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참이 신참에게 알려 주어야 할 것은
5월 첫번째 금요니까야강독모임에서 두 번째로 합송한 것은 ‘새내기 수행자에 대한 지침’이다. 앙굿따라니까야 ‘안다까빈다의 경’(A5.114)을 말한다. 안다까빈다(andhakavinda)는 라자가하에서 약 12키로 가량 떨어져 있는 마을이다. 상윳따니까야에도 동일한 이름의 경인 ‘안다까빈다의 경’(S6.13)이 있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새내기 출가자, 즉 신참수행승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법수가 다섯 이기 때문에 다섯 가지 당부사항이 있다. 그것은 계행, 감관, 과묵, 한처, 정견에 대한 것이다.
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첫째, 계행에 대한 것이다. 이는 의무계율을 수호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출가승은 빠띠목카라 불리는 의무계율을 수호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 “벗이여, 오라. 그대들은 계행을 지키고 의무계율을 수호하고 올바른 행위의 계행을 갖추어 사소한 잘못에서도 두려움을 보고 지켜야할 학습계율을 수용하여 배우라.”(A5.114)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행과 관련하여 ‘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본다’라는 구절이 있다. 전재성 선생은 이 구절이 계행에서 가장 핵심이라고 했다. 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아마도 ‘무한청정적 계율’을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
계율은 수범수제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승단이 형성되고 나서 계율도 제정되었다. 초기에는 계율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면 성자의 흐름에 들고 아라한이 되었기 때문에 별도로 계율이 필요 없었다. 준비된 수행자들이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문제가 발생했다. 여법하지 않은 행위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비난했을 때 그때 마다 계율이 만들어 졌다. 그렇게 만들다 보니 갈수록 많아 졌다. 율장이 방대해진 이유에 해당된다. 그렇다고 무한정 계율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만들다 보면 번뇌의 숫자만큼 계율도 많아질 것이라고 한다.
무한정 계율을 만들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청정한 삶 을 사는 것이다. 탁발과 무소유에 의존하는 삶이 가장 이상적이다. 또한 자신의 행위를 보아야 한다. 그래서 ‘사소한 잘못에서도 두려움을 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무한청정적 계율은 지켜질 것이다.
어떻게 감관을 수호할 것인가
둘째, 감관수호에 대한 것이다. 이는 오욕락을 경계하는 것이다. 눈, 귀, 코, 혀, 몸으로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먼저 출가한 수행승들은 신참들에게“벗이여, 오라. 그대들은 감관의 문을 수호하고, 수호를 새기고, 새김을 신중히 하고, 정신을 수호하여, 새김을 마음의 수호자로 삼으라.”라고 말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재성 선생은 감관의 수호에 대하여 성문의 문지기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성문으로 본 것이다. 성문지기가 성문을 지키는데 소홀히 하면 어떻게 될까? 도적들이 침입할 것이다. 성문지기가 한눈 팔고 있으면 도적들이 제집 드나들 듯할 것이다.
부처님은 감관수호에 대하여 극단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비유로서 말씀했다. 상윳따니까야 ‘연소의 법문에 대한 경’을 보면 시각기관 수호에 대해서는 “연소하고 작열하고 불꽃 튀는 뜨거운 쇠바늘로 시각기관을 차라리 지질지언정, 시각으로 인식되는 형상의 인상과 속성에 사로잡히지 말라.”(S35.235)라고 했다.
청각기관은 어떤 표현을 사용했을까? 이는 “뜨거운 쇠막대로 청각기관을 차라리 지질지언정”이라는 표현으로 알 수 있다. 후각은 “날카로운 손톱칼로”라고 했고, 미각은 “뜨거운 면도칼로”라고 했고, 촉각은 “뜨거운 칼로”이라고 했다. 이처럼 극단적인 표현을 한 것은 악처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감각을 즐길 때 갑작스럽게 죽는 것에 대하여 “그 순간에 죽는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두 가지 운명 가운데 하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S35.235)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감각기관 수호에 대한 가르침을 보면 율장에서는 좀 더 노골적이다. 율장비구계에서 성적교섭에 대한 가르침을 보면 “어리석은 자여, 오히려 맹독을 지닌 독사뱀의 아가리에 그대의 성기를 집어넣을지언정, 결코 여인의 성기에 집어넣지 말라.”(Vin.III.20)라고 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왜 이렇게 극단적인 표현을 해가며 훈계했을까? 이는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어리석은 자여, 그것을 인연으로 죽음에 이르거나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 때문에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Vin.III.20)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알 수 있다.
오욕락을 즐기는 것이 고통인줄 알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초기경전 도처에서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것이 고통이고 더 나아가 재난이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시각은 무상하다, 형상도 무상하다, 시각의식도 무상하다, 시각접촉도 무상하다.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역시 무상하다.”(S35.235)라고 말씀하셨다.
과묵해야 하는 이유
셋째, 말을 적게 하는 것이다. 묵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신참들에게“벗이여, 오라. 그대들은 말을 적게 하고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제한하라.”라고 말해 줄 수 있어야 함을 말한다.
말을 적게 하는 것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말을 많이 하면 나사가 풀린 것처럼 감관도 풀리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말을 많이 했을 때 감각기관이 수호되지 않음을 말한다.
말은 언어적 형성과 관련된 것이다. 그런데 말로 인하여 신체적 형성과 정신적 형성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부처님이 신업, 구업, 의업, 이렇게 삼업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예로 들어서 설명했다.
나의 행위는 크게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언어적 행위의 조절에 실패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는 신체적 형성과 정신적 형성에 영향을 주게 된다. 신체적 행위를 통제하지 않으면 언어적 형성과 정신적 형성에 영향을 준다. 정신적 행위를 통제하지 않으면 신체적 형성과 언어적 형성에 영향을 준다. 이는 열 가지 악행(十惡行)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렇게 세 가지는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다.
한처에 처소를 마련하는 것은
넷째, 한처에 처소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구참수행승은 “벗이여, 오라. 그대들은 한적한 숲에 사는 자로서 한적한 숲의 외딴 곳에 처소를 마련하라.”(A5.114)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신체의 멀리 떠남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단지 숲속에서 산다면 두타행이 된다. 그러나 숲속에 처소를 마련하는 것은 두타행이 아니다. 부처님은 왜 한적한 숲속에 처소를 마련하라고 했을까?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수행승들이여, 이것들이 나무 밑이다. 이것들이 텅 빈 집이다. 선정을 닦아라. 방일하지 말라.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하라. 이것이 너희들에게 주는 가르침이다.”(S43.1)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또한 “수행승이 숲으로 가고 나무 밑으로 가고 한가한 곳으로 가서 앉아 가부좌를 틀고”(M10.5)라는 가르침도 있다.
숲으로 가는 것은 선정을 닦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선정을 닦으면 지혜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는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Dhp.372)라는 법구경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불교적 지혜를 말한다.
불교적 지혜는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아는 것이다. 선정에 들어서 있는 그대로 알고 보았을 때 불교적 지혜가 생겨난다. 그래서 숲으로 들어가 선정을 닦으라고 했을 것이다.
한처에 있는 것에 대하여 “신체의 멀리 떠남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몸의 은둔에 유념하도록 해야 하며”라고 번역했다. 번역차이가 난다. 원문을 찾아보았다. 원문을 보니 “kāyavūpakāse”로 되어 있다. 이 말은 ‘kāya’와 ‘ūpakāsa’의 결합어이다. 빠알리어 ‘ūpakāsa’는 ‘estrangement, alienation, separation, seclusion’의 뜻이다. 몸과 마음에서 몸을 분리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선정에서 가능하다.
신체에서 멀리 떠난다는 것은
우리 몸과 마음은 신체적 형성, 언어적 형성, 정신적 형성으로 되어 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까마부의 경’에서 “장자여, 들이쉬고 내쉬는 숨이 신체적 형성이고, 사유와 숙고는 언어적 형성이고, 지각과 느낌은 정신적 형성입니다.”(S41.6)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까마부의 경에 따르면 언어적 형성에 해당되는 사유(vitakka 와 숙고(vicārā)는 두 번째 선정에서 사라진다. 이는 “사유와 숙고가 멈추어진 뒤, 내적인 평온과 마음의 통일을 이루고, 사유와 숙고를 여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S45.8)라는 두 번째 선정 정형구에서도 알 수 있다.
신체적 형성은 언제 사라질까? 호흡(āṇāpana)은 네 번째 선정에서 사라진다. 그래서 “행복도 고통도 끊어져서, 이전의 기쁨도 근심도 사라진 뒤,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지극히 청정한 네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S45.8)라고 했다. 여기서 키워드는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지극히 청정함(upekhā-sati-pārisuddhiṃ)”이다. 이 상태는 호흡이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몸이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정신적 형성은 언제 사라질까? 이는 정신적 형성에 해당되는 지각(saññā)과 느낌(vedanā)은 멸진정에 들 때 사라진다. 지각과 느낌이 사라진 상태에 대하여 정신적 형성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열반에 들면 지각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다고 말한다. 다만 비유로서 표현될 뿐이다.
부처님이 새내기 수행승들에게 한처에게 가라고 한 이유는 다름 아닌 선정에 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선정에 들어서 언어적 형성이 사라지고 신체적 형성이 사라졌을 때 지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한적한 숲속에서 수행승은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기 위하여,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고 정진해야 한다.”(A5.77)라고 말씀했을 것이다.
올바로 볼 줄 알아야
다섯째, 올바른 견해이다. 구참수행승들은 새내기 수행승들에게 “벗이여, 오라. 그대들은 올바른 견해를 지니고 올바른 세계관을 성취하라.”라고 말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올바른 견해를 뜻하는 빠알리어는 ‘sammādassana’이다. 바르게 보는 것을 말한다. 이는 아는 것과 다르다.
아는 것(知)은 주로 냐나(ñāṇa)라는 말을 사용하고, 보는 것(見)은 닷사나(dassana)라는 말을 사용한다. 아는 것은 머리로서 이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고, 보는 것은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은 아는 것과 보는 것을 모두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현상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알고 보라고 했다. 이를 ‘야타부따냐나닷사나(yathābhūtañāṇadassana)’라고 하고, 한자어로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 한다.
두 가지 정견이 있는데
올바르게 볼 줄 알아야 올바른 세계관을 갖는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정견에 대하여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업과 업보의 세속적 정견이 있고, 또 하나는 사성제의 출세간적 정견이 있다고 했다. 정견이라고 하여 사성제를 아는 것만이 정견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두 가지 정견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맛지마니까야 ‘커다란 마흔의 경’(M117)에 따르면, 세속적 정견에 대하여 “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견해이다.”(M117)라고 했다. 이는 “보시에는 공덕이 있다. 제사의 공덕도 있다. 공양의 공덕도 있다. 선악의 과보도 있다.”(M117)라고 보는 견해를 말한다. 이른바 업과 업보의 법칙이다. 그래서 번뇌가 있는 정견을 세속적 정견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업자성정견 (kammassakattā sammādiṭṭhi)’이라고 한다.
출세간적 정견은 사성제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고 고귀한 길의 경지에 드는 올바른 견해이다.”(M117)라고 했다. 왜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했을까? 사향사과의 성자들의 정견이기 때문이다. 이는 “거룩한 길을 성취한 자에게 거룩한 길을 닦은 결과로서 지혜”(M117)가 생겨나는 것으로 설명된다.
팔정도를 닦으면 출세간적 정견이 성취된다. 팔정도에서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속에서도 정견은 성취된다. 업과 업보를 믿으면 세간적 정견이 있음을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은 체계적
어느 모임이나 단체에서든지 신참자들은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잘 인도해 주어야 한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구참자들이 신참자들을 대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모두 다섯 가지로서 계행에 대한 것, 감관에 대한 것, 과묵에 대한 것, 한처에 대한 것, 그리고 올바른 견해를 갖는 것에 대하여 알려 주라고 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다섯 가지를 분석해 보면 계, 정, 혜 삼학에 대한 것이다. 사소한 잘못에도 두려움을 가지라는 것은 무한청정적 계율을 지키라는 것을 말한다. 감관의 문을 수호하고 말을 적게 하고 한처에 들어 가라고 말한 것은 정학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이 계학과 정학의 기반이 마련되었을 때 바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혜학에 대한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 가르침은 체계적이다.
2021-05-2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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