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적 재산 보다도 정신적 재산이 더
6월 온라인줌 금요니까야강독모임이 11일 열렸다. 이번 모임으로 전반기 모임은 마지막이 되었다. 다음 모임은 9월에 열릴 예정이다. 전재성선생이 미국에 가게됨에 따라 3개월동안 방학이라고 볼 수 있다.
모임은 모여야 성립된다
어떤 모임이든지 모여야 모임이 성립된다. 그래서 모임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모이지 않으면 모임이 성립되지 않는다. 실제로 그런 적이 있었다. 불과 두세 명 남았을 때 모임이라고 하기가 민망할 정도가 된다. 최소한 다섯 명 이상은 모여야 하지 않을까?
니까야모임은 무미건조하다. 경을 읽고, 설명을 듣고, 질의응답을 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다 보니 한두 번 나오는 것으로 그친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럼에도 꾸준히 나오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모임이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모임이 5년동안 유지되고 있는 것은 전재성선생의 영향이 크다. 사람들이 오건 말건, 빠지건 말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아마 단 한사람이 남아도 그 한사람을 위해서 설명을 해 줄 것이다.
현재 모임은 2017년 2월부터 시작되었다. 그때 당시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모임의 가치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삼장을 꿰뚫고 있는 설명자로부터 한마디한마디는 새겨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 항상 노트하는 이유가 된다.
보시를 하면 보시의 과보가
6월 모임에서 두 개의 경을 합송했다. 하나는 ‘참사람의 보시는 어떤 것인가?’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전도된 말에는 어떠한 종류가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첫번째 합송은 경은 앙굿따라니까야 ‘참사람의 보시에 대한 경 (sappurisadānasutta)’(A5.148)이다. 다섯 가지 법수가 있다. 믿음으로 보시하고, 정중하게 보시하고, 바른 때에 보시하고, 아낌없이 보시하고, 자타를 해치지 않고 보시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연기법이다. 그런데 연기법은 ‘조건법’이라는 것이다. 왜 조건법인가? 이는 연기를 뜻하는 빠알리어 빠띳짜사뭅빠다(paṭiccasamuppāda)를 보면 알 수 있다. 조건하여(paṭicca) 함께 발생하는 것(samuppāda)을 의미한다. 이를 줄여서 ‘조건발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연기법 구조는 조건발생으로 되어 있다.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고 (Saṅkhārapaccayā viññāṇaṃ)”라는 식이다. 보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보시가 되느냐에 따라 결과도 달라진다.
어느 보시를 하든지 공통적인 결과가 있다. 그것은 “부유해지고, 재산이 많아지고, 재보가 많아진다.”(A5.148)라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보시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보시의 과보에 대하여 잘 모르는 것 같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지갑에서 만원짜리 한장 나가는 것도 마치 자신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까워한다. 아마 평생 살아도 보시한번 제대로 해보지 않은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보시가 커다란 과보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보시하기를 즐겨할 것이다. 더구나 보시를 하면 “부유해지고, 재산이 많아지고, 재보가 많아진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보시는 결국 자기자신에게 하는 것이 된다.
빠빠(papa)와 뿐냐(puñña)에 대하여
보시를 할 때는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할까? 큰 이익을 기대하며 보시한다면 악행이 된다. 마치 뇌물을 주고서 결과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정치헌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악행이 있다면 공덕행도 있을 것이다. 이익을 바라고 주는 행위는 악행이 된다. 초기경전에서는 이러한 악행을 빠알리어로 빠빠(papa)라고 한다. 이와 대비되는 말은 공덕행이라고 하는데 빠알리어로 뿐냐(puñña)라고 한다.
빠빠와 뿐냐는 늘 함께 쓰인다. 악행과 공덕행을 대조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마치 악행을 뜻하는 아꾸살라(akusala)와 선행을 뜻하는 꾸살라 (kusala)가 늘 함께 쓰이는 것과 같다.
빠빠와 뿐냐는 세간적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쓰이는 말이다. 반면 출세간적 삶에 대해서는 아꾸살라와 꾸살라가 함께 쓰인다.
세간적 삶을 사는 사람들은 공덕행을 해야 한다. 이는 모종의 장기적 기대를 뜻한다. 스님들께 공양하며 천상에 나기 바라는 것과 같다. 이처럼 약간의 선행을 하는 것에 대하여 윤회하는 삶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꾸살라는 이와 다르다.
꾸살라는 출세간의 삶에서 건전하고 지혜로운 행위를 뜻한다. 이를 부처나 아라한의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깨달은 자의 행위는 꾸살라행인 것이다.
빠빠와 아꾸살라는 악행이라는 측면에서 크게 차이가 없다. 이는 뿐냐와 꾸살라의 뜻이 크게 차이나는 것과 대조적이다. 빠빠행이든 아꾸살라행이든 악한 행위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뿐냐는 세속적인 것이고, 꾸살라는 출세간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뿐냐는 윤회하는 삶속에서 이해되어야 하고, 꾸살라행은 해탈을 추구하는 삶속에서 이해 되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초기경전에서 공덕을 뜻하는 뿐냐와 지혜로운 행위를 뜻하는 꾸살라행을 구별해서 사용했다.
윤회하는 삶 속에서 보시공덕은
경에서 언급된 보시에 대한 다섯 가지는 뿐냐, 즉 공덕행에 대한 것이다. 윤회하는 삶을 살고 있는 세속 사람들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다섯 가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믿음으로 보시하면, 최상의 용모를 갖추게 된다.
둘째, 정중하게 보시하면, 사람들이 믿고 따른다.
셋째, 바른 때 보시하면, 재산이 많이 들어온다.
넷째, 아낌없이 보시하면, 오욕락을 누릴 수 있다.
다섯째, 해침없이 보시하면, 약탈당하지 않는다.
다섯 가지 보시공덕이 있다. 이 중에서 다섯 번째 해치지 않고 보시하면 빼앗기기 않는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일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사람이 참으로 자신과 타자를 해치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보시가 열매를 거둘 때마다, 부유해지고 재산이 많아지고, 재보가 많아진다. 그리고 그의 재산이 불이나 왕이나 도둑이나 사랑스럽지 않은 상속자에게 약탈당하지 않는다.”(A5.148)
자신과 타자를 해치지 않고 보시하라고 했다. 이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덕성을 해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가족이나 친지, 친적, 친구의 덕성을 해치지 않는 것임을 말한다. 하나의 예로서 어린 아이에게 사탕 주는 것을 들었다.
어린 아이에게 사탕을 주면 어린 아이는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많이 주면 곤란하게 된다. 이빨이 썩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을 위한다고 맛있는 것을 많이 먹게 되었을 때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는 자신을 해치는 것이 된다. 이런 예는 자식에 대한 사랑에서도 나타난다.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 주었을 때
육년전의 일이다. 그때 당시 작은 법회모임의 총무를 맡고 있었다. 경상도 공업도시에 사는 A법우님을 찾아 간 적이 있었다. 스님 한분과 두 분의 법우님과 함께 갔었다.
A법우님은 잘 살았다. 마치 타워팰리스처럼 생긴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런데 하나 밖에 없는 딸을 위해서 타워펠리스처럼 생긴 아파트를 결혼선물로 주었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챙겨주는 것은 아름다운 마음임에 틀림없다. 재산이 많아서 아파트를 사 줄 정도의 경제력이 있다면 자식은 복받았다고 볼 수 있다. 평생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정도로 부모가 챙겨 주었을 때 천상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자녀의 자립의지를 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모 재산만을 바라보고 사는 자녀가 있을 수 있다. 그럴 경우 자립의지가 없을 것이다. 애쓰고 살지 않아도 부모의 재산만 물려 받으면 쉽게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어린 아이에게 사탕을 물려주는 것과 같다.
자식들에게는 재산을 물려줄 것이 아니라 삶의 지혜를 물려주어야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자립이다. 그럼에도 마치 어린아이에게 사탕주듯이,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주고자 했을 때 자녀는 부모의 재산만 바라보고 살 것이다. 심지어 부모가 일찍 죽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뉴스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희망을 포기한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는 아파트도 살 수 없고 성공할 수 있는 기회도 없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가 63세 때 죽으면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부모의 유산을 차지하여 편하게 살고 싶은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은 보시를 해도 자신과 타자를 해치지 않고 보시를 하라고 했다. 자녀에게 아파트를 사주고 가진 재산을 물려주고자 할 때 이는 자신도 해치고 자식도 해치는 것이 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은 죽어서 가지고 가지 못한다. 살아 생전에 모은 재산도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른다. 불이 나서 다 타버릴 수도 있고, 도둑이 가져 갈 수도 있다. 국가에서 재산을 몰수해 갈 수도 있다. 이는 “상속받을 아들이 없으므로 내가 그의 유산을 몰수하여 왕궁으로 가져다 놓고 왔습니다.”(S3.19)라는 경전적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가장 뼈 아픈 것은 악의적인 상속자에게 빼앗기는 것이다.
물질적 재산 보다도 정신적 재산이 더
재산은 올바르게 사용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러한 재산들이 올바로 사용되지 않으면 국왕에게 몰수되고, 도적에게 빼앗기고, 불에 타고, 물에 떠내려가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상속인에게 박탈당하게 됩니다.”(S3.19)라고 했다.
전재성 선생은 물질적 재산 보다도 정신적 재산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진정한 재물은 정신적 재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일곱 가지 재물이 있다. 일곱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믿음의 재물, 계행의 재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재물, 배움의 재물, 보시의 재물, 지혜의 재물이 있다.”(A7.6)
재물이라 하여 물질적 재물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정신적 재물도 있다는 것이다. 믿음의 재물(saddhādhanaṃ), 계행의 재물(sīladhanaṃ),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재물(hiri ottappiyaṃ dhanaṃ), 배움의 재물(sutadhanaṃ), 보시의 재물(cāgadhanaṃ), 지혜의 재물(paññādhanaṃ)을 말한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일곱 가지 재물은 불멸의 재물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일곱 가지 재물은 불이나 물이나 왕이나 도둑이나 원하지 않는 상속자에 의해서 약탈될 수 없는 것입니다.”(A7.7)라고 했다.
일곱 가지 정신적 재물은 잃어버릴 수도 없고, 빼앗길 수도 없고, 도둑맞을 수도 없고, 상속자가 가져갈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재물에 대하여 칠성재(七聖財), 즉 고귀한 일곱 가지 재물이라고 한다.
“믿음의 재물, 계행의 재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재물,
배움의 재물, 보시의 재물,
일곱 번째로 지혜의 재물이 있네.
여인이나 남자에게
이러한 재물이 있다면,
그는 빈궁하지 않은 자이고
그 생활은 곤궁하지 않네.
그러므로 슬기로운 자는
믿음과 계행,
청정한 신뢰와 진리에 대한 봄,
부처님 가르침에 새김을 확립한다네.”(A7.6)
2021-06-1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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