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불선법 끊는 것보다 선법 성취가 더 어려운 것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1. 5. 17. 19:20

불선법 끊는 것보다 선법 성취가 더 어려운 것은

 

 

5월 첫번째 금요니까야강독모임이 5 14일 줌으로 열렸다. 줌으로 열리는 편하긴 편하다. 사무실에 앉아서 접속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동감이 없다. 오로지 시각과 청각뿐이다.

 

줌은 해상도도 좋지 않고 잘 들리지 않는다. 종종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코로나 시기에 이런 시스템이라도 있기에 모임이 유지된다. 인터넷과 정보통신의 혜택을 톡톡히 받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번 모임에서는 두 개의 경을 합송했다. 하나는 ‘한적한 숲에서 지낼 수 있는 수행자의 자격’에 대한 경이고, 또 하나는 ‘새내기 수행승자에 대한 수행지침’에 대한 경이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 각각 ‘한적한 숲의 경’(A5.110)과 ‘안다까빈다의 경’(A5.114)에 해당된다.

 

부처님은 한적한 숲에서 선정을 닦으라고 했다. 숲이나 나무아래, 빈집, 동굴에서 홀로 수행하라고 했다. 그러나 숲에서 홀로 수행하는 것은 위험이 따른다.

 

아무나 홀로 숲에서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위험을 무릎 쓰고 수행해야 한다. 목숨걸고 수행해야 함을 말한다. 숲속에서 살며 수행한다는 것은 절박함을 필요로 한다. 안락하게 살며 수행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에 부처님은 다섯 가지를 말했다. 계행, 배움, 정진, 선정, 해탈에 대한 것이다.

 

빠띠목카에 대하여

 

다섯 가지 항목 중에 계행이 있다. 경에서는 “계행을 지키고 의무계율을 수호하고 올바른 행위의 경계를 갖추고 사소한 잘못에서도 두려움을 보고 지켜야할 학습계율을 수용하여 배운다.(A5.114)라고 설명되어 있다.

 

계행은 일반적으로 오계를 말한다. 의무계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를 승단의 계율이라고 했다. 빠알리어로 빠띠목카라고 한다.

 

전재성 선생은 의무계율에 대하여 두 가지로 설명했다. 하나는 하지말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벗어나기’에 대한 것이다. 후자를 별해탈(別解脫)이라고 한다. 왜 별해탈이라고 할까? 이는 잘못한 것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율장에서 빠띠목카를 찾아보았다. 빠띠목카는 본래 계율조문을 모아 놓은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율장에서 규정하는 빠띠목카는 이와 다르다. 이는 “빠띠목카라는 것, 그것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의 시초이자, 얼굴이자, 선두이다. 그래서 빠띠목카라고 한다.(Vin.I.103)라고 정의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칠불통계게에서

 

빠띠목카를 착하고 건전한 것들의 시초라고 한다. 이는 법구경 칠불통계게에서도 볼 수 있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모든 죄악을 짓지 않고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성취하고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님들의 가르침이다.(Dhp.183)

 

 

이 게송은 부처님이 설한 팔만사천 가르침을 한마디로 압축한 것이라고 한다. “모든 죄악을 짓지 않는다. (諸惡莫作)”는 것은 율장에 대한 것이고,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성취한다. (衆善奉行)”는 것은 경장의 가르침을 말한다. 그리고 “마음을 깨끗이 한다. (自淨基意)”는 것은 논장의 가르침을 말한다. 이렇게 하나의 게송안에 율장과 경장과 논장의 핵심이 요약되어 있다.

 

빠띠목카를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의 시초라고 했다. 이는 모든 죄악을 짓지 않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율장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면 하지말라.”라가 된다. 경장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면 행하라.”가 된다.

 

율장은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하지말라”라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모든 죄악을 짓지 않고”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사소한 계율이라도 인지하고 있으면 스스로 자각하여 반성하고 제거하는 토대가 마련됩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한 것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포살갈마에서

 

빠띠목카는 단지 의무계율을 모아 놓은 계목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포살일에 의무계율을 합송하며 포살갈마를 함에 따라 죄악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의미도 크다는 것이다. 이는 포살갈마에서 다음과 같은 ‘제안’으로도 알 수 있다.

 

 

“존자들이여, 참모임은 제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만약 참모임에 옳은 일이라면, 참모임은 포살을 해야 하며, 의무계율을 송출해야 합니다. 참모임이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존자들께서는 자신의 청정권리를 알려 주십시오. 저는 의무계율을 송출하겠습니다. 여기 있는 모두는 그것을 잘 듣고 그것에 정신활동을 기울여야 합니다.

 

죄가 있는 자는 밝히고 죄가 없는 자는 침묵하십시오. 그런데 침묵하면, 존자들은 청정권리가 있다고 저는 인정할 것입니다. 한 번 질문할 때마다 대답하는 방식으로, 이와 같은 대중 가운데 세 번까지 선언해야 합니다.

 

만약 수행승이, 세 번까지 선언하는 동안, 기억나는 죄가 있는 데도 밝히지 않으면, 그것은 의도적인 거짓말이 됩니다. 세존께서는 의도적인 거짓말은 장애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승이 청정해지고자 원한다면, 기억나는 죄가 있다면, 죄를 밝히십시오. 밝히면, 평안하게 될 것입니다.(Vin.I.102-103)

 

 

율장대품 포살갈마에 있는 내용이다. 보름마다 한번 포살일에 빠띠목카를 합송하는데 합송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누구든지 죄를 지은 자 있으면 고백하라는 것이다. 죄를 고백하면 마음이 편해질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기 때문에별해탈이라고도 했을 것이다.

 

빠띠목카는 단지 계목만을 말하지 않는다. 죄를 고백하여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빠띠목카라는 것, 그것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의 시초이자, 얼굴이자, 선두이다. 그래서 빠띠목카라고 한다. (Pātimokkhanti ādimeta mukhameta pamukhameta kusalāna dhammāna. Tena vuccati pātimokkhanti.)” (Vin.I.103)라고 하는 것이다.

 

불선법은 끊어 버려야 하고 선법은 성취해야 하고

 

한적한 숲에 머물 수 있는 자격에 대한 것으로 계행뿐만 아니라 배움, 정진, 선정, 해탈에 대한 것이 있다. 이 중에서 정진에 대한 것을 보면 계행과 관련이 있다. 어떤 관련이 있을까? 먼저 정진과 관련된 가르침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버리고 착하고 건전한 것을 성취하기 위해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끊어 버리고 착하고 건전한 것을 성취하기 위해, 견고하고 확고하게 노력하며 착하고 건전한 것에 멍에를 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한다.(A5.110)

 

 

정진에 대한 가르침을 보면 불선법은 끊어 버려야 하고 선법은 성취하라고 했다. 이 말은 법구경 칠불통계게에서 “모든 죄악을 짓지 않고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성취하고” (Dhp.183)라는 구절과 일치한다.

 

불선법을 끊어 버리는 것과 모든 죄악을 짓지 않는 것은 율장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선법을 성취하는 것은 경장에 해당된다. 하지말라고 하는 것은 율장이고, 하라는 것은 경장에 대한 것이다.

 

불선법은 하지 말아야 한다. 선법은 성취해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세 살 먹은 아이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선법이 그렇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착하고 건전한 것을 성취하는 것이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끊는 것 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본래 탐진치의 존재라서

 

나쁜 행위를 하지 않는 것보다 착한 행위를 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율장보다 경장이 더 우선순위가 된다. 경장은 선법을 성취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고, 율장은 불선법을 행하지 말라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불선법을 하지 말라는 것은 수동적인 것으로 하지 않으면 된다. 어린 아이도 할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선법을 행하는 것은 팔십 먹은 노인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인간은 본래 탐, , 치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본래 태어날 때 탐욕, 분노, 미혹의 뿌리가 있는 채로 태어났다. 그래서 마음을 제어하지 않으면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하게 되어 있다. 인간의 마음에는 탐욕의 뿌리, 분노의 뿌리, 미혹의 뿌리가 있기 때문에 착하고 건전한 행위 보다는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에 마음이 가게 되어 있다. 이는 인간이 오취온적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은 본래 악하고 불건전한 존재라고도 볼 수 있다.

 

지금 이렇게 존재하는 것은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온에 집착된 존재이기 때문에 이렇게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악하고 불건전한 것에 마음이 기울이게 될 수밖에 없다. 이는 법구경에서도 확인된다.

 

법구경 ‘마음의 품’을 보면 마음에 대하여 “흔들리고 동요하고 지키기 어렵고 제어하기 어려운 마음”(Dhp.33)이라고 했다. 더구나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앉는 제어하기 어렵고 경망한 마음”(Dhp.35)이라고 했다. 이렇게 마음은 제어하기 힘든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은 오염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음에는 탐, , 치의 뿌리가 있음을 말한다.

 

불선법 끊는 것보다 선법 성취가 더 어려운 것은

 

마음은 탐, , 치의 뿌리로 오염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탐, , 치로 살아 간다. 이것이 세상사람들의 흐름이다. 이처럼 탐, , 치로 살아 가는 사람들에게 부처님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akusala: 不善法)를 하지 말라고 했다. 이는 계율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착하고 건전한 것(kusala: 善法)은 성취해야 된다고 했다. 그런데 불선법을 하지 않는 것보다 선법을 성취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이다.

 

불선법을 하지 말라는 것은 율장에 대한 것이고, 선법을 성취하라는 것은 경장에 대한 것이다. 불선법을 하지 말라는 것은 타율적인 것으로 제재를 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술마시지 말라”와 같은 불음주계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선법을 성취하라는 것은 무탐, 무진, 무치의 삶을 살라는 말과 같다. 술 마시는 것을 하지 않는 것과 무탐무진무치의 삶을 성취하는 것과 어느 것이 더 어려울까? 당연히 후자가 더 힘들다. 어느 정도로 힘들까?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지지 않고, 악한 업을 저지르지 않고, 고통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완전한 청정한 삶을 실천한다면, 수행승들이여, 그를 두고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이라고 한다.(A4.5)

 

 

부처님의 가르침은 역류도이다. 세상 사람들이 탐, , 치로 살아 갈 때 부처님은 무탐, 무진, 무치로 살라고 했다. 이는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 사함빠띠의 청원에 대하여 “흐름을 거슬러 가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미묘한 진리”(S6.1)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흐름을 거슬러 가는(paisotagāmī)” 가르침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흐름과는 반대로 간다. 탐진치의 세상에서 무탐, 무진, 무치의 삶을 살고자 할 때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마치 연어가 흐름을 거슬러 올라 가는 것처럼 상처투성이가 되기 쉽다. 그래서 흐름을 거슬러 올라 가는 사람에 대하여 “얼굴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완전한 청정한 삶을 실천”(A4.5)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율장과 경장에서 상충될 때 우선순위는

 

빠알리 삼장이 있다. 순서는 율경론이다. 율장이 가장 앞서고, 그 다음에 경장이고, 그 다음에 논장이다. 이는 경장이 율장보다 더 앞설 것이라는 예상을 깬다. 이는 결집 순서에 따른 것이다. 율장이 경장보다 먼저 합송되었기 때문이다.

 

율장이 경장보다 순서가 앞선다고 하여 율장의 내용이 경장의 내용보다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율장을 보면 사람들의 적극적 비난으로 인하여 성립되었다. 동료수행승이나 재가불자, 또는 일반사람들이 수행승의 행위를 보고 혐책하고 비난했을 때 계율이 생겨난 것이다. 이런 경우 부처님은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하지말라”라고 했다.

 

수행승이 범계행위를 했을 때 지적할 수 있다. 이를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라는 율장의 조항을 적용한다면 비난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장에서는 그대들은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라고 이와 같이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설명해 주어야 한다.(D1.5)했다. 경장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수행승의 범계행위를 지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된다.

 

율장의 가르침과 경장의 가르침에서 상충이 일어날 때 어느 가르침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할까? 당연히 경장의 가르침이다. 율장의 가르침은 “불선법을 하지말라.”에 대한 것이고, 경장의 가르침은 “선법을 성취하라.”에 대한 가르침이다. 불선법을 하지 않는 것보다 선법을 성취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경장이 율장보다는 우선이다.

 

불선법을 끊는 것보다 선법을 성취하는 것이 더 어렵다. 탐진치의 세상에서 탐진치의 흐름을 멈추는 것보다, 탐진치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 가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다. 이는 착하고 건전한 것에 멍에를 지는 것”(A5.110)과 같다는 가르침으로도 확인된다. 율장과 경장에서 충돌이 일어났을 때 우선 순위는 경장의 말씀이 우선한다고 볼 수 있다.

 

 

2021-05-1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