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항상 새로운 것이 실재(實在)하는 것이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1. 6. 20. 11:34

항상 새로운 것이 실재(實在)하는 것이다

 

 

사람이 알면 얼마나 알까? 조금 아는 것 가지고 아는 채 했을 때 무지한 것이다. 자신이 많은 것을 모른다는 것을 알았을 때 진짜 아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했는데, 이는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라는 뜻이라고 한다.

 

다섯 가지 두까타(dukkathā)

 

6월 금요니까야강독모임에서 두 번째로 합송한 경은 전도된 말에는 어떠한 종류가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전도된 말의 경(Dukkathāsutta)’(A5.157)에 해당된다.

 

경에 따르면 다섯 가지 말의 전도가 있다. 믿음의 전도, 계행의 전도, 배움의 전도, 보시의 전도, 지혜의 전도를 말한다. 이 다섯 가지에 대하여 왜 전도라고 했을까?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믿음이 없는 사람이 믿음에 대하여 말한다면, 전도된 말을 하는 것이다. 계행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계행에 대여 말한다면, 전도된 말을 하는 것이다. 배움이 없는 사람이 심오한 지식에 대하여 말한다면, 전도된 말을 하는 것이다. 인색한 사람이 보시에 대하여 말한다면, 전도된 말을 하는 것이다. 지혜가 없는 사람이 지혜에 대여 말한다면, 전도된 말을 하는 것이다.”(A5.157)

 

 

전도(顚倒)라는 말은 가치관 따위가 뒤바뀌어 원래와 달리 거꾸로 됨을 말한다. 반야심경에서도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이라고 했다. 이 번역어는 ‘dukkathā를 번역한 것이다.

 

빠알리 사전을 찾아보면, ‘dukkathā’‘du+kathā의 형태이다. 여기서 (du)’는 “bad, woe, 惡的, 의 의미이다. 두는 정반대의 뜻을 지닌 (su)’와 함께 쓰이기도 한다. ‘까타(kathā)’‘speech; story; talk’의 뜻이다. 그래서 두까타(dukkathā)잘못된 말의 뜻이 된다. 이를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전도(顚倒)로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나쁜 이야기로 번역했다.

 

금요모임은 줌모임으로 진행되었다. 토론하는 과정에서 말이 맞지 않은 현상이 발생했다. 통합본 앙굿따라니까야를 본 사람이 말하는 것과 교재 생활속의 명상수행을 보고 말하는 사람과의 차이가 난 것이다. 이는 통합본에서 개정 작업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통합본을 찾아보니 두까타(dukkathā)에 대하여 말하기 어려운 말로 바뀌어 있다. 이는 개정전의 전도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전도된 말을 하는 것이다.”라는 구절은 말하기 어려운 말을 하는 것이다.”라고 변경되어 있다. 따라서 통합본에서는 '말하기 어려운 말의 경'(A5.157)'로 변경되어 있다.

 

두까타에 대한 다섯 가지 법수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믿음이 없는 사람(assaddhassa)

그는 믿음의 완성을 자신 안에서 인지하지 못하고, 그것을 조건으로 기쁨과 환희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A5.157)

 

2)계행을 갖추지 못한 사람(dussīlassa)

그는 계행의 완성을 자신 안에서 인지하지 못하고, 그것을 조건으로 기쁨과 환희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A5.157)

 

3)배움이 없는 사람(appassutassa)

그는 배움의 완성을 자신 안에서 인지하지 못하고, 그것을 조건으로 기쁨과 환희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A5.157)

 

4)간탐이 있는 사람(maccharissa)

그는 보시의 완성을 자신 안에서 인지하지 못하고, 그것을 조건으로 기쁨과 환희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A5.157)

 

5)지혜가 없는 사람(duppaññassa)

그는 지혜의 완성을 자신 안에서 인지하지 못하고, 그것을 조건으로 기쁨과 환희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A5.157)

 

 

공통적으로 자신의 안에서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기쁨도 환희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런 현상이 발생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믿음 없는 사람에게 믿음을 말하면

 

믿음이 없는 사람이 믿음에 대하여 말한다면 전도된 말을 한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왜 믿음이 없는 사람이 믿음에 대하여 말한다면, 전도된 말을 하는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믿음이 없는 사람이 믿음에 대하여 말할 때, 화내고, 분노하고, 짜증내고, 저항하고, 분노와 불만을 드러낸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그는 믿음의 완성을 자신 안에서 인지하지 못하고, 그것을 조건으로 환희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믿음이 없는 사람이 믿음에 대하여 말한다면, 전도된 말을 하는 것이다.”(A5.157)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다. 내세도 없고 윤회도 없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 요즘 이런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과학을 하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

 

과학하는 사람 중에는 무신론자가 많다. ‘리차드 도킨스가 대표적이라 볼 수 있다. ‘이기적 유전자’를 저술한 영국의 리차드 도킨스는 “신이 없어도 인간은 열정적이고 영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창조론 등으로 대표되는 기존 기독교신앙을 비판했다.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대개 유물론자들이기 쉽다. 과학은 기본적으로 물질을 탐구하는 것이다. 물질을 탐구하다 보면 정신도 물질에서 파생하고 있다고 볼 것이다. 그래서 물질이 멸하면 정신도 멸하여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허무주의이다.

 

물질론자들에게 종교를 이야기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믿음을 말하는 것과 같다. 놀랍게도 부처님은 이런 상황을 예견한 것 같다. 이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 믿음에 대하여 말할 때, 화내고, 분노하고, 짜증내고, 저항하고, 분노와 불만을 드러낸다.”(A5.157)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스님들은 하루 한끼만 드시라.”라며 도발했는데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믿음을 이야기하면 짜증을 낼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믿음의 완성을 자신 안에서 인지하지 못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계행도 그렇고, 배움도, 보시도, 지혜도 그렇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해 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며 심지어 비난하기까지 한다.

 

최근 한국불교의 계행에 대하여 에스엔에스(SNS)에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스님들은 하루 한끼만 드시라.”라는 제목으로 도발한 것이다. 이에 어느 큰스님은 발끈 했다. 스님은 말로만 하지 말고 실천할 것을 강조했다. 먼저 해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너 할 일이나 잘해!”라는 말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계행을 지키지 않은 사람에게 계행을 말하면 싫어 하는 것 같다. 갖가지 이유를 들어 반박하기도 한다. 오후불식하는 것에 대하여 배고프면 수행할 수 없다고 말하며, ‘잘 먹어야 잘 수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과연 해보기나 하고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다.

 

계행에 대하여 말하면 계행을 지키지 않은 사람에게 비난받는다. 이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이는 계행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계행에 대하여 말할 때, 화내고, 분노하고, 짜증내고, 저항하고, 분노와 성냄과 불만을 드러낸다.”(A5.157)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한국불교 현실에서 탁발은 어렵다. 탁발을 못한다면 율장정신이라도 지켜야 할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오후불식하는 것이다. 이를 스님들은 하루 한끼만 드시라!”라며 일갈한 바 있다. 그러자 일부 스님들이 반발했다. “네 할 일이나 잘해!”라는 식으로 비난했기 때문이다.

 

재가자는 출가자와 달리 출가자의 계율을 지키며 살지 않는다. 그럼에도 스님들의 범계행위에 대하여 비판할 수 있다. 계율에 대한 것도 그렇다. 오후불식에 대하여 이야기했을 때 이를 비판이 아닌 비난으로 받아들인 스님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너나 잘해!”라는 식으로 비난한다. 계율을 지키지 않은 스님들임에 틀림없다.

 

아들러의 목적론적 심리학에 대하여

 

모두 다섯 가지 두까타가 있다. 이 중에서 배움에 대한 두까타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심리학적 용어를 들어 매우 상세하게 설명했다. 더구나 질의응답까지 연이어 계속되어서 대부분 시간을 심리학과 연기법으로 설명했다.

 

전재성 선생은 배움에 대하여 한가지 관점에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라고 말했다. 선입견이 개입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 좋은 예로서 아들러 심리학을 들었다.

 

사람들은 프로이트나 융심리학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아들러 심리학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아들러 심리학은 어떤 것일까?

 

아들러는 프로이트와 정반대로 이야기했다. 프로이트는 어렸을 적 트라우마가 커서도 영향을 준다고 했다. 그러나 아들러는 이를 부인하고 목적론적으로 설명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방에서 나오지 않은 아이를 예를 들어서 설명했다.

 

방에서 나오지 않는 아이를 일본에서는 히끼꼬모리(引籠, ひきこもり)’라고 한다. 자택이나 방에서 장기간 틀어박혀서 다른 사람이나 사회와 접촉을 하지 않고 생활하는 상태를 말한다. 1990년대 일본 청소년들에게서 이런 현상이 시작되었다. 우리말로 은둔형 외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이가 방에서 나오지 않을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더구나 아버지를 적대시했을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프로이트 방식이라면 어렸을 적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아들러식으로 설명한다면 아버지에 대한 복수의 의미도 있다고 한다. 이는 다름 아닌 목적론이다.

 

아이가 방에서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하여 목적론적으로 본다면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된다. 자신의 목적달성을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아님을 말한다. 이와 같은 목적론에 대하여 금요멤버이자 상담가인 장계영 선생은 허구적 목적론이라고 보충 설명을 해 주었다.

 

인과론에만 매몰된다면

 

프로이트 심리학은 인과론에 대한 것이고, 아들러 심리학은 목적론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불교는 인과론에 근거하기는 하지만 목적론에 더 가깝다고 했다. 만약 인과론에만 매몰되어 있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숙명론을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숙명론은 삼종외도설 중의 하나이다. 이는 그 모든 것은 전생이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A3.61)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숙명론적으로 본다면 자이나교의 교리가 된다.

 

모든 것을 전생의 원인으로 돌렸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는 생명을 죽이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A3.61)가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전생의 원인으로 돌렸을 때 자신의 행위에는 책임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전생의 행위가 결정적인 것이라고 고집한다면, 그들에게는 이것은 해야 하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도나 정진이 없는 셈이다.”(A3.61)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자이나교의 숙명론을 비판했다. 숙명적 삶을 살게 되면 미래가 없음을 말한다. 숙명론은 가혹한 인과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숙명론을 무작설(無作說: akiriya)이라고 했다. 인간의 도덕적인 삶을 부정하는 강한 결정론이나 강한 비결정론을 말한다. 무작설과 반대되는 것이 부처님의 작론이다.

 

부처님의 작론은 업과 업의 과보의 법칙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작론은 십이연기로 설명된다. 오로지 원인과 결과만을 말하는 인과법과는 다른 것이다.

 

조건에 기반한 연기법

 

인과론은 과학의 시대에 잘 먹힌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인과론과 관련하여 영향력 있는 인물 다섯 명을 들었다. 프로이트, 다윈, 아인슈타인, 칼 막스를 말한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다섯 명이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인과론에 바탕을 두어 이론을 전개한 과학자나 사상가들을 말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인과론은 결정론으로 되기 쉽다는 것이다.

 

오로지 인과적으로 본다면 모든 것을 숙명론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자이나교에서 모든 것을 전생의 원인으로 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인과론은 오늘날 과학의 시대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결과만 중시하는 결정론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은 인과를 부정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인과에 기반한 연기법을 설했다. 그런 연기법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조건 법이다. 이는 원인(hetu: )과 조건(paccaya: )과 결과(phala: )라는 세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부처님의 연기법은 인, , 과에 대한 것이다. 인과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인과에 조건이 붙어서 연기법이 된 것이다. 여기서 연기를 뜻하는 빠알리어는 빠띳짜사뭅빠다(piccasamuppāda)이다. 이는 조건하여(picca), 함께 발생함(samuppāda)”로 풀이된다. 그래서 연기법을 조건법이라고 한다.

 

연기법은 조건발생에 대한 것이다. 생겨날 때는 조건을 필요로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단순한 인과법이 아님을 말한다. 원인과 결과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결과에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함을 말한다.

 

행위를 하면 즉각적으로 과보를 받는 것이 아니다. 조건이 되어야 과보로 나타난다. 이를 업이 익는다고 하여 업이숙(業異熟)이라고 말한다. 업이 달리 익는 것이다. 조건이 맞아 떨어져야 결과로서 나타남을 말한다.

 

모든 것을 인과법으로 보면 결정론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목적론으로 보면 달라진다. 미래의 운명을 개척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인과에다 조건()이 하나 더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기법을 인연과로 설명한다. 줄여서 인연법이라고도 한다. 불교에서는 인과법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인연법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모든 것은 접촉으로 부터

 

전재성 선생은 과학적 결정론과 불교적 목적론에 대하여 길게 설명했다. 모든 것을 과학적 사고로 가졌을 때 그것은 인과법에 매몰될 수밖에 없고, 이는 결정론이 되어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프로이트 심리학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아들러 심리학에 따르면 모든 것은 목적이 있어서 행위하는 것으로 보아 목적론으로 설명된다. 아이가 방안에 틀어 박혀 나오지 않는 것도 목적달성을 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불교는 목적론적 종교라고 볼 수 있다.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연기법의 특징 때문이다. 그래서 전재성 선생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연기송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불교적 연기법에 따르면 모든 것은 항상 새로운 것이 된다. 어느 것 하나 그대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것이 조건발생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무수한 사건이 있어서 새롭게 일어난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연기법은 사건과 사건에 대한 것임을 말한다.

 

지금 흐르는 물이 있다. 이는 동일한 물이 아니다. 매번 새로운 물이 흐른다. 과거에 있었던 것이 전달된 것이 아님을 말한다. 매 순간 조건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재성 선생은조건이 되어서 새로운 것이 생겨납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연기법으로 잘 설명된다.

 

부처님은 숙명론, 존우화작론, 우연론에 대하여 무작론이라 하여 연기법으로 논파했다. 부처님이 설한 연기의 가르침에 따르면 지금 여기에 대한 것이다. 이를 접촉하는 것으로부터 설명했다.

 

모든 것은 접촉하는 것으로부터 이루어진다. 접촉이 없으면 어떠한 것도 생겨나나지 않는다. 그래서이러한 것들이 여섯 가지 세계이다.”, “이러한 것들이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이다.”“이러한 것들이 열 여덟 가지 정신적 사유이다.”, “이러한 것들이 네 가지 진리이다.”(A3.61)라고 설명했다. 이런 가르침은 비난받을 수 없다. 왜 그런가? 이는 이러한 것을 조건으로 그것을 말한 것이다.”(A3.61)라고 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현상을 조건으로 설명한 것이다.

 

단순하게 원인과 결과만을 말하면 무작론이 되어서 비난받는다. 그러나 접촉에 따른 조건발생으로 현상을 설명하면 비난받지 않는다. 이는 연기법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접촉으로부터 시작된다.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

 

연기법은 사건과 사건의 연속이다. 예전의 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게 본다면 인과만 있을 것이다. 인과만 있다면 정해진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현상을 인과적으로 본다면 과거에 종속된다. 자이나교의 숙명론 같은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연기법적으로 보기 때문에 과거에 종속되지 않는다. 이는 연기법에 두 가지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로 설명된다.

 

상호의존적 연기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로 설명된다. 이것과 저것은상호 의존적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존재하는 것은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상호의존적 연기에 대하여 관계와 관계로 본다.

 

조건발생적 연기는 이것이 생겨남으로 저것이 생겨난다.”로 설명된다. 이를 사건과 사건으로 설명할 수 있다. 조건에 따라 매순간 새로운 것이 생겨남을 말한다. 그래서 전재성 선생은 무수한 사건을 원인으로 하고 무수한 사건을 조건으로 하여 무수한 사건이 생겨납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조건발생적 연기는 항상 새로운 것의 출현으로 본다.

 

나의 일거수 일투족은 무수한 관계와 무수한 사건에 따른 것이다. 매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이는 역으로 나의 행위가 우주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말한다. 나의 행위에 따라 우주의 질서가 다시 재편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항상 새로운 것이 실재(實在)하는 것이다

 

여기 한송이 꽃이 있다. 한송이 꽃이 피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작용했을 것이다. 알고 보면 무수한 조건이 작용한 것이다.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무수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이는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단순히 연결된 것이 아니라 조건발생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전재성 선생은 전우주가 나의 조건이 됩니다.”라고 했다.

 

한송이 꽃피는데 우주가 조건이 된다. 내가 이렇게 존재하는 것도 우주가 조건이 되어서 작용한 것이다. 현재의 꽃이 무수한 조건에 의해 피어 나듯이, 나 자신도 무수한 조건에 의해 여기 있게 되었다.

 

연기법은 단지 관계와 관계에 그치지 않고 조건 발생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매순간 새롭게 태어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고 나의 의지대로 바꾸어 나갈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항상 새로운 것이 실재(實在)라고 말하는 것이다.

 

 

2021-06-2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