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융의 분석심리학에 심취했으나
코로나펜데믹이 끝나가는 것 같다. 뉴스를 보니 어제 10월 22일부로 전체국민의 70%가 2차 접종을 마쳤다고 한다. 집단면역이 되는 수치가 된다. 그래서일까 다음달 부터는 정상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줌모임도 이제 종말을 고하고 대면모임으로 가는 것일까?
어제 시월 두번째 금요니까야강독모임이 줌으로 열렸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줌모임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여진은 있을 것이다. 앞으로 한두달 더 갈지 모른다. 아니 줌으로 계속하게 될지도 모른다.
코로나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제 코로나이전으로 돌아가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한다. 줌모임도 그런 것일까?
줌모임은 전혀 생각치 못했던 것이다. 작년 초에 코로나가 유행했을 때 몇 개월이면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1년이 가고 이제 2년이 되었다. 무려 2년 동안 전쟁아닌 전쟁을 치룬 것이다. 과연 전쟁전으로 돌아 갈 수 있을까?
산만한 줌모임
줌모임에는 장단점이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줌모임 만한 것이 없다. 금요모임에서도 멀리서 오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 않다. 클릭 몇번만 하면 어느곳에서나 들어올 수 있으나 반드시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줌모임이 아무리 장점이 많다고 해도 대면모임만 못하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집중이 되지 않는 것이다. 분위기가 산만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오디오를 켜 놓은 상태에서 주변의 잡음이 그대로 들어온다. 아마 사용방법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줌모임하면 자신의 얼굴이 그대로 노출된다. 이런 것이 부담스러운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얼굴을 숨기고 듣기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다 보니 아무런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묻고 질문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번 줌모임에서 세개의 경을 독송했다. 첫번째로 독송한 것은 꿈에 대한 경이다. 제목은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기 전에 꾼 다섯 가지 꿈’으로 되어 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커다란 꿈의 경(Mahāsupinasuttaṃ)’(A5.196)이다.
한때 꿈을 해석해 보고자 했으나
흔히 말하기를 꿈보다는 해몽이라는 말이 있다. 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일까? 이는 꿈이라는 것이 황동하고 해괴망측한 장면이 많은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악몽도 길몽이라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세계는 뒤죽박죽이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될 일도 일어난다. 꿈속에서는 살인도 하고 강간을 하는 등 오계를 어기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대체 이런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한때 꿈을 해석해 보고자 했다. 융의 분석심리학을 읽고 나서부터 그런 시도를 해 보았다. 아침에 잠에서 깨었을 때 어떤 의미인지 분석해 보고자 한 것이다. 이는 꿈이 상징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언어를 떠난 상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해괴하고 이상한 꿈을 꾸는 것이다. 부처님이 보살로 살 때 꿈 꾼 것도 상징으로 되어 있다.
우주적 스케일의 침상
보살의 첫번째 꿈은 침상꿈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침상은 우주적 스케일이다. 침상은 커다란 땅과 같다고 했다. 어느 정도일까? 이는 “커다란 땅은 그의 침상이었고, 히말라야 산은 그의 베게였고, 동쪽 바다에는 그의 왼손이 놓였고, 서쪽 바다에는 그의 오른 손이 놓였고, 남쪽 바다에는 그의 양발이 놓였다.”(A5.196)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모든 꿈은 상징으로 나타난다. 이는 언어적 개념을 떠난 것이다. 그래서 갖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상징을 잘 분석하면 꿈속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파악할 수 있다. 후대 주석가들은 이 꿈의 상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커다란 땅이 그의 침상인 것은 부처님이 될 징후를 보여준 것이고, 산의 제왕 히말라야 산이 그의 베게였던 것은 일체지자가 될 징후였고, 동쪽 바다에 그의 왼손이 놓였고, 서쪽바다에 그의 오른손이 놓였고, 남쪽 바다에 그의 양발이 놓였던 것은 불퇴전의 법륜을 굴리는 것이다.”(Mrp.III.320)
부처님은 보살로 살 때 수미산을 아우르는 꿈을 꾸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정등각자가 될 자의 꿈이라고 했다. 그래서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위해서 그에게 이와 같은 첫번째 커다란 꿈이 나타났던 것이다.”(A5.196)라고 한 것이다.
배꼽에서 풀이 자라서 하늘 끝까지
보살의 두번째 꿈은 배꼽풀에 대한 것이다. 배꼽에서 풀이 자라서 하늘 끝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를 어떤 상징으로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고귀한 여덟 가지 길을 원만히 깨달아 신들과 인간들에게 설명하는 자이다.”(A5.196)라고 했다. 정등각자가 되어서 팔정도를 설하는 것을 말한다.
어떻게 배꼽에서 풀이 자라서 하늘 끝까지 이를 수 있을까? 꿈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언어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상징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고대인도 신화를 예로 들었다. 배꼽에서 연꽃이 솟아 나오는 것을 모티브로 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왜 배꼽일까? 고대인도신화에 따르면 배꼽에서 우주에너지가 솟아나온다고 했다.
배꼽풀을 뜻하는 말은 빠알리어로 띠리야(tiriyā)이다. 빠알리 사전을 찾아보니 ‘a kind of grass or creeper’라고 설명되어 있다. 일종의 덩굴식물을 말한다. 이를 한자어로는 만초(蔓草)라고 되어 있다. 띠리야는 덩굴져서 뻗어 나가는 덩굴풀이다.
덩굴풀과 팔정도는 어떤 관계일까? 덩굴풀이 상징하는 것은 단계적임을 말한다. 그래서 전재성선생은 팔정도가 여덟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덩굴풀이 하늘 끝까지 이른 것에 대하여 여덟 단계로 보았다. 이는 인간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의 신들도 교화 대상이 됨을 말한다. 그래서 경에서는 팔정도를 깨달은 자에 대하여 “신들과 인간들에게 설명하는 자이다.”(A5.196)라고 한 것이다.
흰 옷은 재가불자의 상징
보살의 세번째 꿈은 흰벌레들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흰 벌레들이 검은 머리를 했는데 발에서 기어올라 무릎까지 덮었다.”라고 했다. 이와 같은 상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경에서 흰 벌레들이 검은 머리를 한 것은 재가불자들을 상징한 것이다. 이는 재가불자가 흰옷을 입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에서 재가불자들은 흰옷 입은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다.
흰옷은 재가불자의 상징이다. 오늘날 남방 테라와다불교에서도 볼 수 있다. 웨삭주간에 재가불자들은 흰옷을 입는다. 성지순례 때도 발견된다. 인도성지 순례 갔었는데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불자들 대부분은 단체로 흰옷을 입었다. 한국불자들만 울굿불긋 컬러풀한 복장한 것을 발견했다.
보살의 꿈에서 ‘검은 머리를 한 흰벌레들’은 재가불자들을 상징한다. 이에 대한 해몽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많은 흰옷 입은 재가의 신도들은 여래에게 목숨이 다하도록 귀의한다.”(A5.196)라고 했다.
사성계급을 상징하는 네 마리 새
보살의 네번째 꿈은 네 마리 새에 대한 것이다. 이는 “네 마리의 다양한 색깔을 띤 새가 사방에서 와서 발아래 떨어져 모두 흰 색으로 변했다.”(A5.196)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네 마리 새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수행승들이여, 네 가지 계급 즉 왕족, 바라문, 평민, 노예가 있는데, 그들은 여래가 설한 가르침과 계율 가운데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해서 위없는 해탈을 실현한다.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위해서 그에게 이와 같은 네 번째 커다란 꿈이 나타났던 것이다.”(A5.196)
꿈에서 네 종류의 컬러풀한 새는 고대인도에서 사성계급을 상징한다. 그런데 어느 계급도 부처님의 교단에 들어오면 계급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빠라하다의 경’(A8.19)에서도 확인된다.
부처님은 바다의 여덟 가지 특징을 설명하면서 담마(經藏)와 위나야(律藏)에 대하여 설명했다. 여덟 가지 담마와 위나야 특징 중에서 네 번째의 것을 보면 “어떠한 네 계급에 속하는 사람이든 즉, 왕족, 바라문, 평민, 노예가 있는데, 그들은 여래가 설한 가르침과 계율 가운데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면, 예전의 이름과 성을 버리고 ‘수행자 싸끼야의 아들’이라고 불립니다.”(A8.19)라고 했다.
부처님의 교단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왕족이라 하여 더 대우받는 것도 없고 천민이라 멸시받는 것도 아니다. 왕족이든 천민이든 먼저 들어온 자가 선임이 되어서 대우받는다. 이는 율장에서도 확인된다.
율장소품을 보면 싸끼야 족의 왕족들 출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 중에 왕이었던 밧디야가 있었다. 율장소품 제7장 ‘참모임분열의 다발’에 실려 있는 ‘여섯 명의 싸끼야 족의 출가’가 바로 그것이다.
싸끼야 족의 왕 밧디야를 비롯하여 여섯 명의 왕족은 부처님 교단으로 출가했다. 그런데 왕은 출가하기 전에 왕실 이발사 우빨리를 먼저 출가시켰다. 왕은 왜 이렇게 했을까? 놀랍게도 왕족들이 부처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세존이시여, 저희 싸끼야 족들은 교만합니다. 세존이시여, 여기 이발사 우빨리는 오랜 세월 우리의 하인이었습니다. 그를 먼저 출가시켜주십시오. 우리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 일어서 맞이하고, 합장하고, 공경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하면 우리 싸끼야족들의 싸끼야족 교만이 제거 될 것입니다.”(Vin.II.183, 여섯 명의 싸끼야 족의 출가)
왕족들은 출가하기 전에 자신들에게 남아 있는 자만을 해소하기 위해서 이발사 우빨리를 먼저 출가했다. 부처님의 상가에서 먼저 들어온 사람이 선임이 되기 때문에 공양해야 할 것이다. 왕족은 자신들의 교만을 제거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후임이 된 것이다.
고대인도의 사성계급의 잔재는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계급은 존재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상가에서는 계급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예전의 이름과 성을 버리고 ‘수행자 싸끼야의 아들’이라고 불립니다.”(A8.19)라고 했다. 계급과 관계없이 모두 부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똥 꿈을 꾸었는데
보살의 다섯번째 꿈은 똥산에 대한 것이다. 흔히 말하는 똥 꿈이다. 어떤 꿈일까? 이는 “똥으로 이루어진 산을 아주 높이 올라가면서 몸에 똥을 묻히지 않았다.”(A5.196)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어떤 상징일까?
똥은 조금만 묻어도 악취가 난다. 그래서 똥냄새가 나면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다. 만약 그가 똥으로 된 산을 오른다면 똥을 묻히지 않고 오를 수 있을까?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묻히고 말 것이다.
똥은 조금만 묻어도 악취가 난다고 했다. 이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보살은 똥을 묻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상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세상은 똥과 같은 곳이다. 왜 똥과 같은 곳인가? 경전을 근거로 말할 수 있다. 상윳따니까야 ‘똥의 경’을 보면 “어떤 돈벌레가 돈을 먹고 돈으로 배를 채우고 돈으로 충만하고도 그 앞에 큰 돈덩이가 남아 있다면, 그 돈벌레는 ‘나는 돈을 먹고 돈으로 배를 채우고 돈으로 충만하고도 내 앞에 큰 돈덩이가 남아 있다.’고 다른 돈벌레들을 무시한다.”(S17.5)라고 했다. 여기서 똥을 돈으로 바꾸면 오늘날 금전만능주의 세상이 된다.
똥을 빠알리어로 밀라(mīḷha)라고 한다. 영어로는 ‘excrement; dung’이다. 여기서 밀라가 영어로 ‘덩(dung)’인 것은 우리말로 ‘똥’이라고 말하는 것과 대단히 유사하다.
오늘날 황금만능주의 세상은 똥의 세상이나 다름없다. 황금을 추구하면 할수록 악취가 나기 때문이다. 온갖 불법, 탈법, 편법으로 불로소득의 성을 이루었을 때 똥의 성이라 아니할 수 없다.
보살이 꿈에서 똥산에 올라 갈 때 똥을 전혀 묻히지 않았다고 했다. 이와 같은 상징에 대하여 부처님은 “여래는 옷과 탁발음식과 와좌구와 필수약을 얻지만, 여래는 거기에 묶이지 않고, 정신을 잃지 않고, 탐착하지 않고, 유혹을 보고, 여읨을 갖추어, 그것을 수용한다.”(A5.196)라고 해석했다.
출가수행자는 탁발에 의존한다. 음식 등 사대필수품 이외에는 소유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소유는 반드시 물질적인 것 만을 말하지 않는다. 정신적 무소유도 있다.
만약 그가 번뇌로 가득하면 많은 것을 소유하는 자가 된다. 무소유는 청정한 삶으로 완성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탁발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네 가지 필수품으로 사는 자에게 악취는 나지 않는다. 이는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멀리 했기 때문이다. 마치 진흙탕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상윳따니까야 꽃의 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가 물속에서 생겨나 물속에서 자라 물위로 솟아올라 물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래는 세상에서 성장했으나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S22.94)
해몽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면
빠알리어로 꿈을 수삐나(supina)라고 한다. 빠알리사전 PCED194에서 키워드 검색해 보니 관련 경은 ‘D.I,9, 54; S.I,198; IV,117 Sn.360, 807, 927; A.III,240; J.I,69’로 파악된다. 이 중에서 보살의 다섯 가지 꿈과 이에 대한 해몽은 ‘A.III,240’이다. 이는 앞서 설명한 앙굿따라니까야 ‘커다란 꿈의 경’(A5.196)을 말한다.
방대한 빠알리 삼장에서 꿈에 대한 가르침은 많지 않다. 왜 그럴까? 부처님의 관심사는 꿈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대신 현재 여기에서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 주된 가르침이다. 어쩌면 꿈은 꿈에 지나지 않는지 모른다.
동아시아불교에서 어떤 선사들은 이 세상을 꿈속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 꿈 깨는 것을 깨달음과 같은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꿈의 비유를 들어 깨달음을 설명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초기경전은 꿈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거의 유일하게 앙굿따라니까야에 하나의 경이 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초기경전에 꿈이야기가 없을까? 이는 부처님이 해몽하는 것을 금했기 때문이다. 디가니까야 도처에서 발견되는 긴 크기의 계행을 보면 다음과 같다.
“존귀한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신자들이 보시한 음식을 향유하면서 이와 같이 예를 들어, 수족에 의한 점괘, 전조에 의한 점괘, 조짐에 의한 점괘, 해몽, 관상…와 같은 저속한 지식으로 삿된 삶을 산다. 그러나 수행자 고따마는 이러한 저속한 지식에 의한 삿된 삶을 여의었다.”(D1.21)
부처님은 수행자들에게 점을 보지 말라고 했다. 당연히 해몽하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그럼에도 점을 보고 해몽을 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면 부처님 제자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신도의 보시로 유지하는 수행자가 신도들을 대상으로 점이나 관상, 해몽을 해 주어서 돈을 번다면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배신이라고 볼 수 있다. 초기경전에서 꿈이야기가 없고 꿈의 해몽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이유라고 본다.
한때 융의 분석심리학에 심취했으나
요즘 꿈 해석을 하지 않는다. 한때 융의 분석심리학에 심취하여 꿈을 해석해 보고자 했다. 그래서 이부영 교수가 지은 융심리학에 대한 책을 여러 번 보았다.
이부영 교수의 융분석심리학 책은 모두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작은 ‘그림자’로 우리 마음 속의 어두운 반려자에 대한 것이다. 제2부작은’ 아니마와 아니무스’로 남성속의 여성, 여성속의 남성에 대한 것이다. 제3부작은 ‘자기와 자기실현’으로 하나의 경지, 하나가 되는 길에 대한 것이다.
이부영 교수의 3부작과 융의 ‘인간의 상징’을 읽었다. 꿈의 분석에 대한 것이다. 꿈의 분석을 통하여 무의식을 의식화 했을 때 자기가 실현된다고 했다. 그래서 책에서는 다양한 상징에 대한 해석이 있다. 이를 다른 말로 해몽이라 할 수 있다.
해몽하여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까? 불교를 만나기 전에는 관심을 가졌으나 지금은 그만 두었다. 꿈은 꿈일 뿐이다. 꿈속에서 비언어적인 상징을 보아 그것을 해석하여 무언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다. 차라리 꿈을 꾸지 않는 삶이 더 나을 것이다.
길몽이든 악몽이든 꿈을 꾸어도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꿈속에서 일은 꿈 깨면 잊어버린다. 그럼에도 꿈을 살려서 상징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어리석게 보인다.
이 세상은 꿈속의 세상일까? 어떤 선사들은 그렇게 말한다. 만일 이 세상이 꿈속의 세상이라면 오계를 어겨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런가? 꿈속에서는 살인도 하고 강간도 하기 때문이다.
꿈은 꿈일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꿈속에서 만난 사람을 잠에서 깨어난 사람이 다시 볼 수 없듯,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면, 다시는 볼 수 없습니다.”(Stn.807)라고 했다.
“길조의 점, 천지이변의 점,
해몽, 관상 보는 일을 완전히 버리고,
길흉의 판단을 버리면,
그는 세상에서 바르게 유행할 것입니다.”(Stn.360)
2021-10-2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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