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나는 불꽃 같은 존재

담마다사 이병욱 2021. 6. 3. 07:45

나는 불꽃 같은 존재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가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나를 어제의 나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오늘의 나도 지금의 나는 아니다. 나는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어느 것이 진짜 나일까?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 사람의 이미지는 과거의 것이다. 과거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을 그 사람의 전부라고 보고 있다.

학창시절 보았던 친구의 이미지가 있다. 40년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이미지는 젊다. 20대 초반의 청춘 이미지이다. 그때 이미지와 함께 그의 행위를 떠올려 본다. 몇가지 사건이 기억에 남았을 때 그 사람의 이미지가 형성된다. 40년 동안 변하지 않는다.

만일 40년만에 그를 만났다면 당황할 것 같다. 나만큼이나 늙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동안 살았던 이야기를 들으면 이미지 수정작업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그 사람의 이미지는 눈 앞에서 보았던 것으로 바뀐다.

사람은 자꾸 바뀐다. 엄밀히 말하면 매순간 바뀐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바뀌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오온이 생멸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누구인가? 마치 화두처럼 되뇌일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배운 제자라면 나는 오온이다.”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라는 말은 단지 명칭으로만 있을 뿐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온이 나인 것이다. 그것도 시시각각 변하는 오온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 것이 나인지 알 수 없다. 나는 그저 관례상 붙이는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 통념상 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나는 없다.

오온이 나인 것은 분명하다. 이제까지 이 세상에 있었던 어떤 성인도 오온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오로지 부처님만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섯 가지 다발로 분석해서 설했다. 우리 몸과 마음을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으로 나누어서 분별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위방가딘이라 하여 스스로 분별을 설하는 자라고 했다.

과학자들은 물질을 탐구한다.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개서 궁극에 이르고자 한다. 부처님은 물질뿐만 아니라 마음도 쪼개고 또 쪼갰다. 우리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나누고 분별한 것이다.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개다 보면 생멸을 발견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분할하여 분별하고 분별하다 보면 생멸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천오백년전에 부처님이 발견하게 된 것이다.

오온은 끊임없이 생멸한다. 일상에서도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더 잘 보려면 앉아야 한다. 눈을 감고 마음의 문만 열어 두면 보인다. 호흡은 신체에 대한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는 것도 호흡과 관련있다. 호흡관찰하면 몸이 끊임없이 생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앉아 있다 보면 다리가 저린다. 통증이 올 때 느낌이 관찰된다. 그런데 통증도 생멸한다는 것이다. 통증이 일어나서 멈추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일어나는 즉시 사라진다. 어느 것 하나 가만 있지 않다. 마치 비가 올 때 땅바닥을 치는 물거품 같은 것이다.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통증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호흡도 생멸하고 느낌도 생멸한다. 지각도 형성도 의식도 생멸한다.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생멸한다. 오온이 생멸하는 것이다.

물질의 다발이 생멸하고 느낌의 다발이 생멸한다.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이 다발을 이루어 생멸한다. 엄밀히 말하면 조건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건소멸은 없다. 그냥 사라질 뿐이다. 머물지도 않는다. 생기자마자 사라진다. 생겨나는 데는 이유가 있지만 사라지는 데는 이유가 없다.

조건발생하면 결과를 남기게 되어 있다. 그래서 조건발생한 것은 상속된다. 생겨난 것은 사라지고 말지만 나중 것의 조건이 된다. 그래서 계속 조건발생하게 된다. 물의 흐름이나 불의 타오름으로 설명된다.

부처님 가르침의 특징은 비유에 있다. 본래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비유를 들어 이해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을 보면 수많은 비유가 있다. 열반에 대해서 안온하기가 동굴 같고, 안전하기가 섬과 같다고 표현한 것이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은 열반에 대해서 불이 꺼진 것으로도 비유했다. 촛불이 다 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촛불이 켜 있다는 것은 생존해 있음을 말한다.

여기 모닥불이 있다. 모닥불은 연료가 있어야 계속 타오른다. 그런데 모닥불은 한순간도 가만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춤추듯이 끊임없이 타오른다. 그것도 다발을 이루어 타오른다. 어느 순간을 모닥불이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단지 그 이름이 모닥불일 뿐이다.

모닥불은 실체가 없다. 불이 실체이긴 하지만 고정되어 있지 않다. 연료를 조건으로 끊임없이 타오른다. 어느 불이 모닥불일까?

오온도 모닥불 같은 것이다.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은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꽃의 다발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불은 연료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모닥불을 꺼지지 않게 하려면 끊임없이 장작을 공급해 주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오온도 땔감을 필요로 한다.

오온의 땔감은 무엇일까? 이는 상윳따니까야 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을 보면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일체가 불타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일체가 불타고 있는가? 수행승들이여, 시각도 불타고 있고 형상도 불타고 있고 시각의식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불타고 있다. 어떻게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고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으로 불타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S35.28)


부처님은 세상이 불타고 있다고 했다. 그 세상은 자신이 만든 세상이다. 시각의 세상, 청각의 세상 등으로 만든 세상을 말한다.

세상이 불타고 있다면 연료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탐욕의 불, 성냄의 불 등으로 세상이 불타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불타고 있는 세상에서 땔감이 된다.

나는 누구인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라면 나는 오온의 존재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나는 오취온적 존재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이 처음으로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렸을 때 이것이 괴로움의 고귀한 진리이다.”라며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고성제에서 결론적으로 오취온고(pañcup
ādānakkhandhā dukkha)”(S56.11)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취온적 존재이다.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괴로울 수밖에 없다. 어떤 집착이든지 종국에는 괴로움을 야기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오취온적 존재로서 나는 탐욕의 존재이기도 하다. 오온에 집착되어 태어난 것 자체가 탐욕의 뿌리가 있음을 말한다. 마음 바탕에는 탐욕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냄의 뿌리도 있고 어리석음의 뿌리도 있다.

인간은 탐, , 치의 뿌리가 남아 있는 한 탐, , 치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탐욕을 땔감으로 하여 살고, 성냄을 땔감으로 하여 살고, 어리석음을 땔감으로 사는 것과 같다.

삶은 불꽃 같은 것이다. 산다는 것은 불이 계속 타오르는 것과 같다.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이다. 탐욕을 부리면 탐욕의 땔감이 증가한다. 성냄과 어리석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땔감으로 하여 계속 타오른다. 탐욕을 부리면 업이 된다. 업은 반드시 과보를 산출하게 되어 있다. 행위를 하면 업이 되고, 업이 익으면 과보로 나타난다. 이렇게 본다면 탐, , 치는 윤회의 땔감이 된다.

인간에게 탐, , 치가 있는 한 세세생생 윤회하게 된다. , , 치를 연료로 하기 때문에 불이 꺼지지 않는다. 그런데 윤회의 불은 자가발전(自家發電)’이라는 것이다. 모닥불처럼 외부에서 장작을 공급해 주는 것은 아니다. 탐욕을 부리면 부릴수록 불길은 거세게 타오른다. 각자 마음 속에는 탐욕의 뿌리가 있어서 탐욕의 불은 꺼질 줄 모른다. 외부에서 땔감을 공급해 주지 않아도 자가발전 하는 것이다.

한번 불이 붙으면 꺼질 줄 모른다. , , 치의 뿌리가 남아 있는 한 탐, , 치의 불길은 거세게 타오른다. , , 치의 존재가 행위를 할 때 마다 땔감을 만들어 낸다. 행위를 하면 업이 되고, 업이 익으면 과보로 나타난다. 그래서 오온은 불과 같은 것이고 이번 생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 , 치의 뿌리가 남아 있는 한 다음생을 위한 연료로 작용한다.

오온은 생멸을 거듭한다. 이는 불꽃이 계속 타오르고 있다는 말과 같다.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이다. 그런데 불에 타면 괴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세상이 탐, , 치로 불타고 있다고 말하면서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으로 불타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S35.28)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불꽃과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불은 잠시도 가만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연료가 공급되는 한 끊임없이 타오른다. 과연 어느 불이 진짜 불일까?

조건발생하는 오온은 시시각각 변한다. 어느 것을 나라고 해야 할 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고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과거의 나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일부분에 지나지 않다.

나는 옛날의 나가 아니다.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나이다.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로 타오르고 있는 나이다. 번뇌가 남아 있는 한 존재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설령 선업공덕이 되는 행위를 해도 존재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공덕마저 버리고
악함도 버려
청정하게 삶을 살며
지혜롭게 세상을 사는 자가
그야말로 걸식 수행승이네.” (S7.20)


존재의 불을 끄려면 번뇌의 불을 꺼야 한다. 당연히 악업은 짓지 말아야 하고 심지어 선업도 짓지 말아야 한다. 모두 윤회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선업공덕을 짓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다.

공덕을 지었어도 지었다는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작용심(kiriya citta)을 말한다. 무주상보시같은 것이다. 단지 그렇네.”하며 과보를 산출하지 않는 마음이다. 단지 그런 줄 아는 것이다. 단지 작용만 하는 마움이다.

오온에 집착된 존재는 탐, , 치를 뿌리로 하고 있기 때문에 괴로울 수밖에 없다. 존재 자체가 괴로운 것은 탐, , 치를 연료로 하여 불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불을 끌 수 있을까? 멈추는 수밖에 없다. 멈추어서 관찰해야 한다. 마치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개면 궁극을 보듯이, 마음의 현미경으로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해야 한다. 오온의 생멸을 관찰하는 것이다.

생멸을 관찰하면 집착할 것이 없다. 오온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으면 번뇌의 불은 꺼질 것이다.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열반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Stn.235)라 하여, 열반에 대해서 불이 꺼진 것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탐, , 치로 불타고 있다. 나는 불꽃과 같은 존재이다.


모든 조건지어진 것은 무상하니,
생겨나고 소멸하는 법이네.
생겨나고 또한 소멸하는 것,
그것을 그치는 것이 행복이네.”(S15.20)


2021-06-0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