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공양할 만한 사람에게 공양청(供養請)하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0. 26. 11:25

공양할 만한 사람에게 공양청(供養請)하면

 

 

금요모임에서 두번째로 독송한 것은 청식(請食)에 대한 것이다. 금요니까야강독모임 교재 생활속의 명상수행에서는 계행을 갖춘 수행자가 가정에서 주는 축복은 무엇인가?’라고 되어 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가정의 경(Kulasutta)’(A5.199)에 대한 것이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이 경은 앙굿따라니까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경이라고 한다. 출가수행자를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설법을 듣는 것을 말한다. 앙굿따라니까야는 다른 니까야와는 달리 교훈적인 내용이 많기 때문에 재가자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님들이 가정을 찾는 경우는

 

출가수행자에게 보시하면 큰공덕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경에 따르면 계행을 갖춘 자들이라고 했다. 계행이 청정한 수행자를 가정에 초대했을 때 구체적으로 어떤 공덕이 있을까? 부처님은 다섯 가지를 말했다. 공통적으로 천상으로 이끈다. 이는 계행청정 수행자가 가정을 찾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마음을 청정히 하는데”(A5.199)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계행청정 스님들을 보기만 해도 마음이 청정해지는 것을 말한다.

 

스님들이 가정을 찾는 경우는 어떤 때일까? 경에서는 계행이 청정한 수행자들을 보면 마음이 청정해져서 하늘나라로 이끌 것이라고 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문득 청정도론에서 본 내용이 떠 올랐다. 그것은 임종 때 수행승을 집으로 초대하여 임종순간을 함께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청정도론 문구는 다음과 같다.

 

 

또한 다른 자에게는 임종의 때 친지들이 여보시오, 그대를 위하여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니, 마음을 청정하게 하십시오.”라고 말하며, 화환-깃발 등을 통해서 형상의 대상 또는 가르침의 청문과 음악의 공양 등에 의한 소리의 대상, 또는 향연과 훈향 등에 의한 냄새의 대상, 또는 여보시오, 그대를 위하여 보시할 이 시물을 맛보시오.”라고 말하며 맛보게 하는 꿀과 당밀 등에 의한 맛의 대상, “여보시오, 그대를 위하여 보시할 이 시물을 만져보시오.”라고 말하며 접촉하게 허는 지나포, 쏘마라포 등에 의한 감촉의 대상을 다섯 감관의 문에 가져온다.”(Vism.17.142)

 

 

청정도론 제17지혜의 지평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이는 십이연기에서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다라는 형성-식의 고리에 대한 것으로 업과 결생에 대한 설명이다. 임종순간에 다섯 감관의 문을 청정하게 함으로써 천상에 태어나게 유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스리랑카 청식제도를 보면

 

초기경전을 보면 종종 수행승이 가정을 방문하여 축원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중생의 애경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생일, , 이사 등 가정 행사가 있을 때 스님을 초청하여 축원 받는 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일은 현재도 남방 테라와다불교 국가에서도 볼 수 있다.

 

 

스리랑카에는 청식제도가 있다. 스님을 초청하여 공양하는 것이다. 이를 공양청 또는 청식이라고 한다. 마성스님의 출가자의 밥값이라는 글에 따르면 남방불교의 승려들은 지금도 걸식에 의존하거나 신도들의 청식(請食)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라고 했다. 걸식과 청식, 이 두 가지로 출가수행자가 생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출가자가 걸식과 청식에 의존하는 것은 밥을 지어먹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테라와다불교 사원에는 공양간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마성스님의 글에 따르면 스리랑카의 경우 탁발의 전통은 점점 사라지고 신도들에 의한 청식이 일반화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청식은 율장에 어긋나는 것일까?

 

 

출가자가 걸식에 의존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부처님도 평생 걸식에 의존했다. 그런데 부처님은 청식도 허락했다는 것이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숫따니빠따 셀라의 경’(Sn.3.7)을 보면 세존이신 고따마께서는 수행승의 참모임과 함께 내일 저의 식사를 받아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외도가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 친 이백 오십인을 집으로 초대하여 공양하겠다는 것이다.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에서도 청식장면이 있다. 기녀 암바빨리가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수행승의 무리와 함께 내일 저의 공양을 받아 주십시오.”(D16.41)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처럼 청식은 부처님 당시에서부터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테라와다불교의 사대축원

 

공양청을 하여 청식을 하면 축원을 해준다. 음식물을 배풀어 준 사람을 위해 축원해주는 것이다. 여기서 공양청하는 자에 대하여 단월(檀越) 또는 시주(施主)라고 말한다. 단월이라는 말은 빠알리어 다나(dāna)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나의 음역인 것이다. 영어로는 ‘almsgiving’이라고 말한다.

 

축원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법구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장로가 “아유 완노 수캉 발랑(āyu vaṇṇo sukha bala)”하며 축원해주는 것이다. 이는 “장수하고 아름답고 즐겁고 건강하기를!”라는 뜻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예경하는 습관이 있고 항상 장로를 존경하는 자에게 네 가지 사실이 개선되니, 수명과 용모와 안락과 기력이다.(Dhp.109)라고 했다.

 

초기경전을 보면 도처에서 시주에 대한 축원이 있다. 그 중에서도 앙굿따라니까야 음식에 대한 보시의 경이 있다. 이 경은 법구경 109번 게송에서 언급된 사대축원 즉, 장수, 용모, 행복, 건강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음식을 보시하는 고귀한 제자는 보시받는 자들에게 네 가지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생명을 보시하는 것이고 아름다움을 보시는 것이고 행복을 보시하는 것이고 힘을 보시하는 것이다.”(A4.59)라고 되어 있다.

 

음식을 보시하면 보시는 자나 보시 받는 자나 모두 장수, 용모, 행복, 건강이 기대된다. 법구경에서는 장로가 보시하는 자에게 사대축원을 해 주고 있고, 앙굿따라니까야 음식에 대한 보시의 경에서는 보시 받는 자에게 장수, 용모, 행복, 건강이 기대될 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네 가지에 대하여 경에서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생명을 보시하여 그 천상이나 인간의 생명을 나누어 가진다. 아름다움을 보시하여 그 천상이나 인간의 생명을 나누어 가진다. 행복을 보시하여 그 천상이나 인간의 생명을 나누어 가진다. 힘을 보시하여 그 천상이나 인간의 생명을 나누어 가진다.”(A5.59)

 

 

음식을 보시하면 보시를 하는 자나 보시를 받는 자나 공통적으로 생명(장수: āyu), 아름다움(용모: vaṇṇa), 행복(즐거움: sukha), (건강: bala)이 기대된다. 이를 경에서는 나누어 가진다.”라고 했다. 보시를 하면 서로 좋은 것이다. 보시하는 자는 기쁨으로 보시하고, 보시 받는 자는 즐거움으로 받는다.

 

보시를 하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사실이다. 이는 다름 아닌 천상의 행복이다. 보시를 하면 이미 천상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보시를 함으로 인하여 생명(장수), 아름다움(용모), 행복(즐거움), (건강)이라는 천상락을 이미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라와다불교의 사대축원이라고 한다.

 

임종순간이 중요한 이유는

 

임종순간이 매우 중요하다. 테라와다불교 국가에서 수행승을 집으로 초대하여 임종을 앞둔 자에게 다섯 감관의 문을 청정하게 해 주는 것은 하늘나라로 인도해 주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의 초전법륜경 법문집에 있는 주석을 보면 행을 조건으로 식이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그러므로 임종직전에 가지는 마음 태도가 상당히 중요하다. 평화로운 임종을 맞기 위해서는 평소에 봉사하는 삶과 도덕적인 삶, 즉 보시와 지계의 삶을 살아야 하며 특히 임종 시에는 이생에 대한 애착을 모두 털어버려야 한다. 그래서 상좌부 불교국가에서는 죽어가는 사람에게「대념처경」을 독송해주거나 그로 하여금 생전에 지은 선업을 기억해 내도록 유도하여 마지막 순간에 좋은 생각을 일으키도록 도와주고 있다. “(마하시 사야도의 초전법륜경법문, 36번 각주)

 

 

임종직전에 다음 생이 결정된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임종직전에는 마지막 죽음의식이 있게 되는데, 이 의식은 업(kamma)이나 업의 표상(kamma-nimitta)이나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남을 말한다. 그래서 임종순간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임종순간에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문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죽어 가는 자에게 시각적으로는 화환-깃발을, 청각적으로는 청문과 음악을, 후각적으로는 향연과 훈향을, 미각적으로는 꿀과 당밀을, 촉각적으로는 지나포나 쏘마라포를 함께 하면 좋은 곳에 태어나게 된다고 한다.

 

임종을 앞둔 자에게 가장 필요로 되는 것은 아마도 가르침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는 청문에 해당된다. 스님이 죽어가는 자의 귀에 가르침을 들려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계행이 청정한 수행자를 청식하는 것은 커다란 공덕을 짓는 것이 된다. 임종순간에 보시공덕을 회상할 때 선처로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죽음의 순간에 법문해 주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려 주었을 때 편안한 마음으로 저 세상에 갈 것이다.

 

계행이 청정한 수행자를 공양청하여 청식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부처님 당시부터 내려 오는 훌륭한 제도이다. 이와 같은 청식제도는 많은 이점이 있다. 무엇보다 소통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탁발과 청식은 승가와 중생과의 커뮤니케이션입니다.”라고 했다. , 생일, 이사 등 특별한 날에 스님을 초청하여 음식공양을 올리면서 축원 받는 것은 승가나 재가에게 모두 득이 되는 훌륭한 일임을 말한다.

 

청식공덕을 다섯 가지로 요약하면

 

금요모임에서 두번째로 합송한 것은가정의 경’(A5.199)이다. 계행청정한 출가수행자가 가정을 찾아오는 것에 대하여 다섯 가지 이득으로 요약된다.

 

첫째, 청정한 출가자들이 가정에 찾아오면 마음이 청정해진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천상세계로 들어가는 길에 들어선 것(saggasavattanika)”(A5.199)이라고 했다. 이는 아마도 임종 때 방문하여 축원해 주는 것이 연상된다. 귀에 입을 대고 부처님 말씀을 들려주었을 때 그 가르침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난다면 천상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둘째, 청정한 출가자들이 가정에 찾아오면 그들을 보고 일어나 맞이하고 인사하고 자리를 내준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보다 높은 가문으로 이끄는 길에 들어선 것(uccākulīnasavattanika)”(A5.199)이라고 했다. 이는 무슨 뜻일까? 높은 가문에서 거듭 태어남을 말한다. 오늘날 명문가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이는 오늘날 명예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청정한 출가자들이 가정에 찾아오면 그들에게 인색의 때를 제거한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위대한 능력으로 이끄는 길에 들어선 것 (mahesakkhasavattanika)”(A5.199)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됨을 말한다. 이는 오늘날 권세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넷째, 청정한 출가자들이 가정에 찾아오면 그들에게 능력에 따라 힘에 따라 보시한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대자산가로 이끄는 길에 들어선 것 (mahābhogasavattanika)”(A5.199)이라고 했다. 이는 오늘날 재벌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능력에 따라 힘에 따라(yathāsatti yathābalaṃ)” 보시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능력껏 보시하는 것이다.

 

능력껏(yathāsatti) 보시하면 재벌이 보시하는 것보다 더 큰 과보를 받을 수 있다. 왜 그런가? 한달 수입이 백만원인 사람이 십만원 보시하면 10%가 된다. 한달 수입이 100억원인 자가 1억원을 보시하면 1%밖에 되지 않는다. 보시 비율로 따지면 십만원 보시하는 자가 공덕이 더 크다. 그래서 보시는 능력껏 하는 것이라고 했다.

 

다섯째, 청정한 출가자들이 가정에 찾아오면 그들에게 묻고 질문하고 가르침을 들으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커다란 지혜로 이끄는 길에 들어선 것 (mahāpaññāsavattanika)” (A5.199)이라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묻고 질문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청법이다.

 

부처님은 물어보아야 알려 주었다. 아무나 붙잡고 가르침을 설하지 않았다. 가르침은 청해야 설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뿐니야여, 수행승이 1)믿음을 갖추었고, 2)찾아와서, 3)가까이 앉아, 4)질문하고, 5)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듣고, 6)가르침을 기억하고, 7)기억한 가르침의 의미를 탐구하더라도, 8)의미를 알고 원리를 알아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때까지 여래가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A8.82)라고 말씀하셨다.

 

공양할 만한 사람에게 공양청(供養請)하면

 

한국에서는 청식제도가 없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탁발이 없으니 청식도 없는 것이다. 왜 그럴까? 승가에서는 거처에서 밥을 해먹기 때문이다.

 

걸식이나 청식을 하려면 공양간이 없어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조리해 먹을 쌀이나 음식재료 없음을 말한다. 이와 관련하여 테리가타를 보면 출가하기 전의 로히니 장로니가 소녀 시절이었을 때를 회상하는 대목이 있다. 이는 창고에도 항아리에도 바구니에도 자신의 소유를 저장하지 않고, 줄 준비된 것만 구합니다.”(Thig.151)라고 했다.

 

출가수행자는 기본적으로 걸식에 의존한다. 그래서 탁발 나가면 조리된 음식만 받는다. 조리되지 않은 날곡식이나 음식재료를 받지 않는 것이다. 만일 받게 된다면 거처에서 밥을 해먹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걸식은 사라지게 된다. 청식도 사라지게 된다.

 

한국에서는 걸식도 없고 청식도 없기 때문에 스님들이 가정을 방문할 이유가 별로 없다. 또한 오늘날 가정은 대부분 핵가족이다. 자녀들이 출가하면 둘 또는 하나만 남는다. 청식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이다.

 

스리랑카의 경우 걸식보다는 청식에 의존하는 비율이 점차 높아져 가고 있다고 한다. 스리랑카에서 공부하고 온 마성스님에 따르면 신도가 3만명 정도 되는 규모가 있는 사찰의 경우 일년 청식스케줄이 잡혀 있다고 한다. 스님들을 초대하여 점심공양 올리기가 쉽지 않음을 말한다.

 

한국에서도 청식제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테라와다불교가 도입됨에 따라 공양청 형식으로 청식이 이루어진다. 한국테라와다불교의 경우 오후불식을 지키고 있다. 그래서 점심의 경우 봉사자가 준비된 음식을 가지고 가서 공양을 올리거나 식당으로 모셔서 청식형식으로 공양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정으로 초대하여 공양하는 모습은 보기 힘든 것 같다.

 

스님을 초대하여 공양하면 그 공덕이 매우 크다고 했다. 경에서는 사대축원으로 나타난다. 이는 아유완노수캉발랑이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 말은 장수하시고, 아름답고, 행복하시고, 건강하시기를!”라며 축원해주는 것이다. 이런 축원은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건강, 학업, 사업, 치유와 같은 사대축원과는 다른 것이다.

 

테라와다 사대축원은 오래오래 살아서 선업공덕 쌓으라는 의미가 크다. 그렇게 선업공덕을 쌓으면 천상에 태어날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장수하시고, 아름답고, 행복하시고, 건강하시기를!”라며 축원해주는 것은 하늘나라에 태어나게 해달라는 축원과도 같은 것이다. 한국적 현실에서 공양할 만한 사람에게 공양청(供養請)하면 훌륭한 보시공덕이 될 것이다.

 

 

2021-10-2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