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나는 니까야의 노예일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1. 5. 8. 14:01
나는 니까야의 노예일까?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이 말은 너무나 유명한 말이다. 도를 도라 했을 때 늘 그렇게 말하는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 했을 때 늘 그렇게 말하는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금강경에서 "A는 A가 아니라, 그이름이 A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명가명비상명, 이 말에 대해 최진석 선생은 '나홀로 읽는 도덕경'에서 명실(名實)로 설명했다. 이는 도덕경의 성립배경과도 관련이 있다. 철기시대가 시작되면서 기존질서체제가 붕괴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명실이란 무엇일까? 사전에 따르면, 중국철학 용어로서 "명은 명칭·개념을 가리키고 실은 실재적·객관적 사물을 가리킨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철기 이전 시대에서는 명과 실이 일체였다. 이를테면 사대부가 권력을 가진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철기시대에 신흥계급이 출현하면서 권력관계가 역전되었다. 그래서 사대부는 이름만 남게 되었다.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이름은 그 사람임을 나타낸다. 그 사람을 보면 이름이 떠 올려지고, 이름을 들으면 그 사람이 떠 올려진다. 명과 실이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름만 있고 실재하는 것이 없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는 한낱 구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를 이념 또는 이데올로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누군가 "A는 B이다."라고 말하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길게 설명되어 있다면 개념정리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름으로 끝난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런 것이다. 누군가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다."라고 했다. 정말 사랑은 눈물의 씨앗일까? 눈물의 씨앗 아닌 것이 있을 수 있다. 사랑은 웃음의 씨앗이 될 수도 있고, 사랑은 기쁨의 씨앗이 될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랑을 눈물의 씨앗으로 한정해 버리면 구호가 되고 이념이 되고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폭력이다.

이름과 실재가 일치하지 않았을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름은 있는데 실재는 없다면 또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해 최진석 선생은 명가명비상명으로 설명한다. 철기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사대부가 있었지만 권력을 잃은 사대부로 말하기도 한다. 이름만 남은 것 또는 껍데기만 있는 것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래서 명가명비상명이라고 했을 때 그 이름이 실재와 일치 하지 않는 것으로 설명한다.

최진석 선생의 명실에 대한 설명을 보고서 불교의 명색(名色)을 떠 올렸다. 비슷한 개념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말이다. 왜 그런가? 불교에서 말하는 명색은 정신과 물질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명실은 명칭과 실재에 대한 것이고, 명색은 정신과 물질에 대한 것이다. 명실과 명색이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이는 서로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노자는 개념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부처님은 실제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명가명비상명이라고 했을 때 이는 개념에 대한 것이다. 개념타파에 대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최진석 선생은 이렇게 설명한다.

"반면에 노자는 어떤 대상에 대해서 개념을 분명히 정하고 정의내려버리면 그 정의가 그 개념을 완전히 가둬버리기 때문에 이 대상의 활동성이 좁아질 뿐만아니라 개념을 확고하게 정하면 정할수록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신념이 강해져서 그것으로만 세계를 보게 되는 부정적인 현상이 발생된다고 봅니다."

여기서 부정적 상황이란 무엇일까? 신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 마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A는 B라고 한정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이는 폭력이다. 그래서 신념이 강화되면 될수록 폭력적 성향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세상의 모든 구호는 폭력적 요소가 있게 된다. 이런 이유로 "이데올로기는 폭력이다!"라고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불교에서 말하는 명색은 중국철학에서 말하는 명실과 다른 것이다. 부처님의 관심사는 오온이었다. 그래서 고와 고소멸을 설했다. 이는 우리 몸과 마음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명색은 오온에 대한 것이 된다. 부처님은 명색을 정신물질 즉, 나마루빠(nāmarūpa)로 본 것이다.

부처님은 우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우주가 유한한지 무한한지 등에 대해서는 무기한 것이다. 그 대신 우리 몸과 마음을 탐구했다. 이른바 오온, 십이처, 십팔계에 대한 것이다. 이것이 우주이다. 우리 몸과 마음에서 세계를 본 것이다.

"그러나 벗이여, 세계의 끝에 이르지 않고서는 괴로움의 끝에 도달할 없다고 나는 말합니다. 벗이여, 지각하고 사유하는 육척단신의 몸 안에 세계와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 있음을 나는 가르칩니다.”(S2.26)

달려서는 세계 끝에 이를 수 없다. 그러나 이 작은 몸 안에서는 세계의 끝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세계의 생성과 소멸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세계의 끝에 이르렀을 때 우주의 끝에 도달한 것과 같다. 그 궁극은 어디일까? 열반이다. 열반은 수행으로 달성된다. 개념타파를 포함한 수행으로 성취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마루빠(名色)를 정신-물질로 본 것이다.

명색에 대해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이중표 선생이 그렇다. 그는 명색을 이름-형태로 해석한다. 이는 우파니샤드 방식에 따른 것이다. 우리 몸과 마음을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오온을 개념적으로 보아서 그 개념을 타파하자고 말한다. 이것이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천수백년동안 잘못 해석된 부처님 가르침을 바로잡겠다고 말한다. 유튜브를 보면 이런 내용의 강연이 많다.

나마루빠를 정신-물질이 아닌 이름-형태로 해석 했을 때 전혀 다른 불교로 되어 버린다. 이는 중관이나 유식 영향도 있을 것이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A는 A가 아니라, 그이름이 A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본다. 그러나 니까야를 보면 이와 다르다.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명색이란 무엇인가? 그것에는 느낌, 지각, 의도, 접촉, 정신활동이 있으니 이것을 명이라 부르고, 네 가지 광대한 존재, 또는 네 가지 광대한 존재에서 파생된 물질을 색이라 한다.” (S12.2)

부처님은 명백히 나마루빠에 대하여 정신-물질에 대한 것이라고 정의해 놓았다. 이것도 이데올로기라고 볼 수 있을까?

노자의 명가명비상명은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지말자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본다면 모든 경서는 이데올로기가 되고 만다. 노자의 도덕경도 이데올로기가 되고 불교의 니까야도 이데올로기가 된다. 당연히 기독교의 바이블도 이데올로기가 된다. 그래서 경전에 의존 하는 것은 좋지만 지나치게 의존 했을 때, 경전을 주인으로 받들어 모셨을 때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경전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니까야는 나의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일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여 의무적 글쓰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세월이 십년이 넘었다. 그 동안 쓴 것만 해도 수천개가 된다. 이런 나는 경전의 노예가 된 것일까? 불교라는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것 같지 않다. 경전에서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말씀이 이데올로기가 될 수 없다. 진리는 그 자체로 진리일 뿐이지 다른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념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것은 "집착하지 말라!"라는 말로 받아 들이고 싶다.

무엇이든지 집착하면 괴로운 과보를 초래한다. 오온이 그렇다. 오온에 집착한 결과 여기 이렇게 있게 되었다. 오온에 집착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런데 오취온적 존재는 그 자체가 괴로움 덩어리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 몸과 마음이 괴로움 덩어리 그 자체임을 말한다. 이런 사실을 니까야에서는 알려 준다.

부처님 가르침을 흔히 뗏목으로 비유한다. 금강경에도 나온다. "법상응사 하황비법"으로 표현된다. 그렇다고 하여 뗏목을 버려서는 안된다. 뗏목을 지고 갈 수 없다고 하여 불살라 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다음 사람을 위해서라도 물가에 침수해 놓아야 한다. 버려야 할 것은 가르침에 대한 집착이다. 가르침에 집착했을 때 가르침의 노예가 된다.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오늘도 팔정도경을 암송할 것이다. 그리고 니까야를 열어 볼 것이다. 평생 이렇게 할 것 같다. 이것도 집착일까? 이것도 경전의 노예, 가르침의 노예라고 볼 수 있을까? 설령 진리의 말씀이라도 저 언덕으로 갔으면 버리라고 했다. 이는 진리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말이지 진리를 버리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나는 오늘도 진리의 말씀과 함께 한다.

2021-05-0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