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행위는 나의 거울
타인의 행위를 보고서 나 자신을 돌아 보게 된다. 때로 얼굴이 화끈 거릴 때가 있다.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상공간에서도 그렇다.
전혀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자신을 표현하지 않으니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다. 최악은 퇴장하는 것이다. 이름 석자가 각인된다.
자비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남을 배려 하는 것도 자비심의 발로일 것이다. 말이라도 한마디 해 주면 달리 볼 것이다. 모임에 한번이라도 나오면 다시 평가하게 될 것이다.
참을성 없는 사람이 있다. 조금이라도 손해 나는 일은 하려 하지 않는다. 당연히 모임에도 참여 하지 않는다. 시간과 돈과 정력의 낭비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제3자가 보기에 그런 행위가 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세상은 요지경이다. 갖가지 성향의 사람들이 있다. 어제는 이런 경우가 있었다. 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받아 주었더니 통화하자고 한다. 초면에 다짜고짜 이야기 하자는 것이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자비의 마음으로 받아 주어야 하나 너무 빠른 것 같다. 댓글 한번 달지 않았고 '좋아요' 공감 한번 하지 않았다. 문자로 얘기 하자고 했다. 그랬더니 "실망입니다."라고 했다.
자신의 글을 읽어 보라고 한다. 이력이 화려 하다. 글도 쓰고 강연도 하는 사람이다. 링크된 것을 읽어 보니 관심주제가 아니다. 이런 멘트를 날렸더니 또다시 "실망입니다."라고 한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죄송합니다. 저의 한계입니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좋아요' 아이콘을 남겼다. 그녀는 만족한 듯 하다. 일단 친구에서 제외시켰다.
인터넷에 글을 쓰다 보니 누구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믾은 것 같다. 대체 어떤 인간인지 확인 하려는 것 같다. 이럴 때는 의도대로 해 주어야 한다. 그 자신보다 못하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겸손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가장 좋다.
공감을 잘 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에스 엔에스에서 늘 공감 하는 멘트를 남긴다. 또한 수희찬탄 한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다. 가식적으로도 보였다. 그러나 한두달도 아니고 일이년 지속되었을 때 그 사람의 진심이 보였다.
사람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공감할 줄 아는 사람과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비로운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당연히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비롭지 않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인가? 그런 것 같지 않다. 호불호와 쾌불쾌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상대방을 배려 하려고 노력한다. 함부로 퇴장 하지 않는다. 모임에는 참여하려고 노력한다. 최소한의 도리는 지키려고 노력한다.
나홀로 고립되어 세상을 살 수 없다. 누군가 나홀로 살 수 있다고 말한다면 자만이다. 이기주의자라고도 볼 수 있다. 자기자신만 생각 했을 때 더럽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회피하려 할 것이다. 얌체라고도 볼 수 있다.
세상에 얌체가 너무 많다. 얌체는 사랑을 어떻게 할까? 아마 찔끔찔끔 줄 것이다. 사랑을 한번에 많이 주면 버릇된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사랑할 때도 찔끔찔끔 조금씩 준다. 이를 얌체사랑이라 할 것이다.
사랑의 샘은 아무리 퍼주어도 마르지 않는다. 퍼주면 퍼줄수록 더욱 더 샘솟는 것이 사랑의 샘이다. 사무량심도 그렇다.
사무량심은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의 마음이다. 세상에 이와 같은 거룩한 마음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한다.
공감은 사무량심의 마음과 같다.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의 마음을 우주 끝까지 방사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느님이 될 수 있다. 자애의 하느님, 연민의 하느님, 기쁨의 하느님, 평정의 하느님이다. 여기서 하느님은 브라흐마(brahma)를 번역한 것이다. 색계와 무색계의 존재를 아우르는 말이다. 좁은 의미로는 색계초선천의 존재를 말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에서는 브라흐마를 하느님으로 번역했다. 한역으로 범천을 말한다. 경전에서는 색계초선천의 대범천(maha brahma)를 일컫는다. 누구나 자애를 닦으면 하느님이 될 수 있다. 당연히 하느님도 윤회하는 존재에 해당된다.
하느님이 되고자 한다면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 출발점은 공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애의 마음이다. 상대빙의 고통에 공감했을 때는 연민의 마음이 생겨난다. 상대방의 성공과 번영에 공감한다면 기쁨의 마음이 일어난다. 자애와 연민과 기쁨이 있으면 평정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타인의 행위를 보고서 나를 비추어 본다. 타인의 행위는 나의 거울이다. 전혀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을 보면 얌체족을 보는 것 같다. 나도 그럴까? 오늘 어떤 이의 공감할 줄 모르는 행위를 보고서 나를 돌아 보게 되었다.
2021-05-08
담마다사 이병욱
타인의 행위를 보고서 나 자신을 돌아 보게 된다. 때로 얼굴이 화끈 거릴 때가 있다.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상공간에서도 그렇다.
전혀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자신을 표현하지 않으니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다. 최악은 퇴장하는 것이다. 이름 석자가 각인된다.
자비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남을 배려 하는 것도 자비심의 발로일 것이다. 말이라도 한마디 해 주면 달리 볼 것이다. 모임에 한번이라도 나오면 다시 평가하게 될 것이다.
참을성 없는 사람이 있다. 조금이라도 손해 나는 일은 하려 하지 않는다. 당연히 모임에도 참여 하지 않는다. 시간과 돈과 정력의 낭비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제3자가 보기에 그런 행위가 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세상은 요지경이다. 갖가지 성향의 사람들이 있다. 어제는 이런 경우가 있었다. 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받아 주었더니 통화하자고 한다. 초면에 다짜고짜 이야기 하자는 것이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자비의 마음으로 받아 주어야 하나 너무 빠른 것 같다. 댓글 한번 달지 않았고 '좋아요' 공감 한번 하지 않았다. 문자로 얘기 하자고 했다. 그랬더니 "실망입니다."라고 했다.
자신의 글을 읽어 보라고 한다. 이력이 화려 하다. 글도 쓰고 강연도 하는 사람이다. 링크된 것을 읽어 보니 관심주제가 아니다. 이런 멘트를 날렸더니 또다시 "실망입니다."라고 한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죄송합니다. 저의 한계입니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좋아요' 아이콘을 남겼다. 그녀는 만족한 듯 하다. 일단 친구에서 제외시켰다.
인터넷에 글을 쓰다 보니 누구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믾은 것 같다. 대체 어떤 인간인지 확인 하려는 것 같다. 이럴 때는 의도대로 해 주어야 한다. 그 자신보다 못하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겸손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가장 좋다.
공감을 잘 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에스 엔에스에서 늘 공감 하는 멘트를 남긴다. 또한 수희찬탄 한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다. 가식적으로도 보였다. 그러나 한두달도 아니고 일이년 지속되었을 때 그 사람의 진심이 보였다.
사람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공감할 줄 아는 사람과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비로운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당연히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비롭지 않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인가? 그런 것 같지 않다. 호불호와 쾌불쾌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상대방을 배려 하려고 노력한다. 함부로 퇴장 하지 않는다. 모임에는 참여하려고 노력한다. 최소한의 도리는 지키려고 노력한다.
나홀로 고립되어 세상을 살 수 없다. 누군가 나홀로 살 수 있다고 말한다면 자만이다. 이기주의자라고도 볼 수 있다. 자기자신만 생각 했을 때 더럽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회피하려 할 것이다. 얌체라고도 볼 수 있다.
세상에 얌체가 너무 많다. 얌체는 사랑을 어떻게 할까? 아마 찔끔찔끔 줄 것이다. 사랑을 한번에 많이 주면 버릇된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사랑할 때도 찔끔찔끔 조금씩 준다. 이를 얌체사랑이라 할 것이다.
사랑의 샘은 아무리 퍼주어도 마르지 않는다. 퍼주면 퍼줄수록 더욱 더 샘솟는 것이 사랑의 샘이다. 사무량심도 그렇다.
사무량심은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의 마음이다. 세상에 이와 같은 거룩한 마음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한다.
공감은 사무량심의 마음과 같다.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의 마음을 우주 끝까지 방사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느님이 될 수 있다. 자애의 하느님, 연민의 하느님, 기쁨의 하느님, 평정의 하느님이다. 여기서 하느님은 브라흐마(brahma)를 번역한 것이다. 색계와 무색계의 존재를 아우르는 말이다. 좁은 의미로는 색계초선천의 존재를 말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에서는 브라흐마를 하느님으로 번역했다. 한역으로 범천을 말한다. 경전에서는 색계초선천의 대범천(maha brahma)를 일컫는다. 누구나 자애를 닦으면 하느님이 될 수 있다. 당연히 하느님도 윤회하는 존재에 해당된다.
하느님이 되고자 한다면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 출발점은 공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애의 마음이다. 상대빙의 고통에 공감했을 때는 연민의 마음이 생겨난다. 상대방의 성공과 번영에 공감한다면 기쁨의 마음이 일어난다. 자애와 연민과 기쁨이 있으면 평정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타인의 행위를 보고서 나를 비추어 본다. 타인의 행위는 나의 거울이다. 전혀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을 보면 얌체족을 보는 것 같다. 나도 그럴까? 오늘 어떤 이의 공감할 줄 모르는 행위를 보고서 나를 돌아 보게 되었다.
2021-05-08
담마다사 이병욱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교인의 자만과 꼰대질 (0) | 2021.05.15 |
---|---|
퍼스트 펭귄이 되기로 (0) | 2021.05.11 |
나는 니까야의 노예일까? (0) | 2021.05.08 |
슬픔을 노래하는 시인이여 (0) | 2021.05.04 |
일인사업자는 야성(野性)이 있어야 (0) | 2021.04.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