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앗따굿따(attagutta), 왜 자신이 자신의 수호자가 되어야 하는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1. 5. 25. 08:51

앗따굿따(attagutta), 왜 자신이 자신의 수호자가 되어야 하는가?


어느 누구도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하느님이 나의 안전을 책임져 줄까? 관세음보살이? 부처님이? 어느 누구도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자신의 안전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나는 나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다. 남이 나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남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 왜 그런가? 나는 착한 존재이니까? 그렇다고 남에게 나의 안전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흔히 백세시대를 말한다. 보험회사에서는 기대수명을 발표한다. 기대수명대로 산다는 보장이 있을까? 십년을 더 살지 이십년을 더 살지 알 수 없다. 아니 당장 오늘을 알 수 없다. 기대수명은 기대일 뿐이다. 누구도 기대수명까지 살도록 보장해 주지 않는다. 하느님도 관세음보살도 부처님도 나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믿을 것은 자기자신뿐이다. 부처님은 자신을 수호자로 삼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하여 믿음을 갖추고,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알고,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하여 창피함을 알고,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하여 정진을 하고,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하여 지혜를 갖추는 한,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 수행승에 대하여 이제 근심이 없다. 그 수행승은 자신의 수호자로서 더 이상 방일하지 않기 때문이다.”(A5.7)


부처님은 자기자신은 자신이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자신의 수호자라는 말은 빠알리어 앗따굿따(attagutta)’를 번역한 말이다. 영어로는 ‘self-guarded’이다.

자신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 조건을 필요로 한다. 경에서는 1)믿음(saddh
ā), 2)부끄러움(hiri), 3)창피함(ottappa), 4)정진(vīriya), 5)지혜(paññā)가 있어야 자신을 수호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이런 조건을 만족하고 있는가?

믿음은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말한다. 진리에 대한 확신이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은 이 세상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 같은 것이다. 정진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은 쳐내고 착하고 건전한 것은 증장시키는 것을 말한다. 지혜는 오온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나는 이런 조건을 만족하고 있는가?

다섯 가지 조건을 만족하고 있다면 자신을 수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 처음에는 삼보에 의지하지만 결국 자기자신에게 의지하게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성자의 흐름에 들어야 한다. 사향사과 또는 사쌍팔배의 성자가가 되면 자신을 의지처로 하여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수호자이니
다른 누가 수호자가 되리.
자신을 잘 제어할 때
얻기 어려운 수호자를 얻는다.”(Dhp.160)


처음에는 가르침(Dhamma)에 의지해야 한다. 고통의 바다, 윤회의 바다에서 의지할 것은 가르침뿐이다. 그렇다고 마냥 가르침에 의지할 수 없다. 어느 정도 공부가 되었으면 자신에게 의지해야 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면 자신을 의지처로 삼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완전한 열반에 들기 전에 최후의 말씀으로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Attad
īpā bhikkhave, viharatha attasaraā anaññasaraā, S22.43)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섬으로 하라고 했다. ()’으로 하라고 했을까? 대승경전에서는 등불로 하라고 했다.

섬을 뜻하는 빠알리어는 디빠(d
īpā)이다. 이 말은 등불이라는 뜻도 있다. 한역 아함경에는 법등명자등명이라 하여 등불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한국의 불교인들은 이제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니까야 번역자들은 한결같이 섬으로 번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섬으로 하고로 되어 있다. 어느 것이 맞을까?

부처님 가르침은 잘 전승되어 왔다. 그러나 전승과정에서 오류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보면 잘 전승되어 온 것이다. 특히 삼법인에 맞는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보아도 된다. 그러나 전승과정에서 중역됨에 따라 뜻이 바뀌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한역 아함경에서 법등명자등명번역이 그렇다.

한역아함경은 번역에 번역이 되어서 중역 된 것이다. 부처님 당시 민중언어인 마가다어가 지배층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되었고, 서역을 거치고 한역되다 보니 중역에 중역을 거듭한 것이다. 더구나 한역 아함경은 주석이 없다. 무엇보다 한자는 뜻글자라는 것이다. 글자 하나 하나가 이미지와 같아서 여러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다 보니 논리적 설명을 하기 힘들다.

빠알리어는 부처님 당시 마가다어 계통의 민중어이다. 빠알리어에 부처님의 생생한 목소리가 실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빠알리경전은 주석이 잘 되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이 어떤 말씀을 했는지 주석서를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이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섬으로 하라.”고 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주석에 따르면윤회의 바다는 그 지지처인 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어서 그 바닥을 발견하기 힘들다. 그래서 스스로 거룩한 경지(阿羅漢果)인 섬을 만들어야 한다."(DhpA.I.255)라고 되어 있다. 이것이 주석의 힘이다. 이런 주석이 없으면 왜 섬으로 하라고 했는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이 섬으로 하라고 한 것은 윤회의 바다에서 섬이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섬은 다름 아닌 열반을 의미한다. 사향사과의 열반을 말한다. 최종적으로 아라한이 되면 가장 안전한 곳인 섬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고통의 바다, 윤회의 바다에서 살고 있다. 고통의 바다와 윤회의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피난처는이 될 것이다. 따라서 안전을 위하여 바다에서 필요한 것은 섬이지 등불이나 등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섬은 열반을 상징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힘써 노력하고 방일하지 않고
자제하고 단련함으로써
지혜로운 님은 거센 흐름에
난파되지 않는 섬을 만들어야 하리.”(Dhp25)


고통의 바다, 윤회의 바다는 잔잔한 곳이 아니다. 바람이 불면 파도치고 태풍이 오면 폭풍우가 일어나는 무서운 곳이다. 폭풍의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섬이다. 해안선이 있는 섬에 도달하면 안심이다. 여기서 섬은 저언덕, 피안과 같다. 섬은 열반을 상징하는 말이다. 그래서 거센 흐름에 난파되지 않는 섬을 만들어야 하리.”(Dhp25)라고 한 것이다.

상윳따니까야무위의 모음(asa
khatasayutta, S43)’에 따르면 동굴, , 피난, 피안을 열반으로 묘사했다. (dīpa: )에 대한 것을 보면수행승들이여, 섬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수행승들이여, 섬이라고 한다.”(S43.40)라고 했다.

불교에서는 탐, , 치가 소멸된 상태를 열반이라고 한다. 그러나 열반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안전하기가 동굴 같고, 안전하기가 섬과 같다고 비유로서 설명한 것이다.

열반을 설명한 무위상윳따를 보면 열반에 대하여 (d
īpa)”(S43.40), “동굴(lena)”(S43.41), “피난(saraa)”(S43.43), “피안(parāyaa)”(S43.44) 등으로 비유를 들어 설명해 놓았다. 이와 같은 비유는 중생교화에서도 볼 수 있다. 부처님은 외도 바라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바라문들이여, 실로 그대들은 늙고 연로하고 나이가 들고 만년에 이르러 노령에 달해 향년 백이십 세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대들은 아직 선행을 하지 못했고, 착하고 건전한 일을 하지 못했고, 두려움에서 피할 곳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바라문들이여, 이 세상은 늙음과 병듦과 죽음으로 이끌어집니다. 바라문들이여, 이 세상이 늙음과 병듦과 죽음으로 이끌어지더라도 어떤 사람이 신체를 제어하고, 언어를 제어하고, 정신을 제어하면, 그 사람에게 그것이 죽은 뒤의 구원이고 동굴이고 섬이고 피난이고 피안입니다.”(A3.51)


부처님은 나이가 들어 죽을 날이 가까웠다고 하더라도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제어하면 누구나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그 구원은 다름 아닌 동굴(lena), (dīpa), 피난(saraa), 피안(parāyaa)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열반(nibbana)을 말한다.

섬이 왜 열반의 뜻인가? 윤회의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섬이다. 바다는 평온한 듯 보이지만 폭풍우가 몰아치면 배는 거센 파도에 난파되어 버린다. 또 바다에는 상어 등 목숨을 위협하는 요인이 많아 안전하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윤회의 바다에 비유한다. 생사가 거듭되는 소용돌이와 폭류의 바다를 말한다.

윤회의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섬이다. 부처님이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섬으로 하라고 했을 때 그 섬은 열반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너희들을 위해 섬과 섬으로 이끄는 길을 설할 것이니 듣고 잘 새기도록 해라. 내가 설하겠다. 수행승들이여, 섬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수행승들이여, 섬이라고 한다.”(S43.40)


부처님은 섬에 대하여 탐, , 치가 소멸된 상태라고 했다. 이는 다름아닌 아닌 열반이고 번뇌 다한 아라한의 상태를 말한다.

고통의 바다, 폭류의 바다, 윤회의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해안선이 있는 섬이다. 이는 등대나 등불과 비교되지 않는다. 초기경전 도처에서도 가장 안전한 곳은 섬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담마디빠(dhammad
īpā)와 앗따디빠(attadīpā)법등명자등명으로 번역하는 것 보다는,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자신을 섬으로 하고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처음 에는 삼보에 의지해야 한다. 삼보를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렇게 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나의 안전을 지켜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을 피난처로 삼는 것이다. 어떻게 자신을 피난처로 삼아야 할까?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해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었다는 것은 열반을 체험했다는 것을 말한다. 아라한이 될 때 까지 각단계마다 열반체험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 열반내용은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다. 수다원의 열반이 다르지 않고 아라한의 열반이 다르지 않음을 말한다. 다른 것이 있다면 남아 있는 번뇌가 다르다.

수다원은 열반체험을 해야 수다원이 된다. 그러나 수다원에게는 아직 남아 있는 번뇌가 있다. 적게나마 탐, , 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을 해야 한다. , , 치를 뿌리뽑기 위한 수행을 말한다. 이를 수행도(修行道)라고 하는데 사다함과 아나함의 단계를 말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수다원은 견도(見道)가 된다. 마침내 탐, , 치의 뿌리를 뽑아 모든 번뇌가 소멸되었을 때 아라한이 된다.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더 이상 닦을 것도 없어서 무학도(無學道)가 된다.

아라한이 되면 열반의 상태나 다름없다. 윤회의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상태에 있는 섬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 사향사과의 성자가 되면 이제 부터는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가 된다.

부처님은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섬으로 하라고 했다. 여기서 자신(atta)’이라는 말은 자아를 뜻하는 아뜨만이 아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말이다. 이는 해야 할 것을 다 마치고 번뇌를 떠나 궁극의 몸을 이룬 거룩한 수행승이나는 말한다.’고 하든가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고 하여도 세상에서 불리는 명칭을 잘 알아서 오로지 관례에 따라 부르는 것이네.” (S1.25)라는 부처님의 게송으로도 알 수 있다.

불교인이라면 가르침에 의지해야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자신에게 의지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는 것이다. 수다원이 되면 최대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어 윤회가 끝나기 때문에 성자의 흐름에 들면 가장 안전한 상태에 있게 된다.

고통의 바다, 폭류의 바다, 윤회의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섬이다. 열반을 성취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 제아무리 많이 배우고 보시를 많이 하고 계를 잘 지켰어도 열반을 성취하지 못하면 어떤 세계에 태어날지 알 수 없다.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와 같은 사악처에 태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도 관세음보살도 부처님도 나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자신의 안전은 자신이 지켜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야 한다.

한번 수다원이 되면 절대로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와 같은 사악처에 떨어질 수 없다. 오로지 일곱생 이내에 열반이 보장되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기자신은 자기자신이 자신의 수호자, 앗따굿따(attagutta)”(A5.7)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수호자이니
다른 누가 수호자가 되리.
자신을 잘 제어할 때
얻기 어려운 수호자를 얻는다.”(Dhp.160)


2021-05-2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