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슬픔을 노래하는 시인이여

담마다사 이병욱 2021. 5. 4. 07:05

슬픔을 노래하는 시인이여


참 좋은 시간대이다. 새벽 세 시대는 좋다. 두 시대는 너무 빠르다. 네 시대는 적당하다. 다섯 시대는 늦다.

세 시대에 가장 편한 자세를 취한다. 앞으로 여섯 시까지는 나의 시간이다. 무엇을 해야 할까? 사유하기 좋은 시간이다. 글로 남기고픈 충동을 억제할 수 없다. 스탠드 불을 켜고 스마트폰 자판을 똑똑 쳐본다.

 


감동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삶에는 감동이 있어야 한다. 감동없는 삶은 죽은 것과 같다. 어떤 감동인가? 그것은 경외를 동반한 감동이다. 이를 상베가(sa
vega)’라고 한다. 최근 알게 된 빠알리 용어이다.

생명만큼 경이로운 것이 있을까? 사람들은 봄이 되면 새싹에서 경이를 본다. 꽃이 피면 경이로움의 절정이 된다. 더욱 신비한 것은 아기가 태어나는 것이다. 대체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과학적 지식을 동원할 수도 있지만 생명 그 자체는 알 수 없어서 신비한 것이다. 때로 두려움도 느낀다.

어떻게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생겨날 수 있을까? 사람의 머리로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신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기도 할 것이다. 이때 창조주에 대한 외경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불교인들은 창조주를 믿지 않는다.

나의 뿌리를 알기 위해 족보를 따져 본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는 누구인지 따져 본다.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는 누구인지 역시 따져 본다.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잎파리를 이용하여 무한소급하다 보면 이 세상의 잎파리는 남아 나지 못할 것이다.

무한소급하다 보면 최초의 원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이들은 창조주를 생각한다. 자아와 이 세상이 있게 된 원인을 창조주로 보는 것이다. 그럼 그 창조주는 무엇을 원인으로 생겼을까? 이런 질문은 우문이 될 수 있다. 창조주는 원인 없이 스스로 존재한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인들은 원인없이 존재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창조주를 믿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연기법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조건 발생하는 연기법에서 조건없이 생겨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불교는 논리적이다. 연기법 자체가 논리적이기 때문에 불교는 논리적 종교가 될 수밖에 없다. 마치 수학적 공식을 보는 것 같다.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생각하는 것 같다. 하나라도 어긋나면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법수(法數)로 설명되기도 한다. 앙굿따라니까야가 대표적이다. 하나로 부터 시작하여 열두 가지 법수가 있다.

시람들은 모를 때 두려움을 느낀다. 천둥치고 벼락치면 두려움 느끼지 않을 사람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천둥, 번개, 벼락에 두려움 갖는 사람은 별로 없다. 자연의 현상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두려움을 갖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하늘이 노했다고 했을 것이다. 지진이나 해일 등 불가항력적 재난이 일어나면 신이 노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실제로 십여년전 서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쓰나미가 일어났을 때 그렇게 말한 종교인들이 있었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 이 말은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말과 같다.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 것이다. 본래 변하는 것이 본질이다. 이 세상에 가만 있는 것은 없다. 움직임 없이 가만 있다면 죽었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바위조차도 가만 있지 않는다. 억만년 세월이 지나면 바위도 가루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비중의 신비는 생명의 신비라 아니할 수 없다. 생명의 신비를 생각하면 경외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경이와 두려움을 동반하는 것을 말한다. 왜 두려움인가? 생명 있는 것들은 결국 죽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사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살아 갈 수 없다. 그래서 출가한 사람들이 많다. 랏타빨라도 그랬다.

맛지마니까야 랏타빨라의 경’(M82)을 보면 출가이유가 있다. 네 가지가 있는데 첫번째는 이 세상은 불안정하여 사라진다”(M82)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늙고 노쇠하고 고령이 되어서 죽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다름아닌 괴로움이다. 그래서 출가이유 두번째는이 세상은 피난처가 없고 보호자가 없다.”(M82)가 된다. 어느 누구도 고통을 나누어 가질 수 없음을 말한다.

출가이유 세번째는이 세상은 나의 것이 없고 모든 것은 버려져야 한다.”(M82)라는 것이다. 저 세상으로 갈 때 지은 행위대로 가는 것을 말한다. 네번째 출가이유는이 세상은 불완전하며 불만족스럽고 갈애의 노예상태이다.”(M82)라는 것이다. 이익과 욕망을 찾아 이것 저것을 탐하는 것을 말한다. 랏타빨라는 이와 같은 네 가지 이유로 출가했다.

과거 출현했던 모든 부처님은 생노병사 문제를 해결하고자 출가했다. 특히 죽음의 문제가 크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삶의 의미가 없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 부처님들은 죽음문제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초기경전을 보면 명백히 나와 있다.

과거에 출현했던 모든 부처님들은 연기법으로 깨달았다. 조건발생하는 연기법을 보고서 역으로 조건발생을 소멸하는 방식으로 생사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이른바 연기의 역관으로 생사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괴로움과 윤회의 원인을 무명과 갈애로 보았다.

생명은 경이로운 것이다. 그러나 원리를 모르면 두려운 것이 된다. 꽃이 질 때 사람들은 무상함을 느낀다. 노쇠했을 때는 인생무상을 느낀다. 무상을 느낀다고 하여 깨달을 수 있을까? 자아관념이 있는 한 단지 느낌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꽃이 지는 것을 슬퍼하고 노쇠한 것을 슬퍼한다.

슬퍼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죽은 자 앞에서 통곡한다고 해서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이치를 안다면 슬퍼할 것이 없다. 당연히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인생의 해법이 초기경전에 모두 실려 있다는 것이다.

니까야를 보면 인류가 고민하던 것들이 모두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출현했던 모든 부처님들이 깨달았던 가르침이 모두 니까야에 실려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이런 사실을 모를까? 사람들은 왜 이런 사실을 알려고도 하지 않을까?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생명을 보면서 경이를 느끼지만 노쇠를 보면서 두려움을 느낀다. 특히 죽음을 생각하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 그런데 이런 고민을 옛날 사람들도 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해법까지 제시했다.

모든 것을 신의 탓으로 돌리지 않아도 된다. 과거 부처님들이 발견한 연기법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준다. 그래서 괴로움뿐만 아니라 윤회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감동하지 않을 자 있을까?

삶에는 감동이 있어야 한다. 감동없는 삶은 죽은 삶이다. 가르침을 접하면 감동하게 되어 있다. 전율을 동반한 감동이다. 처음에는 죽음이 두렵지만 초기경전을 접하면 전율하게 되고 감동으로 이어진다.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 경외를 동반한 감동을 상베가라고 말 할 수 있다.

슬퍼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꽃이 지는 것을 슬퍼하고, 늙는 것을 슬퍼하면 청승맞게 보인다. 슬픔을 노래하는 시인이여, 더 이상 슬퍼 말자.


2021-05-0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