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늙어서 슬프다고 하는데

담마다사 이병욱 2021. 6. 28. 09:53

늙어서 슬프다고 하는데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 같다. 세상을 볼 수 있는 창 중의 하나인 페이스북에서는 늙음에 대한 한탄의 목소리가 많다. 시인의 시를 보면 늙음과 슬픔이 주제이다. 기승전결이라는 말이 있는데 기승전슬픔으로 끝나는 것 같다.

 

늙음에 대하여 일관되게 글을 올리는 사람도 있다. 늙어 가는 것을 자조적으로 묘사한 글이다. 늙어 버린 자신을 보면서 어떻게 하다 내가 이렇게 되었을까?”라는 표현이 주류를 이룬다. 이렇게 본다면 늙음이라는 것은 삶의 저주와도 같은 것이다.

 

부처님도 늙음에 대해서 말했다. 부처님은 나이가 들어 노쇠한 자신을 발견하고서 “부끄러워할지어다, 가련한 늙음이여!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는 늙음이여! 잠시 즐겁게 해 주는 영상 늙어감에 따라 산산이 부서지네.”(S48.41)라고 했다.

 

어느 누구도 늙음을 비켜 갈 수 없다. 늙음 타령한다고 해서 늙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늙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백 세를 살더라도 결국 죽음을 궁극적인 것으로 할 뿐 누구도 예외로 하지 않고 그것은 모든 것을 부수어 버리네.(S48.41)라고 한 것이다.

늙음과 슬픔에 대한 글을 보면 대안이 없다. 그저 늙어 가는 것에 대하여 슬퍼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없다. 어쩌면 늙어 가는 것에 대한 분노를 자조와 슬픔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마치 죽음을 앞두고 분노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죽음의 5단계

 

죽음의 5단계가 있다. 늙어서 병들어 죽어 가는 사람이 겪는 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부정(Denial)한다. 그 다음에는 분노(Anger)한다. 분노의 단계가 지나면 협상(Bargaining), 침울(Depression), 수용(Acceptance)단계로 진행된다. 이를 엘리지베스 퀴블로 로스의 죽음의 5단계라고 한다. 유튜브에서 방영된 불교TV(BTN) 영상에서 본 것이다.

 

 

시한부 삶을 살게 되었을 때 누구나 5단계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5단계 중에서 협상단계(Bargaining)가 있다. 이 단계가 되면 보시를 하고 자선을 하는 등 사람이 달라진다고 한다. 평소에 하지 않던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일종의 신과 거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협상의 단계를 지나면 어찌할 수 없음을 알게 되어 침울단계가 된다고 한다.

 

평소 하지 않은 행위를 했을 때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한다. 인색한 사람이 보시를 한다든가, 잔인한 사람이 자애로은 모습을 보였을 때 죽을 때가 되었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무언가 충격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의 큰 곡절이 생겼을 때 사람이 변한다.

 

시한부 삶에서 최종단계는 수용단계이다. 이 방법 저 방법 다 써 보았을 때 어찌 할 수 없음을 알았을 때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늙음에 대하여 한탄하고 슬퍼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마도 분노의 단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고 감의 이치를 모르니

 

늙음은 슬퍼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슬퍼하면 더욱더 슬퍼질 뿐이다. 모습도 초췌해진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들은 세상의 이치를 알아 슬퍼하지 않습니다.”(Stn.581)라고 했다.

 

세상의 이치(lokapariyāya)를 알면 슬퍼하지 않는다고 했다. 세상의 이치란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그대는 오거나 가는 사람의 그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대는 그 양극을 보지 않고 부질없이 슬피 웁니다.”(Stn.582)

 

미혹한 자가 자기를 해치며,

비탄해한다고 해서 무슨 이익이라도 생긴다면,

현명한 자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Stn.583)

 

울고 슬퍼하는 것으로서는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만 더욱 더 괴로움이 생겨나고 몸만 여윌 따름입니다.” (Stn.584)

 

 

사람들은 늙음에 대하여 분노하고 슬퍼한다. 병이 들어도 분노하고 슬퍼한다. 이는 생, , , 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생과 사에 대한 것이다. 오는 것은 생이고 가는 것은 죽음을 말한다. 삶과 죽음이라는 양극단을 보지 못하니 슬피운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늙음과 병듦과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젊고 건강할 때는 이 젊음과 건강이 천년만년 지속될 것으로 생각하여 젊음의 교만과 건강의 교만으로 살아간다.

 

젊음도 건강도 늙음과 병듦에 종속될 뿐이다. 삶은 마침내 죽음에 종속된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에 대하여 안달복달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현자들은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 닥쳐도 슬퍼하지 않는다. 세상의 이치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고 가는 것의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세상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가 가장 슬퍼할 것이다. 자신이 늙고 병들어 가는 것 보다 자식을 먼저 보낸 자의 슬픔은 훨씬 더 슬픔이 클 것이다.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 여인에게 빠따짜라 장로니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했다.

 

 

“오고 가는 것의

길을 그대는 알지도 못하니,

그 뭇삶이 어디서 왔는지,

그대는 ‘나의 아들’이라고 울부짖는다.(Thig.127)

 

“오고 가는 것의

길을 그대가 알더라도,

그것을 슬퍼하지 말라.

뭇삶의 운명이 그러할 뿐이다. (Thig.128)

 

“청하지도 않았는데 이곳에 와서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이곳에서 떠났다.

도대체 어디에서 와서

며칠 동안 지내다가

여기서 다른 곳으로 가고

그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 간다. (Thig.128)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나의 아들이라고 울부짖는다. 아들을 자신의 소유로 보았을 때 슬퍼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하여 오고 감의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몸과 마음을 자아와 동일시했을 때

 

태어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났다고 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늙음과 병듦과 죽음도 역시 생물학적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이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보는 것과 같다. 몸과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보았을 때 어떤 일이 생길까?

 

얼굴 하나만 바라보고 사람이 있다.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얼굴이 그 사람의 전부와도 같다. 그런 그에게 얼굴에 뾰로지 났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뾰로지 하나 때문에 안절부절하지 못할 것이다. 얼굴을 자아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을 자아와 동일시했을 때 늙음과 병듦도 자아와 동일시된다. 그래서 참을 수 없는 것이 된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아들이 죽었을 때 우리아들이라고 한다. 아들을 소유개념으로 생가하기 때문이다. 아들을 소유로 생각하여 나의 아들이라고 여기면 슬퍼하게 된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여겼을 때 늙음과 병듦과 죽음도 자신의 것이 된다. 늙음에 분노하고 병듦에 슬퍼하고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자가 된다.

 

저 세상에서 와서 저 세상으로

 

허무주의자의 일생은 자궁과 무덤사이에 있다. 이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 때문에 단멸론적 견해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아는 자라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다. 저 세상에서 왔다가 또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이는 연기법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십이연기에서 식은 삼세양중인과로 본다면 재생연결식이 된다. 연기가 순간윤회도 있지만 일생윤회로도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든 조건 발생하는 것이다. 태어남도 조건발생에 따른 것이다.

 

발생이 있으면 소멸이 있기 마련이다.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도 있기 마련이다. 연기법적으로 본다면 지극히 당연한 이치에 해당된다. 태어남만 있고 죽음은 없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젊음만 있고 늙음이 없을 수 없다. 건강한 자는 질병으로 귀결된다. 어느 것이든지 무상하다. 변하기 때문에 괴롭다. 그럼에도 늙음과 병듦과 죽음을 나의 것이라고 붙들고 있다. 실체가 없는 것을 나의 것이라고 붙들고 있을 때 슬픔과 분노가 일어난다.

 

현명한 자들은 늙음과 병듦과 죽음에 대하여 슬퍼하지 않는다. 오고 감의 이치를 알기 때문이다. 오는 것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오는 것이 맞기는 하지만 이치를 알면 저 세상에서 오는 것이 된다. 가는 것은 무덤으로 가는 것이 맞기는 하지만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 된다.

 

오는 것처럼 갔으니

 

시인은 늙음에 대한 슬픔을 노래한다. 어떤 사람은 늙음에 대한 한탄을 말한다. 그래서 어쩌자는 것일까? 늙어 가는 것이 그토록 슬픈 것이고 늙어 가는 것이 그토록 한탄스러운 것이라면 슬픔과 한탄으로 남은 생을 보내야 할 것이다.

 

슬퍼한다고 해서 슬픔이 해결되지 않는다. 한탄한다고 해서 한탄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분노한다고 해서 분노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고 감의 이치를 알면 슬퍼하지도 않고 한탄하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을 것이다.

 

 

Peto manussarūpena,

sasaranto gamissati;

Yathāgato tathā gato,

kā tattha paridevanā

 

“죽어서 인간의 모습으로

그는 윤회하며 갈 것이리라.

오는 것처럼 갔으니,

거기에 어떠한 슬픔이 있겠는가? (Thig.130)

 

 

2021-06-2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