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의 자만과 꼰대질
나는 얼마나 자비로운 존재일까? 가만 생각해 보니 몹시 경직되어 있는 것 같다. 문자에서도 나타난다. 문자에 감정을 싣는 심볼이나 이모티콘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다. “네~”라고 하면 부드럽지만, “네.”라고 하면 딱딱한 것이다. 문자 하나만 보아도 자비로운지 판단할 수 있다.
자신을 알아야 한다. 자신이 아는 것이 별로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겸손해 진다. 조금 아는 사람이 아는 채 헸을 때 경솔해지기 쉽다. 많이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자만으로 보일 것이다. 이른바 지식인들이 그렇다.
지식인의 특징은 무엇일까? 아는 것은 많지만 실천이 약하다. 현장 보다는 책상머리에 있다. 머리만 쓰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특히 대인관계에서 그렇다. 나홀로 고립되어 사는 사람에게서도 볼 수 있다. 자신만의 생각에 갇혀 사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사고가 유연하지 않다. 딱딱한 것이 특징이다. 지식인, 종교인, 권력자 등 지배층의 이미지는 딱딱하다.
딱딱함은 자만에서 나온다. 지식인은 “내가 교수인데.”라며 배운 자의 자만을 드러낸다. 종교인은 “내가 신부인데.”라든가, “내가 목사인데.”라든가, “내가 스님인데.”라며 태생적 자만을 드러낸다. 많이 가진 자라면 “내가 사장인데.”라며 부자의 자만을 드러낸다.
지위를 자아와 동일시 했을 때 자만이 일어난다. 대개 “내가 누군데.”라는 불선심으로 표출된다. 더 심하면 “내가 누군데, 감히!”라 할 것이다. 그래서 안하무인이 되기 쉽다. 가르치려 드려 하는 것이다. 이른바 꼰대질이다. 높은 지위에 있으면 내려다 보일 것이다. 그래서 지시하고 명령하고 훈육하려 든다.
사고가 경직되어 있으면 종종 분노로 표출된다. 주로 권력자에게서 볼 수 있다. 분노로 권위를 표출하는 것이다. 분노로 권위를 과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노했다.”라든가, “격노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분노했다고 해서 권위가 올라가지 않는다. 권위는 인위적으로 만들어는 것이 아니다. 경직된 자에게 나오는 권위는 두려움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유연한 자에게서 나오는 권위는 자비에 의한 것이다. 분노의 권위와 자비의 권위는 다른 것이다.
진정한 권위는 자비에서 나온다.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이 권위 있는 사람이다. 겸허하게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이 힘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리더의 구체적 조건은 무엇일까? 부처님 가르침에도 리더의 조건이 있다.
부처님 가르침은 다양하다. 근본가르침이나 수행의 가르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애의 가르침도 우정의 가르침도 있다. 놀랍게도 처세의 가르침도 있다. 어떤 것일까?
“핫타까 알라바까는 믿음이 있고, 핫타까 알라바까는 계행을 지키고, 수행승들이여, 핫타까 알라바까는 부끄러움을 알고, 수행승들이여, 핫타까 알라바까는 창피함을 알고, 수행승들이여, 핫타까 알라바까는 많이 배우고, 수행승들이여, 핫타까 알라바까는 관대하고, 수행승들이여, 핫타까 알라바까는 지혜를 갖추었다. 수행승들이여, 핫타까 알라바까는 겸손을 갖추었다. 핫타까 알라바까는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아주 놀랍고 경이로운 원리를 지녔다는 사실을 알아라.”(A8.24)
이것이 리더의 조건이다. 여덟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믿음, 계행, 부끄러움, 창피함, 학식, 관대, 지혜, 겸손을 말한다. 이 정도 조건을 갖추어야 리더라 할 수 있다.
리더의 조건에 자만은 보이지 않는다. 모두 선법들뿐이다. 특히 관대(cāgavā)와 겸손(appiccho)에 주목한다. 관대함과 겸손함이야말로 리더의 조건 중의 조건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잘 들어야 함을 말한다. 가르치려 하기 보다 겸허한 마음으로 잘 경청해 주었을 때 따를 것이다.
알라바까에게는 자신을 따르는 오백명의 무리가 있었다. 재가신자에게 오백명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힘이 있음을 말한다. 세력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선거에 출마한다면 당선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알라바까는 성직자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고 권력자도 아니다. 다만 많이 배운 재가자였다. 이런 알라바까에게 오백명의 추종자가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알라바까에게는 사람을 끌 만한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알라바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 대중을 세존께서 가르쳐주신 네 가지 섭수의 토대로 이 대중을 섭수합니다. 1) 저는 ‘이 사람은 보시를 베풀어 섭수해야 한다.’라고 알면, 그 사람을 보시를 베풀어 섭수합니다. 2) 저는 ‘이 사람은 사랑스런 말로 섭수해야 한다.’ 라고 알면, 그 사람을 사랑스런 말로 섭수합니다. 3) 저는 ‘이 사람은 도움을 주는 일로 섭수해야 한다.’ 라고 알면, 그 사람을 도움을 주는 일로 섭수합니다. 4) 저는 ‘이 사람은 동등한 배려로 섭수해야 한다.’ 라고 알면, 그 사람을 동등한 배려로 섭수합니다.”(A8.24)
알라바까는 보시, 애어, 이행, 동사를 실천하여 리더가 되었다. 이른바 사섭법으로 리더가 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섭법은 일종의 성공학이다.
성공하기를 바란다면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가르침에는 처세의 가르침도 있고 성공의 가르침도 있다. 처세의 가르침은 “믿음, 계행, 부끄러움, 창피함, 학식, 관대, 지혜, 겸손”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처세의 달인이 되고자 한다면 관대함과 겸손함을 갖추어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마디로 유연한 사고를 갖자는 것이다. 가르치려 들지 않고 훈계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꼰대질 하지 않는 것이다. 겸허한 마음으로 경청해야 한다. 겸청(兼聽)이다. 자비의 마음에 적이 있을 수 없다.
성공의 가르침은 사섭법을 실천하는 것이다. 어떻게 실천하는가? 먼저 주는 것이다. 세상에 선물 싫어 하는 사람은 없다.
뇌물이 아닌 한 선물은 기쁜 것이다. 선물은 원한 맺힌 자의 마음도 녹일 수 있다고 했다. 자애수행의 최종단계는 주는 것이다. 선물을 받으면 고개가 숙여진다. 보시로서 그 사람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사랑스러운 말을 하라고 했다. 이는 다름아닌 정어(正語)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온화하여 귀에 듣기 좋고 사랑스럽고 흐뭇하고 우아하고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많은 사람이 마음에 들어 하는 그러한 말을 합니다.”(M76)라고 했다. 사랑스러운 말을 하면 그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다.
도움이 되는 행위를 하라고 했다. 나를 만남으로 인하여 이득이 되게 해야 한다.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다. 필요할 때 도움이 되어 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동등한 배려를 하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눈높이가 되어 주는 것이다. 마치 유치원생에게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굽히는 것과 같다. 미천한 존재라도 자신에게 무릎을 굽히면 감동하지 않을 자 없을 것이다.
늘 부처님 가르침과 함께 산다. 필만사천이라는 방대한 법문을 다 보지는 않았다. 아마 평생가도 다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가르침을 접하게 될 때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이 세상의 지혜는 모두 니까야에 들어가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처세에 대한 것과 성공에 대한 것도 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만 산다면 절대 실패할 수 없다. 성공과 번영이 보장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지식인에게서 자만을 본다.
지식인들은 사회적 지위를 자아와 동일시한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절대 사과를 하지 않는 것 같다. 특히 종교인은 가르치려 들고 훈계하려 드는 것 같다. 꼰대질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권위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권위는 유연한 사고에서 생긴다. 오백명의 무리가 따르는 알라바까를 보면 알 수 있다.
성공의 조건이 있다. 개인적인 덕목으로서는 “믿음, 계행, 부끄러움, 창피함, 학식, 관대, 지혜, 겸손”이 요청된다.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베푸는 삶, 사랑스러운 말, 이익이 되는 행위, 동등한 배려”가 요청된다. 나는 이런 조건을 실천하고 있는가?
2021-05-1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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