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그 사람 장점만 보고 가렵니다
이제까지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해결하지 못한 것이 있다. 그것은 탐욕과 성냄에 대한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지 않는 한 이 생에서는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인류의 지혜가 빠알리 삼장에
초기경전을 보면 삶의 해법이 있다.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것이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의 지혜가 사부니까야와 쿳다까니까야, 그리고 율장과 논장에 다 들어 있는 것이다.
시월 첫번째 금요니까야강독모임에서 세번째로 독송한 것은 원한의 제거에 대한 경이다. 제목은 ‘어떤 사람에 대한 원한을 제거하는 구체적인 방법’이라고 되어 있다. 이 경의 정식명칭은 앙굿따라니까야 ‘원한의 제거에 대한 경2(utiyaāghātapaṭivinayasuttaṃ)’(A5.162)이다.
여기 원한 맺힌 자가 있다.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 자이다. 그 사람 이름만 보아도 이름만 보아도 불쾌하고 그 사람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분노만 한다면 악업이 되기 때문에 나만 손해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초기경전에서는 원한 맺힌 자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다. 경의 법수가 다섯 이므로 다섯 가지 해법이 있다. 다섯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먼저 다섯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
첫째, 말로는 청정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다.
둘째, 몸으로는 청정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다.
셋째, 마음으로 청정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다.
넷째, 말로도,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청정한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다섯째, 말로, 몸으로, 마음으로 청정한 사람을 영위하는 사람이다.
이 중에서 최악은 넷째이고, 최선은 다섯째이다. 이는 신, 구, 의 삼업에 대한 것이다. 삼업에서 하나라도 청정한 것이 있는 경우가 있고, 모두 청정하지 않은 것도 있고, 모두 청정한 것도 있다.
원한을 푸는 하책과 상책
경에서는 왜 청정을 강조했을까? 첫째의 경우 “몸으로는 청정하지 못한 삶을 영위하지만, 말로는 청정한 삶을 영위합니다.”(A5.161)라고 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몸으로는 청정하지 못한 삶은 신업이 청정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신업이라면 십악행에서 살생, 투도, 음행에 해당된다. 낚시질 등으로 살생을 일삼는 자가 있고, 도둑질이 습관이 된자. 몰래몰래 음행하는 자가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살생은 폭력의 범주에 해당된다. 그가 나를 때렸다면 원한 맺힌 자가 된다. 누군가 어떤 여인을 성폭행했다면, 여인은 그 사람에 대하여 원한을 품을 것이다. 누군가 내 돈을 떼 먹고 달아났다면 그 사람 이름만 들어도 불쾌할 것이다. 이와 같은 원한 맺힌 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원한 맺힌 자에게 복수하면 어떻게 될까? 말로 찌르고 몽둥이로 두들기면 분한 마음이 풀릴까?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기 쉽다. 복수는 또 다른 보복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부처님 제자라면 원한을 보복으로 풀 수 없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결코 이 세상에서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 원한의 여읨으로 그치나니 이것은 오래된 진리이다.”(Dhp.5)라고 했다.
원한이 원한으로 풀린다면 모두 원한을 해서 풀을 것이다. 마치 걱정에 대하여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다면 걱정이 없어서 좋겠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원한을 원한으로 푸는 방법은 가장 하책이다. 상책은 원한의 마음을 여의는 것이다. 원한의 마음을 내려 놓았을 때 원한이 풀린다.
천조각 비유에서
어떻게 해야 원한을 내려 놓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첫번째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벗들이여, 예를 들어 분소의를 입은 수행승이 길에서 천조각을 보고 왼발로 고장시키고 오른 쪽 발로 펼쳐서 그 가운데 단단한 부분을 찢어서 가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벗들이여, 이와 같이 이 사람은 몸으로는 청정하지 못한 삶을 영위하지만, 말로는 청정한 삶을 영위하는데, 몸으로 청정하지 못한 삶을 영위하면, 그 때 그것에 대하여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말고, 말로 청정한 삶을 영위하면, 그 때 그것에 대하여 정신활동을 기울여야 합니다. 벗들이여, 이와 같이 그 사람에 대하여 원한을 제거합니다.”(A5.161)
부처님은 천조각의 비유를 들어서 신업과 구업을 설명했다. 그러나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부처님 당시 상황과 현재의 상황이 같지 않은 이유가 크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이 비유는 앙굿따라니까야에만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단단한 부분만 취하는 것은 장점만 취하는 것을 말합니다.”라고 했다.
경을 읽을 때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 때는 주석을 보아야 한다. 니까야의 경우 주석이 있어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한역아함경의 경우 주석이 없어서 읽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주석이 있어도 이해하지 못할 때는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전재성 선생처럼 수십년 동안 빠일리삼장을 번역한 번역가에 물어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전재성 선생은 쓸모 있는 천조각을 취하는 것에 대하여 그 사람의 장점을 취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는 탁월한 해석이다. 왜 그런가? 그 사람이 비록 신업은 청정하지 않지만 구업은 청정하다면 구업을 취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말로 청정한 삶을 영위하면, 그 때 그것에 대하여 정신활동을 기울여야 합니다.”(A5.161)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왜 천조각의 비유를 들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글을 쓰는 과정에서 ‘이런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길에서 천조각을 발견하고 그 중에서 쓸만한 부위를 취했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 것? 탁발나간 수행승이 주지 않은 것을 가진 것이다. 도둑질을 해서는 안된다는 계율을 어긴 것이다.
불투도죄는 주지 않은 것을 가져 가는 것을 말한다. 길거리에 설령 시체 쌓은 옷이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주지 않는 다면 가져 가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데 탁발수행승은 천조각을 발견하자 “왼발로 고장시키고 오른 쪽 발로 펼쳐서 그 가운데 단단한 부분을 찢어서 가지고 간 것”(A5.161)이다. 이는 명백히 도둑질이다.
탁발수행승은 천조각을 도둑질했다. 천조각을 도둑질했다는 것은 신업이 청정하지 못함을 말한다. 이런 점은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 수행승은 구업은 청정하다고 했다. 이런 경우 도둑질한 것에 마음 기울이지 말고, 평소 구업이 청정한 것에만 마음 기울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 사람의 단점만 보지 말고 그 사람의 장점을 보라는 것이다.
그 사람 장점만 보고 가라
사람은 장점과 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에 대하여 단점만 본다면 그 사람과 가까이할 수 없다. 부부가 부부싸움을 할 때 단점만 지적하여 공격하면 갈라서게 될 것이다. 이런 경우 단점 보다는 장점을 보아야 한다. 장점만 보고 산다면 갈라서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다. 허물이 있을 수밖에 없다. 신업이 청정하지 않으면 구업은 청정할 수 있다. 구업이 청정한 것을 보고서 함께 가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어떤 자의 경우에는 언어적 행위만이 적정하다. 그의 적정한 상태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다. 그는 천성적으로 인사에 밝고, 상냥하게 말하고, 즐겁게 대화하고, 공손하게 말하고, 명료하게 말하고, 친절하게 말하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가르침을 설하고, 의미와 형식을 갖추어 원만하게 법문을 한다. 그러나 그의 신체적 행위와 정신적 행위는 적정하지 않다. 그러면 그러한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그의 언어적 행위의 적정만을 새겨야 한다.”(Vism.9.18)
청정도론 자애수행편에나오는 것이다. 자애수행을 할 때 원한 맺힌 자에 대하여 어떻게 원한을 제거할 것인지에 대하여 경전을 근거로 설명한 것이다. 그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원한의 제거에 대한 경2’(A5.162)이다. 이렇게 본다면 청정도론은 오부니까야 주석서이자 동시에 수행지침서인 것을 알 수 있다.
청정도론에서는 신, 구, 의 삼업에 대한 허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았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 사람 장점만 보고 가라.”라는 것이다.
재가불교활동 하면서
탁발수행승이 천조각을 발견하고 필요한 부분만 가져 간 것은 명백히 투도죄에 해당된다. 이런 것만 보고서 배척해서는 안된다. 그 수행승에게는 천성적으로 인사에 밝고, 상냥하게 말하는 등 언어적 적정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체적 행위와 정신적 행위는 적정하지 않지만, 그런 것들은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언어적 행위의 적정만을 새겨야 한다.”(Vism.9.18)라고 했다.
니까야에서도 “몸으로 청정하지 못한 삶을 영위하면, 그 때 그것에 대하여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말고, 말로 청정한 삶을 영위하면, 그 때 그것에 대하여 정신활동을 기울여야 합니다.”(A5.161)라고 했다. 이렇게 그 사람의 장점이나 적정한 것만 취해야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이 제거된다고 했다. 이런 가르침은 사회활동에도 적용될 수 있다.
페이스북에서는 수많은 친구가 있다. 그 중에는 마음에 드는 사람도 있고 들지 않는 사람도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끊어 버리면 몇 사람 되지 않을 것이다. 몇 사람 되지 않는 사람 중에 어느 날 또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 할까? 결국 홀로 될 것이다.
재가불교모임 활동을 하고 있다. 모임에는 몸으로 하는 활동가도 있고 머리로 하는 지식인들도 있다. 모두 일장일단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5년전의 일이다. 블로그에 글만 쓰다가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어떤 계기가 되어서 재가불교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재가불교활동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에 어떤 리더가 있었다. 그는 약간 독선적이었다. 모든 것을 자신의 위주로 하고자 했다. 의사결정과정에서 타인의 의견을 잘 들어주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반발하여 에스앤에스에서 퇴장이 잇따랐다. 나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오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그는“저는 그 사람 장점만 보고 가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충격 받았다.
그는 왜 그 사람의 장점만 보고 가겠다고 했을까? 아마도 수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일 저런 일, 산전수전 겪은 사람에게 지혜가 생겨 났을 것이다. 재가불교활동 초짜는 알 수 없는 것인지 모른다. 아마 몸으로 체득한 지혜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말한 “저는 그 사람 장점만 보고 가렵니다.”라는 말은 초기경전과 청정도론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연민하는 경우
신, 구, 의 삼업 중에서 하나만 청정해도 그것 하나만 보고 가는 것이다. 부부사이가 좋지 않아서 싸움 그칠 날 없어도 배우자의 장점 하나만 보고 가면 헤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 구, 의 삼업이 모두 청정하지 못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한 해법도 니까야에 있다. 그것은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십학행을 하는 자에게 어떻게 연민의 마음을 내야 할까? 이는“이와 같은 사람에 대하여 이와 같이 ‘아, 이 존자는 신체적인 악행을 끊어버리고 신체적인 선행을 닦아야 한다. 언어적인 악행을 끊어버리고 언어적인 선행을 닦아야 한다. 정신적인 악행을 끊어버리고 정신적인 선행을 닦아야 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존자가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곳 지옥에 태어나지 말아야 한다.’라고 연민을 일으키고 자비를 일으키고 동정을 일으켜야 합니다.”(A5.161)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신, 구, 의 삼업이 청정하지 못한 자는 악행을 일삼는 자이다. 살생하고, 도둑질하고, 음행하고, 거짓말하고, 이간질하고, 욕지거리하고, 꾸며대는 말을 하고, 탐욕스럽고, 분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잘못된 견해를 갖는 십악행을 말한다. 이런 자는 멀리 하는 것이 좋다.
십악행을 하는 자는 가까이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배척해서는 안된다. 다만 연민의 마음으로 대할 뿐이다. 그래서 삼업이 청정하지 못한 자를 대할 때는 연민, 자비, 동정을 일으키라고 했다. 왜 그런가? 내가 원한의 마음을 내거나 복수하지 않아도 자신이 지은 행위에 따라 업보가 성숙되면 악처에 떨어져 고통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면만 본다면
신, 구, 의 삼업 중에 하나만 청정해도 그것 하나만 보고 가야 한다. 단점 보다는 장점을 보고 가자는 것이다. 만약 단점만 보고서 쳐 낸다면 이 세상에 남아 날 사람이 없다. 자연인처럼 심산유곡에서 홀로 살아야 할 것이다. 단점만 보고 산다면 이 세상은 홀로 사는 사람들로 넘쳐 날 것이다.
이 세상은 결코 홀로 살 수 없다. 연기법적으로 따졌을 때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어떤 식으로든지 관계를 맺고 살아 간다. 비록 그 사람이 원한 맺힌 사람이긴 하지만 그 사람에게 좋은 구석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좋은 면만 본다면 그 사람에게서 원한의 마음이 일어날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저는 그 사람의 장점만 보고 가렵니다.”라는 말이 정답이 된다.
2021-10-1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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