현된 것이다. 자신의 부하 두 명이 끔찍하게 살해된 것을 복수하기 위해서 빨치산과 관련 없는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오인공격으로 부대원들이 희생당하자 이에 대한 분풀이를 하듯 동네 아이들과 청년들을 죽인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만약 내가 그 부대에 있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처신했을까?”에 대한 것이다. 군대는 상명하복이기 때문에 상관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상관이 사적인 복수심에 불타서 양민을 학살하라고 했을 때 명령을 거역할 수 있을까?

 

군대에서 상관의 명령을 거역하기 힘들다. 상관이 죽이라면 죽여야 할 것이다. 아무 죄 없는 사람도 명령을 하면 총을 쏘아야 한다.

 

그 원리가 작용하는 대로

 

군대에서는 살인해도 국가 범죄이기 때문에 면책되는 것일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내 손으로 사람을 죽였다면 살인행위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명령을 내린 사람은 직접적으로 살인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면책되는 것일까? 어느 것 하나 예외 없다. 부처님은 살인행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네 가지 원리를 갖추면, 그 원리가 작용하는 대로 지옥으로 던져 진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이 스스로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고, 남에게도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도록 교사하고,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데 동조하고,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데 칭송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네 가지 원리를 갖추면, 그 원리가 작용하는 대로 지옥에 간다.(A4.261)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살인을 하면 당연히 살인업이 된다. 그런데 살인을 교사한 자도 살인업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남에게도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도록 교사하고(parañca pāātipāte samādapeti)”(A4.261)라는 구절로 알 수 있다.

 

살인을 하도록 지시하는 것도 살인업이 된다. 직접 죽이는 것과 똑 같은 과보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직접살인이나 간접살인이나 모두 그 원리가 작용하는 대로 지옥에 간다.(A4.261)라고 했다.

 

1980년 오월 광주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1950년 함평사건의 데자뷰와 같다. 그러나 어느 지휘관도 처벌받지 않았다. 그렇다고 살인업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직접 살인업을 저지른 자나 지시하여 간접살인 업을 저지른 자나 똑같이 악업과보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원리가 작용하는 대로(dhammehi samannāgato yathābhataṃ)(A4.261)라고 했다.

 

내가 만약 그때 군인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상관이 아무 죄 없는 민간인을 죽이라고 했을 때 이를 거부할 수 있을까? 거부하면 총살당할지 모른다. 차라리 총살을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죄 없는 민간인을 학살할 수 없다. 그러나 알 수 없다. 자신이 살려면 전쟁광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을 것이다.

 

군대에서 받은 국난극복훈장

 

군대에서 훈장을 받았다. 국난극복훈장을 말한다. 아마 1981년 봄이었던 것 같다. 1980년 대학 2학년을 보내고 다음해 19812월에 군대에 갔었다. 그런데 그때 당시 군대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나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코메디 같은 일이다. 1980년 당시 열심히 데모하던 사람도 훈장을 받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국난극복훈장에 대해서 검색해 본적 있다. 검색해 보니 극난국복기장이라고 되어 있다. 훈장처럼 된 것이다. 국난극복기장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광주사태를 잘 극복했다고 군인들에게 주었는데 아마도 80년 광주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그때 당시 군대에 있었다면 받았을 것이다. 세상에 이런 코메디가 없다.

 

 

국난극복기장에 대해 다시 검색해 보았다. 전두환 정권이 1980년 전후하여 국난기간으로 규정하고, 당시 복무한 군인, 군무원, 공무원, 주한 외국군인 등 총 79만명에게 수여한 것이다. 현역으로는 198133일 현재 복무중인 현역장병 및 군무원이라고 되어 있다. 무려 65만명이다. 이런 조건에 만족해서 받은 것이다.

 

학살의 역사는 반복된다

 

학살은 옛날부터 있어 왔다. 어느 나라이든지 시대를 초월하여 학살이 자행되어 왔다. 이는 전쟁광들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학살은 동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동료가 죽었을 때 나타난다. 이때 전쟁광들은 증오심과 적개심을 키워 준다. 복수 또는 보복이라는 이름으로 학살이 자행되는데 민간인들이 희생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런 현상을 1950년 함평에서도 보았고 1980년 광주에서도 보았다.

 

광주에서 사태가 일어난 지 이제 41년이 되었다. 한세대가 이상 훌쩍 지나가 버린 것이다. 1980년 이후 태어난 사람들은 광주에서 사건이 전설처럼 들릴지 모른다. 마치 한국전쟁 이후에 태어났던 베이비부머가 1950년 함평사건을 전설처럼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다.

 

어른들은 1950년 당시 일어났던 함평사건을 생생하게 말했다. 그러나 전쟁 이후 태어났던 사람들은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만 알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유튜브에서 함평사건에 대한 것을 보니 어른들이 말한 것이 떠 올랐다.

 

1980년 광주에서 있었던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은 생생할 것이다. 그러나 이후 태어난 사람들은 그다지 다가오지 않을지 모른다. 그래서 세월이 지나면 전설이 된다. 누군가 기록해 놓지 않으면 왜곡될 수 있다.

 

1950년에서 1980년까지는 30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1980년에서 현재 2021년은 41년이라는 격차가 있다. 그 사이에 광주에서와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 또 다시 학살이 일어날지 모른다. 학살의 추억이 있어서일까 학살의 역사는 반복되는 것 같다.

 

 

2021-03-2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