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설법을 잘 할 수 있을까?
나는 설법을 잘 할 수 있을까? 강연을 잘 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못해 위대해 보인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크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제까지 교단에 서 본적이 없다. 대중을 상대로 강연해 본적이 없다. 당연히 웅변을 해 본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좌담도 잘 하지 못한다. 한마디로 말을 못하는 것이다. 나홀로 하는 것은 잘하는 것이 있을지는 몰라도 여럿이 있으면 얼어 버린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모임에서 어떤 식으로든지 이야기해야 할 때 난감하다. 빙 둘러 앉아 각자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소감을 말할 때 얼어 버려서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준비해 둔 말을 하려 하지만 어색하기 짝이 없다. 어떻게 해야 말을 잘 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부처님 가르침에 말을 잘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4개월만에 열린 금요니까야강독모임
오랜만에 금요니까야강독모임이 열렸다. 전재성선생과 함께 하는 강독모임이다. 무려 4개월만에 열렸다. 마지막으로 열린 것은 올해 6월달이다. 이번 10월 첫번째 모임은 10월 8일 줌으로 열렸다.
여전히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벌써 네 자리 수 확진자가 몇 개월 지속되고 있다. 코로나펜데믹은 언제 끝날까? 전국민 대다수가 백신접종 했기 때문에 오래 가지 못하리라고 본다. 설령 오래 간다고 해도 코로나와 함께 살아야 한다. 그래서 위드코로나(with corona)라고 하는 것 같다.
지금은 전쟁과도 같은 상황이다. 방역수칙을 준수해야 한다. 6인 이상 모임은 금지되어 있다. 여전히 줌으로 할 수밖에 없다. 오랜 만에 사람들을 줌으로 만났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또 다시 만난 것이다.
줌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처음에는 부자연스럽고 불편하고 어색했으나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
펜데믹이 종식되면 줌모임은 사라지고 대면모임으로 전환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이전으로 되돌아 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번 10월 첫번째 금요모임에서는 네 개 경을 독송했다. 차례로 우다인의 경(A5.159), 원한의 제거에 대한 경1(A5.161), 원한의 제거에 대한 경2(A5.162), 논의의 경(A5.163)이다.
설법자의 마음가짐 다섯 가지
우다인의 경은 ‘설법자의 마음가짐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부제목이 달려 있다. 설법을 잘 하기 위한 다섯 가지 방법이 소개되어 있는 것이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아난다여, 사람은 ‘나는 순서에 맞는 설법을 하겠다.’라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설해야 한다. ‘나는 논리적인 설법을 하겠다.’ 라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설해야 한다. ‘나는 자비에 입각해서 설법을 하겠다.’ 라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설해야 한다. ‘나는 재물을 위해서 설법을 하지 않겠다.’ 라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설해야 한다. ‘나는 자신과 타인을 해침이 없이 설법을 하겠다.’ 라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설해야 한다.” (A5.159)
설법은 가르침을 전달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경전에 근거해서 말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순서설법, 논리설법, 자비설법, 비재물설법, 자타이익설법을 들었다. 이런 용어는 만들어낸 것이다.
순서설법(anupubbi)
순서설법은 무엇일까? 이는 맛지마니까야 56번경과 디가니까야 3번경을 보면 알 수 있다. 맛지마니까야 ‘우빨리의 경’을 보면 “그래서 세존께서는 장자 우빨리에 대하여 순차적인 가르침을 주셨다. 곧, 보시에 대한 이야기, 계행에 대한 이야기, 하늘에 대한 이야기,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위험과 타락과 오염, 그리고 그것을 여읨의 공덕에 대하여 설명하셨다.”(M59)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순서설법을 차제설법이라고도 말한다. 이는 빠알리어 아누뿝비(anupubbi)가 ‘order; succession’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석을 보면 반드시 보시, 지계, 천상 순으로 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계정혜 이전에 “보시가 토대가 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삼법인을 보면 순서가 있다. 무상, 고, 무아 순서를 말한다. 누군가 무아, 고, 무상이라거나, 고, 무상, 무아라고 말한다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는 초기경전에 근거한다. 부처님은 항상 무상을 먼저 말하고, 그 다음에 고를 말하고, 마지막으로 무아를 말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무상, 고, 무아를 순서에 맞지 않게 뒤죽박죽 말했다면 불교상식이 없는 사람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가 불교학을 연구하는 학자라면 자질을 의심받게 된다. 그래서 삼법인은 항상 무상, 고, 무아 순서가 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차제설법도 보시, 지계, 천상의 순서가 되어야 한다.
초기경전을 보면 항상 보시, 지계, 천상 순서이다. 이는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보시가 먼저 나오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보시가 모든 것에 있어서 토대가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모든 것의 토대가 되는 보시
토대라면 단단한 대지를 연상케 한다. 마치 전자제품 개발할 때 그라운드를 넓게 깔아 주는 것과 같다. 바닥이 탄탄해야 흔들림이 없다. 바닥이 부실하다면 흔들릴 것이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다면 강풍에 무너져 버릴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수행자는 바닥을 다질 필요가 있다. 바로 그것이 보시라는 것이다.
무언가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공부에 진전이 없을 때도 있고 수행에 진척이 없을 때도 있다. 이럴 때는 바닥이 부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토대를 닦아야 한다. 그래서 전재성 선생은 “힘없고 절망감이 들 때 가장 하기 쉬운 것은 보시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보시함으로 인하여 힘을 받는 것이다.
보시하면 왜 힘을 받을까? 이는 보시하는 것이 단지 주는 행위가 아니라 바라밀이기 때문이다. 바라밀은 빠라미(paramī)의 번역어이다. 빠라미는 완성의 의미도 있지만 ‘건너감’의 의미도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서에서는 ‘초월(超越)’로 번역했다. 보시바라밀을 하면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갈 수 있음을 말한다.
보시바라밀은 십바라밀 중의 하나이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십바라밀 중에서 보시바라밀이 가장 앞에 나오는 것은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보시바라밀을 하면 힘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있는 상태를 바꿀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바라밀은 자신의 현재상태를 초월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상태를 초월하는 데 있어서 보시바라밀만한 것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설법할 때 항상 보시를 먼저 설했다. 그 다음에 계행을 설했고, 그 다음에 천상을 설했고, 이어서 감각적 욕망에 대해서 설했고, 마지막으로 사성제와 팔정도를 설했다. 이와 같은 순차적인 설법에 대하여 부처님의 순차적인 가르침 즉, 차제설법이라고 한다.
논리설법(pariyāya)
논리설법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각각의 의미와 그 각각의 원인을 보여주면서 설법하는 것이다.”(Mrp.III.293)라고 했다. 여기서 의미는 앗타(attha)를 말하고 원인은 까라나(karaṇa)를 말한다.
부처님은 설법할 때 논리적으로 설법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유를 말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적 설법을 또 다른 말로 ‘방편설법’이라고 한다.
방편이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대승경전을 보면 일승진실이고 삼승은 방편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진실이 아닌 것을 방편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화택(火宅)비유를 보면 불난 집에 있는 아이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선물을 준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도 방편이라고 했다. 이런 이유로 방편이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방편은 본래 좋은 의미이다. 이는 사전을 찾아보면 알 수 있다. 사전에서 방편의 기본의미는 “그때 그때의 형편에 따라 일을 쉽고 편하게 치를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전재성 선생은 맛지마니까야 ‘여러가지 느낌에 대한 경’에서 “아난다여, 이와 같이 나의 가르침은 방편으로 설해진 것이므로,..”(M59)라고 하여 빠알리어 빠리야야(pariyāya)에 대하여 방편으로 번역했다.
전재성 선생은 빠리야야에 대하여 왜 달리 번역했을까? 빠리야야데사나(pariyāya-desanā)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논리설법(A5.159)이라고 번역했는데, 맛지마니까야에서는 방편설법(M59)이라고 번역했다. 이에 대하여 문자로 문의 해 보았더니 “빠알리어는 여러 뜻이 있어서 문맥에 따라 달리 번역되어야 합니다.”라고 답신을 보내왔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 번역의 특징은 문맥에 맞게 번역하는 것이다. 담마(Dhamma)를 예로 든다면, 담마는 문맥에 맞게 가르침, 진리, 원리, 것 등으로 번역된다. 이에 반하여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서를 보면 담마에 대하여 일률적으로 ‘법(法)’이라고 번역해 놓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빠리야야데사나는 문맥에 맞게 논리설법 또는 방편설법으로 달리 번역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자비설법(anuddayatā)
자비설법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커다란 곤경에 빠진 존재를 그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겠다고 연민하는 것이다.”(Mrp.III.293)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자비설법은 연민설법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자비설법에서 자비는 아누다야따(anuddayatā)를 번역한 말이다. 이는 ‘sympathy with compassion’의 뜻이다. 연민에 가까운 말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전달하는 과정에 있어서 연민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전도선언에서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S4.5)라는 명령과 맥을 같이 한다.
세상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연민의 마음이다. 내버려 두면 고통과 불행에 빠질 것이 뻔한 것이다. 그래서 나홀로 열반에 들 수만은 없을 것이다. 가르침을 실천하면 누구나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은 열반으로 완성된다. 그래서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거룩한 삶을 실현하라.”(S4.5)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서 “청정한 거룩한 삶을 실현하라.”라는 말은 다름 아닌 열반을 실현하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이 열반에 드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부처님과 제자들이 열반에 들지 않았다면 자비설법은 의미가 없다. 물론 보살로 살며 세세생생 중생을 다 구제할 때까지 열반을 미룰 수 있다. 그러나 초기경전에는 그런 가르침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이 완전한 열반에 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부처님 제자들도 완전한 열반에 드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열반에 들기 위해서는 청정한 살을 살아야 한다. 탁발을 하는 것은 무소유와 청정한 삶을 위한 것이다. 청정한 삶을 살아 열반에 들었을 때 가르침은 완성된다. 누구나 따라하면 괴로움과 윤회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을 나홀로 누리고 있다면 소승이라 해야 할 것이다.
깨달은 자에게 있어서 지혜와 자비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조금 아는 것도 알려줄 필요가 있다. 이를 아는 만큼 알려 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글로 남기는 것도 아는 만큼 알려 주는 것 아닐까?
비재물설법(āmisantara)
비재물설법은 무엇일까? 이는 “나는 재물을 위해서 설법을 하지 않겠다.”(A5.159)라는 말이다. 여기서 비재물설법은 스스로 이름 붙여 본 것이다. 빠알리어로는 아미산따라(āmisantara)이다. 이는 먹을 것을 뜻하는 아미사(āmisa)와 내부를 뜻하는 안따라(antara)와의 결합어이다. 주석에서는 “재물 때문에, 즉 자신의 네 가지 필수품을 얻고자 설법하지 않는다.”(Mrp.III.293)라고 했다.
설법할 때 금전적 대가를 바란다면 재물설법이 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시를 읊은 대가로 주는 것을 향유하지 않으리. 바라문이여, 그것은 올바로 보는 님에게 옳지 않네.”(S7.9)라고 했다. 부처님이 탁발나가서 바라문에게 설법해 주었는데 바라문이 감동해서 공양하고자 했을 때 말한 것이다.
가르침으로 장사해서는 안될 것이다. 담마의 소유권은 부처님에게 있다. 그럼에도 가르침으로 장사를 해서 부를 축적한다면 비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최소의 비용은 필요할 것이다. 생계는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설법자도 최소의 비용으로 설법해야 할 것이다. 거마비라 하여 한번 설법하는 데 백만원 단위가 된다면 비난받기 쉽다. 교통비에다 식비, 그리고 약간의 활동비가 적합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무상으로 설법하는 것이다. 무상설법 했을 때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재물에서 자유로운 설법이야말로 진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번역서도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번역을 할 때 노고와 비용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을 출간할 때 책값이 정해진다. 많이 사 본다면 책값은 싸질 것이다. 이는 대량생산의 원리에 따른다. 그러나 경전을 사보지 않았을 때 책가격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한국의 불자들이 부처님의 원음이 번역된 빠알리니까야를 한권씩 사본다면 책값은 내려갈 것이다. 그러나 한국불자들은 지독히 경전을 사보지 않는다. 니까야가 번역되어서 한번 찍으면 천권인데 소진되는데 5년 걸린다고 한다. 1년에 고작 200권 팔리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불교 현실이다. 그럼에도 번역자는 사명감을 가지고 평생 걸려 작업을 한다. 언젠가는 사회에 환원할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소유권은 부처님에게 있기 때문이다.
자타이익설법(anupahacca)
자타이익설법은 무엇일까? 이는 “나는 자신과 타인을 해침이 없이 설법을 하겠다.”(A5.159)라는 것을 말한다. 이 구절에 대한 주석을 보면 “자신을 높이고 타인을 비하하는 등으로 자신과 타인의 덕성을 해치지 않고 설법한다.”(Mrp.III.293)라는 뜻이다.
자신을 높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가르침을 마치 자신이 말한 것처럼 설법하는 것도 해당될 것이다. 이를 가르침의 도둑이라 해야 할 것이다. 경전을 근거로 이야기하는 것임에도 출처를 밝히지 않는다면 가르침의 도둑이라고 볼 수 있다.
유튜브를 보면 자칭타칭 깨달은 자들의 법문을 볼 수 있다. 대부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가르침을 인용하는 것은 드물다. 설령 인용했다고 하더라도 출처를 밝히지 않는다. 그렇게 했을 때 그 사람이 말한 것으로 되어 버린다. 이처럼 담마를 자신이 말한 것처럼 되었을 때 가르침의 도둑이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높이는 것이 된다.
타인을 비하는 설법도 있다. 유튜브에서 어느 학자는 "논서는 모두 잘못되었다."라고 말했다. 초기경전을 읽어 보니 기존 논장과 주석서가 엉터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이론과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론과 상충되기 때문에 전승된 논장과 주석서를 잘못되었다고 비판하고 비난하고 비하하는 것이다. 이는 가르침에 대한 모독이다.
전승된 빠알리삼장은 존중되어야 한다. 제3차 결집된 빠알리삼장은 공인된 것이다. 율장과 경장과 논장을 말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구전으로 또는 기록으로 전승되어 왔다. 그럼에도 자신의 이론과 다르다고 하여 전승된 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높이고 타인을 비하하는 것이 된다. 이런 태도는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신과 타인의 덕성을 해치는 것이 된다.
나는 설법을 잘 할 수 있을까?
언젠가 법문요청을 받았다. 매월 한달에 한번 있는 법회모임에서 법문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아마 글 쓴 것을 보고서 그렇게 말한 것 같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번도 교단에 서 본적이 없고 좌담회 한번도 해 본적이 없는 엔지니어 출신 불자에게는 가당치 않은 것이다.
법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써 놓은 것을 읽는 것으로 법문하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그런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어느 강연회에서 연사는 준비한 프린트물을 읽었다. 이런 식이라면 얼마든지 법문할 수 있을 것이다.
법문을 잘 하려면 원고를 보지 않고 해야 할 것이다. 머리에 다 집어넣고 말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원고를 외우다시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연습을 해야 할 것이다. 표정과 제스처도 생각해야 한다. 무엇보다 비주얼이다. 여기에다 오디오까지 갖춘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모든 것을 감안해 보았을 때 강연이나 법문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마스크도 만족스럽지 않고 목소리가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해야 할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날을 위해서 나름대로 준비해야 한다.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설법은 쉽지 않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설하는 것은 쉽지 않다.”라고 했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다른사람에게 가르침을 설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원리를 안으로 준비하고 갖추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설법을 잘하려면 다섯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 “나는 순서에 맞는 설법을 하겠다.”라고. “나는 논리적인 설법을 하겠다.” 라고. “나는 자비에 입각해서 설법을 하겠다.”라고. “나는 재물을 위해서 설법을 하지 않겠다.” 라고. “나는 자신과 타인을 해침이 없이 설법을 하겠다.” 라고. 나는 설법을 잘 할 수 있을까?
2021-10-0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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