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안에 코끼리 한마리가, 욕망이라는 괴물과 함께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 없다. 정신적인 향상을 추구하는 일을 해야 가치가 있다. 끊임없이 자신과 세상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질문해야 한다. 그래야 향상과 성장이 있다. 배움에 있어서 부처님 가르침만 한 것이 없다.
오월 두 번째 금요니까야강독모임
오월 두 번째 금요니까야강독모임이 5월 28일 줌으로 열렸다. 비대면 비접촉의 시대에 이제 ‘줌(Zoom)’만한 대안이 없는 것 같다. 만약 줌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코로나가 종식될 때까지 무한정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금요모임에서도 줌이 도입되어서 매달 두 번 모임을 갖고 있다. 처음에는 적응이 잘 되지 않았으나 이제 서서히 적응이 되는 것 같다. 스마트폰을 이용해 접속하고 있는데 노트북 보다는 성능이 떨어진다. 종종 음성이 끊기는 경우도 있다.
줌모임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아마 코로나가 종식되면 줌도 종식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대면 비접촉 줌모임이 편하기는 하지만 대면 모임만 못하다. 먼 거리를 힘들게 달려 가서 두 시간 함께 하는 것은 정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정을 말한다. 이를 우정(友情)이라 해야 할 것이다.
도반들이야말로 진정한 친구라고 본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친구가 있지만 도의 길로 함께 가는 친구만한 사람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러한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전부에 해당한다.”(S3.18)라고 했다.
오프라인 모임이건 줌모임이건 항상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좋은 친구(kalyāṇamitta), 좋은 동료(kalyāṇasahāya), 좋은 도반(kalyāṇasampabhaṅka)”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과 사귀는 것에 대하여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닦을 것이고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익힐 것이다.” (S3.18)라고 했다.
좋은 도반은 팔정도를 함께 닦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세존을 좋은 벗으로 삼아”(S3.18)라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을 스승으로도 삼지만 부처님을 도반으로도 삼으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적용하면 스승도 좋은 도반이 된다. 왜 그런가?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전부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금요모임에서는 두 개의 경을 독송했다. 하나는 ‘수행자가 존경받을 수 있는 감내의 능력’에 대한 것과 ‘탐욕을 일으키지 않고 성냄을 일으키지 않는 수행법’에 대한 것이다. 전자는 앙굿따라니까야 ‘감내하지 못함의 경’(A5.139)이고, 후자는 ‘띠깐다끼의 경’(A5.144)이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다. 어제 금요모임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것을 후기로 남기는 것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후기를 작성한다. 오래 전부터 해 오던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노트한 것을 열어 보았다. 한번 주욱 읽어 본다. 그리고 밑줄 쳐 본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 쓸 것인지에 대하여 대충 머리 속에 그려 본다.
고대 인도에 사군(四軍)이 있었는데
첫번째 합송한 경은 결국 욕망에 대한 것이다. 나의 마음 속에 있는 욕망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재난이 되고 말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욕망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인가?
첫번째 합송한 ‘감내하지 못함의 경’(A5.139)은 전쟁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사군을 거느린 강력한 두 개의 진영이 맞붙었을 때 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것이다. 이를 코끼리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다. 다섯 감역 중에서 시각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왕의 코끼리가 형상을 감내하지 못하는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의 왕의 코끼리가 전장에 나아가 코끼리의 무리를 보거나 말의 무리를 보거나 수레의 무리를 보거나 보병의 무리를 보면, 두려워하고 경악하고 안정을 잃고 전투에 뛰어들 수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왕의 코끼리가 형상을 감내하지 못하는 것이다.”(A5.139)
고대 인도에서 사군이 있었다. 네 가지 군대를 말한다. 초기경전에서는 코끼리부대, 기마부대, 전차부대, 보병부대를 말한다. 이렇게 강력한 사군을 가지고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사군 중에서도 단연 코끼리부대(象軍)가 가장 강력할 것이다. 이는 숫따니빠따 출가의 경에서 빔비사라왕이 수행자 시절의 부처님에게 제안 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빔비사라왕은 마가다국의 왕이었다. 마가다는 고대인도의 16대국 가운데 가장 강성했다. 빔바사라는 수행자에게 “코끼리의 무리가 시중드는 위풍당당한 군대를 정렬하여 당신께 선물을 드리니 보십시오.”(Stn.421)라고 말했다. 사군 중에서 코끼리부대를 맡기겠다는 것이다. 마가다국의 장군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고대인도에서 코끼리부대의 코끼리는 요즘 탱크 같은 것이다. 커다란 몸집의 코끼리가 적진을 향해 돌진할 때 당해 낼 자가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고대인도의 코끼리부대가 알렉산더 대왕의 장창 부대를 격파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아쇼카 대왕의 조부인 찬드라굽타를 말한다. 마우리야 왕조의 창건자이다. 알렉산더 부하가 세운 나라가 인도에 침입하자 코끼리부대로 격파한 것이다.
전투를 하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 그럼에도 죽는 것을 두려워 한다며 도망가기 바쁠 것이다. 전투에 임하는 코끼리가 적진의 사군을 보고서 겁을 먹었다면 전투는 하나마나한 것이다. 수행승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장 강력한 감각의 군대
초기경전을 보면 수행승에 대하여 전쟁에 임하는 전사로 묘사한 것이 많다. 수행승에게 있어서 전쟁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오욕락과의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시각의 욕망과의 전쟁, 청각의 욕망과의 전쟁 등을 말한다. 욕망과의 전쟁이다.
전장의 코끼리가 사군을 보고서 겁먹으면 전쟁에서 패한다. 마찬가지로 수행자가 감각적 대상에 사로 잡힌 다면 감각적 욕망에 굴복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다섯 가지 감각의 대상 중에 어느 것이 가장 강력할까?
감각에서 시각과 청각이 차지 하는 비율이 매우 높다. 보고 듣는 것이야말로 감각의 전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너지는 것은 미각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맛에 대한 갈애야말로 가장 강력한 적의 군대라고 볼 수 있다. 사군 보다 더 막강한 군대가 미각이라는 욕망의 군대일 것이다.
전재성 선생은 미각에 대하여 길게 설명했다. 육체적 질병은 맛 때문에 생겨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달콤한 맛에 대한 갈애로 인하여 이름도 모를 수천 수만가지의 질병이 생겨날 수 있음을 말한다. 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술도 음식이다. 어떤 이는 밥 먹을 때 술을 마시는데 이를 음식으로 마신다고 했다. 이쯤 되면 술도 음식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술은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킨 다는 것이다. 한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여러 잔 되었을 때, 마침내 술이 사람을 마셔 버린다. 그 결과 사람은 개가 될 것이다. 사람이 동물이 되는 것이다.
음식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음식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전재성 선생은 음식을 약 먹듯이 먹어야 된다고 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치료가 될 때까지 상처에 연고를 바르듯, 또한 예를 들어 짐을 옮길 수 있도록 수레바퀴에 기름을 치듯.”(S35.239)이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초기경전 도처에서 음식절제에 대한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음식은 알맞게 먹어야 한다. 이에 대하여 경전에서는 “수행승이 음식을 먹을 때에 알맞은 분량을 안다.”(S35.239)라고 했다. 어떻게 아는가? 이는 “이것은 놀이나 사치로나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 몸을 유지하고 해를 있지 않도록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전의 불편했던 경험을 제거하고 새로운 고통을 초래하지 않겠다. 이것으로 나는 허물없이 안온하게 살리라.”(S35.239)라며 이치에 맞게 성찰해야 알 수 있음을 말한다. 이것이 음식절제에 대한 가르침이다.
전재성 선생은 오욕락 중에서 가장 통제하기 어려운 것은 맛에 대한 것이라고 했다. 시각과 청각이 있지만 이는 직접 접촉하는 것이 아니다. 후각이 있지만 이것도 직접 접촉이 아니다. 그런데 미각만큼은 오감을 만족한다는 것이다. 시각으로 음식을 먹고, 청각으로 음식을 먹고, 후각으로 음식을 먹고, 미각으로 음식을 먹고, 촉각으로 음식을 먹는 것이다.
맛에 대한 갈애를 극복하지 못하면 다 무너진다. 욕망에 굴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수행승이 맛을 감내하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미각으로 맛을 맛보고, 욕망을 일으키는 맛에 탐착하지 않으면,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맛을 감내하는 것이다.”(A5.139)
여기서 감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카마(Khama)를 번역한 말이다. 영어로 ‘forgiving; enduring; bearing’의 뜻이다. 참고 견딘다는 뜻이다. 인내라고 할 수도 있다. 맛에 대한 갈애가 일어나면 이를 참고 견딜 수 있어야 함을 말한다.
몸 안에 코끼리 한마리가
대부분 욕망에 무너진다. 맛에 대한 갈애에서 이겨낼 자는 많지 않다. 왜 그런가? 인간은 본래 탐욕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태어날부터 탐, 진, 치가 세팅 되어서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인간이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인 이유도 있다.
인간은 동물적 요소와 이성적 요소가 있다. 동물에게는 동물적 본능만 있으나 인간에게는 동물적 본능에다 이성까지 있어서 중층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약하다. 의식이 있을 때는 이성의 지배를 받지만 때로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특히 감각적 대상과 접했을 때이다.
시각적으로 매혹적인 대상을 접했을 때 무의식 영역이 활성화될 수 있다. 예전의 기억과 연계되어서 욕망이 일어나는 것이다. 맛에 대한 갈애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번 맛보았던 것은 잊지 못한다. 또다시 맛집을 찾는 이유가 된다. 감각적 대상을 보았을 때 마음속으로는 자제하려 하나 욕망을 당해낼 수 없다. 인간의 몸안에는 엄청난 크기의 코끼리가 한마리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의식과 무의식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코끼리를 탄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코끼리는 인간의 감성적 요소를 상징하고, 코끼리에 탄 인간은 인간의 이성적 요소를 상징한다. 평소에는 이성의 지배를 받으나 감각대상을 접하면 감성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 감성은 다름 아닌 욕망에 대한 것이다.
우리 몸안에는 커다라 코끼리가 한마리 살고 있다. 코끼리는 평소에는 등에 탄 인간의 말에 따른다. 이리가라고 하면 이리가고 저리 가라고 하면 저리간다. 그러나 코끼리가 감각대상을 만나면, 예를 들어먹을 것을 보면 통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코끼리 등에 탄 나약한 존재이다. 가지고 있는 것은 이성밖에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성으로는 몸안의 코끼리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덩치가 남산만한 코끼리를 인간의 나약한 힘으로는 당해낼 수 없는 것이다. 욕망이라는 코끼리가 그렇다.
인간은 몸집이 거대하고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코끼리 등에 타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가 제아무리 많이 배우고 지위가 높아도 자신의 코끼리를 통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인간의 몸안에 있는 동물적 감성, 감각, 정서를 당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코끼리를 잘 다스릴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부처님 말씀을 떠 올려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즐거운 느낌은 괴롭다고 보아야
감각적 대상에 접했을 때 대부분 무너지고 만다. 이는 욕망에 지배받음을 말한다. 저녁 비가 추적추적 내릴 때 술 생각이 날 것이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술병을 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얼큰 한 것이 먹고 싶을 때가 있다. 갑자기 라면생각이 났을 때 라면국물의 유혹을 뿌리칠 사람은 얼마나 될까? 어느 순간 라면국물을 먹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많이 배운자라도, 아무리 지위가 높은 자라도 감각적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무의식의 영역에 있는 엄청난 크기의 괴물과 같은 욕망에 굴복하고 말 것이다. 이럴 때 부처님 가르침을 떠 올린다면 어느 정도 완화될 것이다. 그래서 새내기 수행승은 욕망을 부추기는 악마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벗이여, 세존께서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시간에 매이는 것이고, 괴로움으로 가득 찬 것이고, 아픔으로 가득 찬 것이고, 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훨씬 더 크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가르침이며,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가르침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이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S1.20)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의 재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런 가르침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은 괴롭다고 보아야 하며, 괴로운 느낌은 화살이라고 보아야 하며,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무상하다고 보아야 한다.”(S36.4)라고 말씀하셨다.
즐거운 느낌은 욕망과 관련된 것이다. 우리 몸 안에 있는 욕망이라는 괴물이 있는 한 감각적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고 욕망대로 살 수 없다. 욕망대로 살면 막행막식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부처님이 경고한 것이다. 그래서 “이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 속박된 자, 괴로움에 속박된 자라고 나는 부른다.”(S36.6)라고 했다.
사띠가 수행에 사용될 때
우리는 부처님 제자들이다. 부처님의 고귀한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사띠(sati)이다.
사띠라 하여 좌선이나 행선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일상에서도 사띠해야 한다. 일상에서는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이전 찰나를 알아차리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
사띠의 본래 뜻은 기억(memory)이다. 수행에서 사띠가 사용될 때는 반드시 삼빠자나와 함께 사용된다. 마음을 대상에 묶어두는 것이 사띠이고, 대상을 관찰하는 것은 삼빠자나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한다면, 배의 부품과 꺼짐은 기둥이 되고 이를 관찰하는 마음은 사띠가 된다. 몸을 관찰하는 것이다. 마치 기둥에 끈이 묶여 있는 것과 같다.
기둥에 끝이 묶여 있다면 그 끈의 길이만큼만 움직일 것이다. 이에 대하여 “까예 까야누빳시 위하라띠(kāye kāyānupassī viharati)”라고 한다. 이는 “몸에서 몸을 관찰한다.”(S45.8)는 뜻이다. 관찰 범위가 몸으로 범위가 한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둥에 끈을 매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이다.
대상이 몸으로 한정되면 그 다음에는 면밀하게 관찰해야 한다. 이때 삼빠자나가 있게 된다. 그래서 “아따삐 삼빠자노 사띠마(ātāpī sampajāno satimā)”라고 한다. 이는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한다.”(S45.8)가 된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열심히(ātāpī) 알아차리고(sampajāno) 사띠를 확립 하는 것(satimā)”이다.
몸관찰은 열심히 알아차리고 사띠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렇게 삼박자가 맞았을 때 마음은 대상에 붙어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야 오온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생멸현상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 된다. 이는 다름 아닌 불교적 지혜에 해당된다.
다리에 통증이 나서 통증에 마음을 둔다면, 이번에는 느낌을 관찰해야 한다. 그래서 수념처가 된다. 어떻게 관찰하는가? 먼저 “웨다나수 웨다누빳시 위하라띠”라 하여, “느낌에 대하여 느낌을 관찰한다.”가 된다. 사띠의 대상을 느낌으로 한정하는 것이다.
다리저림으로 인하여 통증이 발생했다면 통증에 대한 느낌을 관찰하는 것이다. 어떻게 관찰해여 할까? 몸 관찰할 때와 마찬가지로 “아따삐 삼빠자노 사띠마(ātāpī sampajāno satimā)”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열심히(ātāpī) 알아차리고(sampajāno) 사띠를 확립 하는 것(satimā)”은 네 가지 염처에 모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이처럼 사띠가 수행에서 사용될 때는 항상 삼빠자나와 함께 사용된다.
사띠가 단독으로 쓰일 때
사띠가 일상에서 사용될 때는 기억의 의미로 사용된다. 대상을 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몸이나 느낌, 마음, 법에 한정할 수 없다. 늘 움직이는 것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대상을 한정하여 면밀히 관찰할 수 없다. 그 대신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 가르침을 새기고 있어야 가능하다.
평소 부처님 가르침을 늘 새기고 있다면 감각적 욕망의 대상과 접했을 때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새내기 수행승이 그랬던 것처럼 “감각적 욕망은 괴로움으로 가득찬 것이고, 아픔으로 가득찬 것이고, 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훨씬 더 크다.”라고 아는 것이다.
사띠가 단독으로 사용되었을 때는 일상에서 사띠라고 보면 맞는 것 같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맛지마니까야 학인의 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새김을 확립합니다.
그는 최상의 새김과 분별을 갖춥니다.
그는 오래 전에 행한 것이나
오래 전에 말한 것을 기억하고 회상합니다.”(M53.12)
이 말은 아난다가 재가신자 마하나마에게 한 말이다. 부처님이 아난다에게 대리 설법하게 한 것이다. 아난다는 마하나마에게 일곱 가지를 말했다. 그것은 고귀한 제자가 갖추어야 할 일곱 가지 성품에 대한 것이다. 믿음, 부끄러움, 창피함, 배움, 노력, 새김(sati), 그리고 지혜를 말한다.
아난다는 부처님을 대리하여 일곱 가지 성품을 갖추어야 부처님의 제자라고 할만하다고 했다. 그 중에 사띠에 대한 것을 보면 “오래 전에 행한 것이나 오래 전에 말한 것을 기억하고 회상합니다.”(M53.12)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띠가 단독으로 쓰였을 때는 기억의 의미로 사용됨을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기억을 말한다.
경계에 부딪칠 때마다 가르침을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보고 귀가 있어서 소리를 듣는다. 입이 있어서 음식을 먹는다. 사람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대상을 접할 때 번뇌가 일어난다. 욕망이라는 번뇌를 말한다.
몸을 가지고 있는 한 번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욕망이 떨어져 나간 색계의 존재라면 욕망에서 자유로울 것이다. 몸이 아예 없는 무색계의 존재라면 몸으로 인하여 고통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몸은 한마디로 욕망덩어리라고 볼 수 있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몸과 함께 살아 가야 한다. 그런데 욕망덩어리라고 볼 수 있는 몸을 제어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마치 내 몸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하여 인간을 ‘코끼리 탄 사람’으로 비유한다.
어쩌면 우리는 코끼리 탄 사람인지 모른다. 이는 인간에게 동물적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한번 감각적 욕망의 불길에 휩싸이면 제어가 되지 않는다. 마치 힘센 코끼리를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수행이 답이다.
수행을 하여 욕망을 조복받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처님 가르침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떤 면으로 본다면 욕망의 제어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동물적 본성을 제어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항상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경계에 부딪칠 때마다 가르침을 상기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몸 안에 커다란 코끼리를 한마리씩 키우고 있다.
2021-05-2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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