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타인에 대한 보시는 결국 자기자신에게 하는 것

담마다사 이병욱 2021. 5. 24. 07:38

타인에 대한 보시는 결국 자기자신에게 하는 것


어제 잠결에 들은 것이 있다. 담마끼띠 스님의 법문이다. 한국명상원에서 상윳따니까야 1권을 강의한 것인데 유튜브로 들었다. 잠결에 들은 말 중에 보시는 탐, , 치를 소멸하는 행위입니다.”라는 말에 사무쳤다.

 

담마끼띠 스님은 스리랑카 스님이다. 아산에 있는 담마위하라 창건주이기도 하다. 그런데 스님은 한국말이 유창하다는 것이다. 듣다 보면 한국사람 보다 한국말을 더 잘하는 것 같다. 더구나 교학적 토대가 탄탄하여 법문을 하면 하나도 놓칠 것이 없다. 마흔살 안팍의 젊은 스님은 동국대에서 박사학위도 받았다. 몇 번 만나 본 적 있다.

 


보시는 주는 행위를 말한다. 불교용어이다. 요즘엔 베풂 또는 나눔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선물하는 것도 보시에 해당된다. 사심없이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주는 행위야말로 거룩한 행위이다.

주고자 하는 마음이 드는 순간 이미 탐, , 치에서 벗어난 것이다. 보시는 탐욕으로 줄 수 없다. 보시는 성내는 마음으로 줄 수 없다. 그리고 보시는 어리석은 마음으로 줄 수 없다. 보시하는 순간 무탐, 무진, 무치가 된다.

자애수행 최종단계는 주는 것이다. 원한 맺힌 자의 마음을 돌리는데 있어서 보시만한 것이 없다. 부부싸움 끝에 화해하기 위해 장미꽃다발이라도 들고 가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이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미 용서의 기운이 싹트고 있는 것이다.

보시가 탐욕과 성냄을 억누른다는 것은 이해할 만 하다. 그런데 보시가 어리석은 행위가 아니라 것은 알기가 쉽지 않다.

보시가 왜 어리석음을 소멸하게 하는 행위일까? 이는 보시가 지혜로운 행위임을 말한다. 보시가 왜 지혜로운 행위일까? 그것은 탐욕과 성냄을 소멸하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탐욕과 성냄이 없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그리고 즐거움까지 일어난다.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보시는 지혜로운 행위임에 틀림없다.

보시가 지혜로운 행위라는 것은 과보를 기대할 수도 있음을 말한다. 이는 라따나경에서 네쌍으로 여덟이 되는 님들이 있어, 참사람으로 칭찬받으니, 바른 길로 가신 님의 제자로서 공양 받을 만하며, 그들에게 보시하면 크나큰 과보를 받습니다.”(Stn.227)라는 게송으로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대가를 바라는 뇌물 같은 것은 아니다. 또한 어떤 이념적 목적을 위한 정치헌금 같은 것도 아니다.

종교인에게 있어서 보시는 더 나은 세계에 태어나게 하는 공덕행이 된다. 내세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 이익을 바라는 뇌물 같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보시하는 순간 이미 내생은 결정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보시가 공덕행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보시하기를 즐겨해야 할 것이다. 보시가 탐, , 치를 소멸하기 위한 거룩한 행위라고 아는 것은 지혜에 해당된다.

초기경전 도처에서는 보시공덕을 강조하고 있다. 대개 천상에 태어날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보시하는 순간 이미 천상에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선행을 하면, 두 곳에서 기뻐하니
이 세상에서도 기뻐하고 저 세상에서도 기뻐한다.
자신의 업의 청정함을 보고
기뻐하고 그리고 환희한다.”(Dhp,16)

선행을 하면, 두 곳에서 즐거워하니
이 세상에서도 즐거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즐거워한다.
내가 선을 지었다고 환호하고
좋은 곳으로 가서 한층 더 환희한다.”(Dhp.18)


보시는 공덕행이고 선행이다. 보시를 하면 선업공덕을 짓는 것이다. 그런데 보시공덕은 죽어서나 달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보시하는 순간 아름다운 마음이 된다. 청정한 마음이 되는 것이다.

보시를 하면 업이 청정해진다. 그래서 보시를 하면 자신의 업이 청정함을 보고 기뻐한다고 했다. 그것도 두 세계에서 기뻐한다고 했다. 이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저 세계에서도 기뻐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시하면 양자의 세계에서도 기뻐할 것이기 때문에 지혜로운 행위가 된다.

보시를 어리석은 행위로 보는 자들도 있다. 보시는 바보나 하는 것임을 말한다. 현자들이 어리석은 자들에게 보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보는 보시하고 현자는 취한다.”라고 말한다. 주로 단멸론적 견해를 가진 자들이다.

세상을 허망하게 보는 자들이 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말하는 허무주의자들이 그렇다. 이와 같은 단멸론적 견해를 가지면 보시하는 행위는 어리석은 행위가 된다.

자신과 세상을 허망한 것으로 본다면 보시할 필요가 없다. 그대신 즐기는 삶을 살면 될 것이다. 죽으면 끝날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금하는 행위도 서슴없이 자행할 것이다.

단멸론적 견해를 가지면 남에게 돈을 빌어도 갚지 않을 것이다. 은행에서 거액을 대출받아서 해외로 튀어 버리는 것도 내세가 없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업과 업의 과보를 모르는 것이다.

단멸론자들은 인과를 모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악행에 대한 과보는 내세까지 갈 것도 없다. 지금 여기에서 괴로움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악행을 하면, 두 곳에서 슬퍼하니
이 세상에서도 슬퍼하고 저 세상에서도 슬퍼한다.
자신의 업의 더러움을 보고
비탄에 빠지고 통탄에 빠진다.”(Dhp.15)

악행을 하면, 두 곳에서 괴로워하니
이 세상에서도 괴로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괴로워한다.
내가 악을 지었다고 후회하고
나쁜 곳에 떨어져 한층 더 고통스러워 한다.”(Dhp.17)


단멸론적 허무주의 견해를 가지면 양자의 세계에서 고통받을 것이라고 했다. 당장 악행의 과보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여 악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세상 사람을 다 속일수는 있어도 자신만은 속일수는 없다. 죽음의 순간에 악행에 대한 과보가 재생연결식이 되어서 악처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멀리 갈 것도 없다. 당장 악업의 과보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상사람들의 비난이다. 그래서 악업을 지으면 이 세상에서도 괴롭고 저 세상에서도 괴롭다고 했다.

담마끼띠 스님에 따르면 부처님은 악행을 하지 말라.”라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았다고 한다. 반드시 선행과 함께 얘기하신 것이다. 그러나 선행을 하라.”라는 말은 단독적으로 쓰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악행을 뜻하는 빠빠(pāpa)와 공덕행을 뜻하는 뿐냐(puñña)를 항상 함께 사용했음을 말한다.

초기경전에서 뿐냐(功德行)와 빠빠(惡行)는 늘 함께 사용된다. 뿐냐와 관련해서는 선한 일을 행했으면, 더욱 더 거듭해야 한다. 그 의욕을 돋우어야 하리. 공덕이 쌓이면 행복하다.”(Dhp.118)라고 했다. 또 빠빠에 대해서는 비록 악을 저질렀어도, 더 이상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 탐욕을 여의어야 하리. 악이 쌓이면 고통스럽다.”(Dhp.117)라고 했다. 이렇게 뿐냐와 빠빠는 늘 함께 쓰인다.

공덕행은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서 단독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반면 악행은 단독으로 쓰이기 보다는 공덕행과 함께 사용된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 특징이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공덕행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상에 태어나기 위하여 공덕행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공덕마저 버리고

악함도 버려
청정하게 삶을 살며
지혜롭게 세상을 사는 자가
그야말로 걸식 수행승이네.” (S7.20)


이 게송은 육조단경에서 불사선불사악(不思善不思惡)을 연상케 한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공덕마저 버리라고 했다. 그렇다고 공덕행을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내가 공덕행을 했다.”라는 마음을 버리라는 것이다. 마치 금강경의 무주상보시를 연상케 한다.

초기불교는 후대 모든 불교전통의 뿌리와도 같다. 후대 제작된 경전의 문구를 보면 초기경전을 뿌리로 한 것이 많다. 육조단경의 불사선불사악도 그렇고, 금강경의 무주상보시도 그렇다. 뿌리는 아마도 공덕마저 버리고 악함도 버려”(S7.20)라는 상윳따니까야 게송에 있다고 본다.

재가자도 공덕지어야 하고 출가자도 공덕지어야 한다. 다만 기대하는 것에서는 차이가 있다. 보시에 대한 과보를 기대한다면 세간적 공덕행이 된다. 반면 공덕행을 했지만 과보를 기대하지 않으면 출세간적 공덕행이 된다.

궁극적으로는 출세간적 공덕행을 지향해야 한다. 그러나 세간을 사는 사람에게는 세간적 공덕행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공덕행을 하면 과보가 따른다는 가르침을 말한다.

출세간적 공덕행이나 세간적 공덕행 모두 공덕행을 하면 탐진치가 소멸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아는 것은 지혜에 해당된다. 결국 보시는 자기자신에게 하는 것이 된다.


믿음과 즐거운 마음으로
음식을 베푸는 사람은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먹을 것이 따르네.

인색함을 반드시 이겨서 마음의
티끌을 극복하고 보시해야 하리.
이러한 공덕은 저 세상에서
뭇삶들에게 의지처가 되리.” (S1.43)


2021-05-2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