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월망지(見月忘指)는 담마에 대한 무지
견월망지,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것이다. 달을 보자는데 대체 무엇을 보자는 것일까?
참나를 말하는 사람이 있다. 종정스님도 참나를 말한다.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煎 本來面)이라 하여, 부모가 있기 전에 어떤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미국 어느 교회에서 법문했는데 영어로 "What is your true self?"라고 말했다.
기독교인들은 진제스님의 법문을 듣고 기립박수를 보냈다. 왜 감격하고 감동했을까? 진제스님의 참나에 대한 법문을 보고서 어느 기독교인은 바이블에도 그런 내용이 있다고 했다. 요한복음 1장에 “내가 전에 ‘내 뒤에 오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나보다 더 위대하시 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존재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분이 바로 내가 말한 그분이다.” (요한복음 1장) 라는 말이 있다는 것이다.
스님의 법문을 보면 불교나 기독교나 근본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 마치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진리는 하나인데 표현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라며 등산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것과 같다. 산의 정상은 하나인데 다만 올라 가는 길이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길희성이나 오강남과 같은 기독교에 기반한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참나에 대하여 하느님 또는 하나님의 다른 이름이라고 했다.
중국불교에서 참나는 불성과 같은 말이다. 이를 본래면목 또는 본래불이라고 한다. 내 안에 불성이 있어서 나는 이미 깨달은 자라고 말한다. 내가 본래부처라면 닦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깨달은 상태이기 때문에 수행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다만 내가 깨달은 존재임을 확인만 하면 된다. 대개 화두를 들어서 확인하고자 한다. 그래서일까 본래부처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 "이뭐꼬?"하면서 선방에서 10년, 20년, 30년, 평생을 보내는 것 같다.
어느 스님은 불성에 대해 신성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오랫동안 간화선을 한 스님은 "석가모니를 알려면 석가모니가 말한 불성을 깨달아야 하고 예수를 알려면 그쪽 말로 신이라고 하는데 영어로 ‘갓이즈인유(God is in you)’신은 네 안에 있다 이말에요. 전혀 둘이 아녜요. 종합해 보면 성인들은 사람속에 있는 길을 보고 길이 도에요. 불성을 보고 신을 보고 말하는 거에요.”라고 법문했다.
한국에서 선을 하는 스님들은 공통적으로 불성을 말한다. 불성을 보아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견월망지,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말과 같다. 과연 그들은 달을 보았을까?
흔히 견성성불이라고 말한다. 선종의 종지이기도 한 견성성불은 요즘 유튜브시대에 아무나 말하는 것 같다. 유튜브에는 자칭타칭 깨달은 자가 있어서 견성에 대해 말한다. 견성콘서트를 열기도 한다. 그들은 견성이 무엇인지 알려 주기 위해서 "이것"을 말한다. 대체 이것은 무엇일까?
견성성불론자들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종을 치기도 하고 손뼉을 치기도 하고 책상을 탕탕 치기도 한다. 그때마다 "이것입니다. 이것이라니까요. 이것뿐입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이것타령을 하면 듣고 있는 자는 어리둥절한다. 한마디 대꾸하면 그 말에 걸리지 말라고 말한다. 멋적어 하다 서로 웃는다. 마치 한펀의 코미디를 보는 듯하다.
이것타령 하는 사람들은 경전을 보지 말라고 말한다. 경전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라고 말한다. 달을 가리켰으면 달을 봐야지 왜 손가락을 보느냐고 질책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자신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다. 자신이 "이것"법문할 때 잘 듣다 보면 어느 순간에 몰록 깨달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견성이라고 했다.
견성을 말하는 자들은 수행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앉아 있지 말라는 것이다. 간화선 한다고 앉아 있는 것에 대해 우습게 생각한다. 오로지 자신의 입만 바라 보라고 말한다. 이것법문하는 것을 잘 듣기만 하면 어느 순간에 깨달을 것이라고 말한다.
견월망지론자들은 언어를 부정한다. 언어는 깨달음에 방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종을 치고 손뼉치고 책상을 두드린다. 말로는 "이것입니다, 이것뿐입니다."라고 하여 이것타령한다. 이런 모습이 코미디처럼 보인다.
본질을 보고자 할 때 이것타령한다. 본래 그 무엇인가가 있음을 말한다. 본래면목, 참나, 불성, 본래불 같은 것이다. 어떤 존재의 근원이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도 존재의 근원을 말한다는 사실이다. 진제스님이 미국교회에서 영어로 "What is my true self before my parents gave birth to me?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가)”라고 법문했을 때 기립박수를 받은 것도 근본에 있어서는 같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어느 기독교인은 요한복음 내용과 일치함을 말하며 놀라움을 표현했다.
불교를 본질과 현상으로 설명하는 법사도 있다. 불교TV(BTN)에서 어느 재가법사는 바다와 파도의 비유를 들어 본질과 현상을 설명했다. 우리 삶은 현상에 지나지 않고 근원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본질론은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과 다르지 않다. 이데아 사상을 기반으로 한 기독교신학과도 다르지 않다. 또 범아일여로 설명되는 브라만교 사상과도 다르지 않다. 어떤 존재의 근원이 있어서 그곳으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견월망지는 본질론 또는 본체론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현상이 있으면 본질이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기독교에 기반을 둔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진리는 본래 같은 것이라고 하여 진여, 참나, 본래면목, 본래불, 불성은 하느님, 하나님, 야훼, 알라, 브라흐마, 상제, 비로자나와 본질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진리는 하나인데 표현만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근본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딱 하나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열반이다. 열반에 대하여 본질론적 범주에 넣지 않은 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것은 무아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근원을 말하는 자들은 근본적으로 자아를 상정한다. 그리고 자아 보다 더 큰 초자아가 있다고 말한다. 이를 진아, 참나, 본래불, 불성, 하느님, 야훼, 알라, 브라흐마, 상제, 바이로차나 등으로 말한다. 과연 이들 존재의 근원을 볼 수 있을까?
견월망지론자들은 달을 보고자 한다. 그 달은 어떤 달인가? 다음과 같은 게송이 이를 잘 말해준다.
"古佛未生前 고불미생전
凝然一相圓 응연일상원
釋迦猶未會 석가유미회
迦葉豈能傳 가섭기능전"
"옛 부처 나기 전에
홀로밝은 동그라미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
어찌 가섭이 전하랴." (선가귀감)
사선대사가 읊었다는 선가귀감에 있는 게송이다. 부처가 출현하기도 전에 무언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도 모르고 전법제자 마하깟싸빠 존자도 몰랐다는 것이다. 그 무언가를 굳이 언어로 표현하면 '동그라미(圓)'라고 했다.
동그라미는 언어의 한계로 인하여 임시로 표현한 것이다. 동그라미를 어느 것으로 불러도 좋다. 홀로 밝은 동그라미를 진아, 참나, 본래불, 불성, 하느님, 야훼, 알라, 브라흐마, 상제, 바이로차나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만 이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연기법이다. 과거 출현했던 모든 부처님들도 연기법을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로 시작되는 연기송은 부처가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근본원리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견월망지론자들은 석가도 알지 못한 것이 있다고 하여 "이것"을 말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불교가 타종교와 다른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무아사상이다. 무아는 불교에만 있는 독특한 교리에 해당된다. 그런데 무아는 연기에 기반하는 사상이라는 것이다. 조건발생하는 연기는 다름 아닌 무아에 대한 것이다.
무아이기 때문에 윤회한다. 연기하기 때문에 윤회한다. 연기는 무아이기 때문에 무아윤회하는 것이다. 연기는 조건발생하는 고리로 되어 있다. 십이연기가 대표적이다. 연기의 고리를 끊어 버리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게 된다. 이를 열반이라고 한다.
무아이어야 열반의 실현이 가능하다. 오로지 무아를 설한 부처님 가르침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본질을 말하는 유아론적 사상에서는 열반은 가능하지 않다. 이런 이유로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진리는 하나인 것에 대하여 열반을 제외했을 것이다.
견월망지, 부처님은 결코 이런 말을 한적이 없다. 대승경전 능가경에서 대승사상을 구현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후대 중국불교에서 사용되었고 한국선종에서도 즐겨 사용하고 있다. 요즘 유튜브에서 자칭타칭 깨달았다고 하는 자들도 견성을 설명할 때 사용하고 있다.
견월망지는 부처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다. 마치 선사귀감에서 "옛 부처 나기 전에 홀로밝은 동그라미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 어찌 가섭이 전하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본질을 말하는 견월망지를 말하는 자들은 진아, 참나, 본래불, 불성, 하느님, 야훼, 알라, 브라흐마, 상제, 바이로차나를 본 자가 있는가?
연기법은 관계와 관계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조건발생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시고 난 다음 연기의 가르침을 펼쳤다. 그럼에도 연기의 가르침은 변질되어 도로 본질론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의 담마는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정도로 격하되었다. 견월망지(見月忘指)는 가르침(Dhamma)에 대한 무지이다.
2021-06-25
담마다사 이병욱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이비정법이 출현할 때 (0) | 2021.06.29 |
---|---|
늙어서 슬프다고 하는데 (0) | 2021.06.28 |
테라가타를 아무 곳이나 펼쳐 보았더니 (0) | 2021.06.17 |
새벽에 홍삼꿀차를 마시니 (0) | 2021.06.14 |
나는 불꽃 같은 존재 (0) | 2021.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