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혐오와 비혐오의 중도

담마다사 이병욱 2021. 6. 9. 12:10

혐오와 비혐오의 중도

 

 

언제나 그렇듯이 니까야를 접하면 희열을 느낀다. 이를 빠알리어로 삐띠(pīti)라고 한다. 몰랐던 것을 아는 것이 가장 크다. 이런 가르침이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5월 두 번째 금요니까야강독모임에서 두 번째로 합송한 경은 교재 생활속의 명상수행 21번 경이다. 제목은 탐욕을 일으키지 않고 성냄을 일으키지 않는 수행법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띠깐다끼의 경’(A5.144)에 해당된다.

 

띠깐다끼의 경에서

 

부처님 가르침은 접하면 접할수록 매력적이다. 매료되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을 접하기 때문이다. 띠깐다끼의 경에서 다섯 가지 경우에 대한 것도 그렇다. 다섯 가지 법수에 대하여 요약되어 있는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때로는 비혐오적인 것에서 혐오적인 것을 지각한다면 옳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때로는 혐오적인 것에서 비혐오적인 것을 지각한다면 옳다. 수행승이 때로는 비혐오적인 것과 혐오적인 것에서 혐오적인 것을 지각한다면 옳다. 수행승이 때로는 혐오적인 것과 비혐오적인 것에서 비혐오적인 것을 지각한다면 옳다. 수행승이 때로는 비혐오적인 것과 혐오적인 것에서 그 양자를 피하고 평정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린다면, 옳다.”(A5.144)

 

 

참으로 난해하다. 비혐오적인 것과 혐오적인 것 두 가지에 대해서 네 가지 경우의 수가 나온다. 여기에 양자를 피하면 법수가 다섯 가지가 된다. 전재성선생의 설명에 따르면 이와 같은 가르침은 이 경전에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법수가 다섯 가지이기 때문에 다섯 가지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의 특징이다. 그래서 법수가 높아질수록 경전의 길이도 길어진다.

 

매혹적인 대상에서 혐오를

 

첫째, 비혐오적인 것에서 혐오적인 것을 지각하는 것이다. 이는 무슨 뜻일까? 다음 구절에 설명이 되어 있다. 이는탐욕을 일으키는 대상에서 탐욕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이다.”(A5.144)라는 가르침을 말한다. 참으로 난해한 말이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주석을 보아야 한다. 주석에서는 원하는 대상(예를 들어 여자의 육체나 맛있는 음식 등)에 대하여 부정(不淨), 무상, 혐오의 지각을 일으키는 것이다.”(Mrp.III.290)라고 설명되어 있다.

 

여자의 육체는 매혹적인 것이다. 맛있는 음식 역시 매혹적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비혐오적인 것이라고 했다. 매혹적인 것은 비혐오적인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매혹적인 대상에서 혐오를 보라고 했다. 이런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부처님은 왜 여자의 육체나 맛있는 음식처럼 매혹적인 대상에서 혐오를 보라고 했을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음식을 예를 들어 방부제를 들고 있다. 먹음직한 음식은 대부분 방부제를 쓰고 있는데, 이는 비혐오에서 혐오를 보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독버섯이 있다. 겉보기에는 아름답다. 그러나 따 먹으면 배탈이 나고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 매혹적이라고 하여 탐욕을 일으키면 독으로 죽을 수 있다. 그래서 전재성선생은 아름다운 것에는 독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장미가 아름답다고 하여 덜컥 잡으면 가시에 손이 찔린다. 매혹적인 아름다움에는 치명적인 독이 있음을 말한다. 이는 탐욕에는 독이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탐, , 치에 대하여 삼독이라고 했다.

 

원한 맺힌 자에게 자애의 마음을

 

둘째, 혐오적인 것에서 비혐오적인 것을 지각하는 것이다. 이는 이어지는 가르침에서 성냄을 일으키는 대상에서 성냄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이다.”(A5.144)라고 했다.

 

혐오적인 것에서 비혐오적인 것을 지각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 주석을 보면 원하지 않는 대상(예를 들어 원한이나 증오나 복수의 대상 등)에 대해 자애(metta)를 방사하거나 또는 세계의 구성요소(dhatu)일 뿐이라는 지각을 일으키는 것이다.”(Mrp.III.290)라고 설명해 놓았다.

 

혐오적인 대상은 원한 맺힌 자가 될 수 있다. 내 돈을 떼 먹고 달아난 자를 생각했을 때 분노가 일어날 것이다. 이런 원수는 혐오의 대상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혐오자에게 성냄을 일으키지 말라고 했다. 이는 원한 맺힌 자에게 자애의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원수에게 어떻게 자애의 마음을 낼 수 있을까? 예수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했다. 어떻게 보면 부처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원수를 사랑한다고 사랑의 마음이 일어날까? 그런 마음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단계적으로 자애를 설명했다.

 

처음부터 원한 맺힌 자에게 자애의 마음을 낼 수 없다. 먼저 가장 가까운 대상에게 자애의 마음을 내야 한다. 가장 가까운 대상은 자기자신이다. 자기자신을 사랑하면 남도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자신 다음으로 가까운 사람에게 자애의 마음을 내야 한다. 자신의 부모나 형제, 자식들이 이에 해당된다. 출가자라면 은사스님이나 동료수행자가 될 것이다. 어떻게 자애의 마음을 내는가? 이는 자애경에 있는 것처럼 삽베 삿따 바완뚜 수키땃따라며,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라고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자애의 마음은 자신부터 시작하여 나와 가까운 사람, 그리고 나와 무관한 사람 순으로 자애의 마음을 내야 한다. 이렇게 자애의 마음을 내었을 때 나의 마음은 자애의 마음으로 충만할 것이다. 우주 끝까지 자애의 마음을 내었을 때 원한맺힌 자에게도 자애의 마음을 낼 수 있다. 그래서 원수는 가장 마지막에 자애의 마음를 내는 것이다.

 

만일 원한 맺힌 자를 가장 먼저 자애의 마음을 내게 되면 역효과가 날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한 증오의 마음만 커져 간다. 그래서 원수에 대한 자애의 마음을 낼 때에는 나자신에서부터 시작하여 가까운 사람, 무관한 사람, 원한 맺힌 사람 순으로 자애의 마음을 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혐오적인 것에서 비혐오적인 것을 지각하는 것이 될 것이다.

 

원수를 오온 보듯이 하면

 

자애의 마음을 내었음에도 계속 혐오가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주석에서는 세계의 구성요소(dhatu)일 뿐이라는 지각을 일으키라.”고 했다. 이런 방식은 청정도론 자애수행편에 실려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만약 이와 같이 해도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다면, 이와 같이 세계를 분석해야 한다. 어떻게 하는가? “이보게 출가자여, 그대가 그에게 화를 내면서 누구에게 화를 내는가? 머리카락에 화를 내는가? 아니면 몸털에, 손발톱에 내지 오줌에 화를 내는가? 또는 머리카락 등의 땅의 세계에 화를 내는가? 또는 물의 세계에, 불의 세계에, 바람의 세계에 화를 내는가? 또는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 열두 가지 감역, 열여덟 가지 인식의 세계에 의지하여 이 존자는 이러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그것들 가운데 물질의 다발에 화를 내는가? 아니면 느낌의 다발에, 지각의 다발에, 형성의 다발에, 의식의 다발에 화를 내는가?”(Vism.9.38)

 

 

우리 몸과 마음은 오온으로 되어 있다. 내가 그 사람을 증오하지만 그 사람은 실체가 없다. 있다면 그 사람의 오온이 있다. 그 사람의 오온에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게 화를 내는 것이다.

 

오온으로 분리된 것에는 실체가 없다. 오로지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만 있을 뿐이다. 실체도 없는 대상에게 화를 내고 증오하고 적대감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세계(dhatu)를 분석하면 송곳 끝의 겨자씨처럼 허공의 그림자처럼 분노는 발판을 잃는다.”(Vism.9.38)고 했다.

 

탐욕은 부정관으로, 성냄은 자애관으로

 

셋째, 비혐오적인 것과 혐오적인 것에서 혐오적인 것을 지각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경에서는 탐욕을 일으키는 대상에서 탐욕을 일으키지 않고, 성냄을 일으키는 대상에서 성냄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이다.”(A5.144)라고 했다.

 

탐욕과 성냄은 혐오적인 것이다. 탐욕의 대상을 부정과 무상으로 본다면 탐욕이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성냄의 대상에 대하여 자애로 본다면 성냄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혐오적 대상에서 비혐오를 본다는 것은 혐오를 지각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탐욕에 빠지지 않고 분노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탐욕의 대상을 혐오적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정관을 닦아야 한다. 이는 우다나 메기야의 경에서 부처님이 탐욕의 제거를 위해서 부정을 닦아야 한다.”(Ud.34)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혐오의 대상에 대해서는 자애관을 닦아야 한다. 역시 우다나에서 분노의 제거를 위해서 자애를 닦아야 한다.”(Ud.34)라고 했다.

 

혐오스러운 탐욕과 분노는 부정관과 자애관을 닦으면 비혐오적인 것으로 된다. 그래서 비혐오적 대상이든 혐오적 대상이든 부정관과 자애관을 닦으면 혐오적 지각을 하게 되어서 더 이상 탐욕과 분노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탐욕과 성냄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

 

넷째, 혐오적인 것과 비혐오적인 것에서 비혐오적인 것을 지각하라고 했다. 경에서는 성냄을 일으키는 대상에서 성냄을 일으키지 않고 탐욕을 일으키는 대상에서 탐욕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이다.”(A5.144)라고 했다. 이와 관련된 주석은 보이지 않는다.

 

혐오적인 대상에 대하여 혐오적인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은 비혐오적인 것을 지각하는 것이 된다. 이는 세 번째 항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다만 성냄을 앞에 놓고 탐욕을 뒤로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탐욕과 성냄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탐욕이 있는 곳에 성냄이 있고, 성냄이 있는 곳에 탐욕이 있다. 중생들의 삶이 그렇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은 탐역과 성냄이 독과 같은 것임을 안다. 욕심을 내면 낼수록, 화를 내면 낼수록 독이 퍼져 치명상을 입게 될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혐오에서 비혐오를 보고, 비혐오에서 혐오를 보는 수행을 해야 할 것이다.

 

전재성선생은 혐오에서 비혐오를 보는 것에 대하여 똥에서 거름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똥은 혐오스런 것이지만 땅에 뿌리면 비료가 되기 때문에 비혐오가 되는 것이다. 반면 비혐오에서 혐오를 보는 것에 대하여 맛있는 음식에서 독이 들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맛있는 음식을 탐할수록 점점 몸에 독이 퍼져 나가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 현대 모든 질병은 맛있는 것을 탐하는 것에서 발생되기 때문이다.

 

혐오와 비혐오의 중도

 

다섯째, 비혐오적인 것과 혐오적인 것에서 그 양자를 피하고 평정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탐욕을 일으키는 대상에서 어느 때이든지, 어떠한 곳에서든지, 어떻게 해서든지 탐욕을 일으키지 않고, 성냄을 일으키는 대상에서 어느 때이든지, 어떠한 곳에서든지, 어떻게 해서든지 성냄을 일으키지 않고, 어리석음을 일으키는 대상에서 어느 때이든지, 어떠한 곳에서든지, 어떻게 해서든지 어리석음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이다.”(A5.144)

 

 

비혐오적인 것과 혐오적인 것을 피하려면 언제 어느때이든지 탐, , 치를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실천은 쉽지 않다.

 

경에서는 비혐오적인 것과 혐오적인 것을 양자라고 했다. 이는 양극단을 말하는 것과 같다. 혐오적인 것이 있다면 비혐오적인 것이 있고, 비혐오적인 것이 있으면 혐오적인 것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어느 것에도 머물지 말라는 것이다.

 

양극단을 피하는 것은 중도의 가르침과 같다. ‘초전법륜경’(S56.11_에서는 고락중도를 설했다. 그래서 팔정도를 닦으라고 했다. 팔정도를 닦는다는 것은 결국 탐진치의 소멸을 뜻한다.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0에서는 유무중도를 설했다. 상견과 단견을 극복하려면 연기의 가르침을 알아야 함을 말한다.

 

비혐오와 혐오의 양자를 피하는 것은 중도와 같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KPTS(한국빠일리성전협회)본 번역서를 보면 청정도론 437페이지를 참조하라고 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청정도론 14장 존재의 다발을 보면 지각과 의식과 지혜에 대한 비유가 있다. 이 세 가지는 공통적으로 에 대한 것이지만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어떻게 다른가? 지각에 대해서는 단지 푸르다, 노랗다등으로 대상을 지각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의식에 대해서는 푸르다, 노랗다등으로 알 뿐 만아니라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다고 세 가지 특징을 꿰뚫어 볼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실천이 없다면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될 것이다. 지혜에 대해서는 특징을 꿰뚫어 볼 뿐만 아니라 실천해서 행도가 구현된 것을 말한다. 지혜는 수행을 하여 세 가지 특징을 체험으로 아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었다.

 

 

예를 들어, 은행가의 탁자위에 놓인 까하빠나 뭉치를 아직 분별 없는 한 어린 아이, 한 마을 사람, 한 은행가의 세 사람이 본다면, 아직 분별이 없는 어린아이는 까하빠나가 다양한 색채, 길고 짧음, 둥글고 네모짐의 상태만을 안다. ‘이것이 사람들이 즐기고 향락할 수 있는 보물인 것이다.’라고 알지 못한다.

 

마을사람들은 다양한 색채 등을 알고 이것이 사람들이 즐기고 향락할 수 있는 보물인 것이다.’라고 알지만, ‘이것은 진짜이고, 이것은 가짜이고, 이것은 반쯤 가짜이다.’라고 그 차이를 알지 못한다.

 

은행가는 그러한 일체의 유형을 안다. 알 때는 까하빠나를 보기만 해도 알고, 부딪칠 때 소리만 들어도 알고, 냄새를 맡아도 알고, 맛을 보아도 알고, 손으로 들어 보아도 안다. 어떠한 마을이나 부락이나 도시나 산이나 강언덕에서 만들었는지도, 어떠한 장인이 만들었는지도 안다. 이와 같이 비유를 적용할 수 있다.”(Vism.14.4)

 

 

여기 지폐가 있다. 어린아이는 단지 지폐가 있다는 것과 색깔 정도 아는 것에 그칠 것이다. 어른이 지폐를 본다면 지페의 금액을 보고서 지폐의 가치에 대해 알 것이다. 그런데 은행가가 보면 지폐가 위조인지 아닌지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똑 같은 앎에 대한 것이지만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공통적으로 에 대한 것이지만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어떻게 다른가? 지각에 대해서는 단지 푸르다, 노랗다등으로 대상을 지각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의식에 대해서는 푸르다, 노랗다등으로 알 뿐 만아니라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다고 세 가지 특징을 꿰뚫어 볼 수 있음을 말한다. 지혜는 행도가 구현된 것을 말한다. 지혜의 단계가 되면 꿰뚫어 아는 것이 된다. 그래서 혐오와 비혐오를 피하게 된다. 혐오와 비혐오에 대한 중도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르침을 아는 것은 신통방통한 것

 

흔히 신통방통하다는 말을 한다. 어린 아이가 장난치고 놀기만 하다가 방안에서 공부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신통방통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매우 대견하고 칭찬해 줄 만하다.”라는 뜻이다. “어린 것이 벌써 한글을 읽으니 신통방통하구나!”라고 말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는 것은 신통방통한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다섯 가지 법수는 고귀한 신통에 해당된다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지혜에 대한 것이다. 대상이 혐오적인 것이든 비혐오적인 것이든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자는 매혹적 대상이나 혐오적 대상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이는 대상의 속성을 잘 파악했기 때문이다. 혐오적 대상에서 비혐오적 특징을 볼 수 있고, 비혐오적 대상에서 혐오적 특징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어느 것에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다.

 

대상에 흔들리지 않는 것은 대상을 무상, , 무아로 보는 통찰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삼매에 들면 수행승은 있는 그대로 분명히 그대로 안다.”(S22.5)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일상에서 늘 혐오적 대상과 비혐오적 대상을 접한다. 그러나 물질의 발생과 소멸, 느낌의 발생과 소멸 등 오온의 발생과 소멸을 있는 그대로 알면 혐오적 대상과 비혐오적 대상 양자를 피하게 될 것이다. 이를 혐오비혐오중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21-06-0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