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홍삼꿀차를 마시니
지금은 새벽 4시. 참 좋은 시간이다. 너무 이르지도 않고 너무 늦지도 않다. 앞으로 6시 까지는 내 시간이다. 24시간 내 시간 아닌 때가 없지만 잘 자고 난 다음 깨어 있는 시간은 두 배, 세 배 가치 있는 시간이다.
탁자 위에 있는 물을 마신다. 어제 준비한 것이다. 자기 전에 홍삼과 꿀을 넣은 것이다. 보리차 보다도 홍삼꿀차가 훨씬 좋다. 마시고 나면 만족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이럴 때 준비하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본다.
“보시된 것이 커다란 열매를 거두는 곳에
기꺼운 마음으로 보시하라.
공덕은 저 세상에서
뭇삶들의 의지처가 되리.”(A5.36)
공덕은 저 세상에서 의지처가 된다고 했다. 보시공덕을 말한다. 지금 눈 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다음 생에서는 의지처가 됨을 말한다. 이럴 경우 보시공덕은 노잣돈이 된다.
“이제 그대야말로 낙엽과도 같다.
염라왕의 사자들이 그대 가까이에 있고
그대는 떠남의 문턱에 서 있으나,
그대에게는 노잣돈조차도 없구나.”(Dhp.235)
여행을 하려면 여비가 있어야 한다. 여행을 떠날 때 여비가 있으면 든든하다. 죽음도 일종의 여행과도 같은 것이다. 죽음의 길을 떠날 때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할까? 사랑하는 사람도, 재산도, 명예도 가져 갈 수 없다. 가져 가는 것은 행위(업)만 가져 간다.
죽음의 길에서 든든한 노잣돈은 착하고 건전한 행위이다.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면 그에 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든든한 노잣돈이 된다.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면 안심이다. 갑자기 재난이 닥쳤을 때 믿을 것은 공덕밖에 없다. 공덕에는 보시공덕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보시공덕도 있고, 계행공덕도 있고, 수행공덕도 있다.
평소 공덕 있는 삶을 살면 안심이다. 언제 어떻게 재난을 당해도 든든한 버티목이 있는 것과 같다. 특히 죽었을 때 그럴 것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한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할까? 아직 죽어서 돌아온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도 있다. 설령 내세와 윤회가 참일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내세와 윤회는 의미 없는 것이라고 한다. 대부분 단멸론자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
단멸론자들은 죽음 이후를 생각지 않는다. 마치 내일을 생각지 않고 사는 것과 같다. 그들에게는 오늘만 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면 그만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괴롭다면 잘못 산 것이다.
어제 과음을 해서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면 과음의 과보를 받은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내가 지금 괴로운 것은 괴로운 과보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과음을 해서 괴롭다면 과음으로 인한 괴로움의 과보를 받고 있는 것이다.
마실 때는 좋다. 여럿이 어울려 마실 때는 더욱 더 즐겁다. 한잔 마실 것이 두 잔이 되고 세 잔이 된다. 여러 잔이 되었을 때 자신을 잊어 버린다. 다음날 아침 반드시 괴로운 과보로 나타난다.
아침에 눈을 뜨기 싫을 때가 있다. 학교에 가기 싫은 어린 아이와 같다.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진 자도 눈을 뜨기 싫을 것이다. “이대로 눈을 감아 버렸으면”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문제를 안고 가는 것이다.
단멸론자들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죽으면 끝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정말 죽으면 끝나는 것일까? 내일이 오는 것으로 보아서 죽음이 끝은 아닌 것 같다. 어느 세계에서 어떤 존재로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행위를 하면 과보를 받는다. 즉각적으로 받는 것도 있고 먼 훗날에 받는 것도 있다. 이는 과보가 조건에 따라 달리 익기 때문이다.
선업공덕을 쌓았다면 그 행위에 걸맞는 세계에 태어날 것이다. 마치 어제 저녁 홍삼꿀차를 준비해 놓은 것과 같다. 악업을 쌓았다면 악처에 태어날 것이다. 마치 어제 저녁 과음한 과보를 아침에 받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철학이 있다. 어떤 이는 “지옥이 어디 있고 천당이 어디 있어? 죽으면 그만이지.”라고 말한다. 대부분 이렇게 말한다. 이것도 철학일 것이다. 그러나 무지에 바탕을 둔 사견(邪見)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철학을 ‘개똥철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누구나 철학이 있다. 철학이 개똥철학이 되지 않으려면 가르침을 접해야 한다. 불교인이라면 초기경전을 열어 보아야 한다. 아무 경전이나 열어 보아도 좋다. 어느 경전을 열어 보아도 지혜의 말씀으로 가득하다. 이것이 철학이다.
남의 말을 믿어서는 안된다. 세상 사람들이 한다고 하여 따라 해서는 안된다. 세상사람들이 그 길로 간다고 하여 그 길로 가서는 안된다. 왜 그런가? 세상 사람들은 탐, 진, 치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탐, 진, 치로 살면 그 결과는 뻔하다. 그 길로 가면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남들이 간다고 해서 따라가서는 안된다. 그 길은 죽음의 길이다.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과 반대로 가야 한다. 그 길은 무탐, 무진, 무치의 길이다. 불교인이라면 가르침의 길로 가야 한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커다란 재난이 일어나 모든 사람에게 죽음의 공포가 다가오고 사람으로 존재하기 어려울 때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오로지 여법하게 살고 올바로 살고 착한 일을 하고 공덕을 쌓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이 있겠습니까?”(S3.25)
빠세나디 왕이 부처님에게 한 말이다. 최고권력을 가진 자가 공덕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다. 저 세상에 갈 때 공덕 밖에 가져 갈 것이 없음을 말한다.
왕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다름없다. 나라가 왕의 것이다. 그래서 왕의 나라라고 하여 왕국(王國)이라고 한다. 그런 왕도 죽음은 피해 갈 수 없다.
재산이나 권력으로 죽음을 막을 수 없다. 막강한 사군으로도 죽음을 막을 수 없다. 마치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죽음 앞에 모든 것을 가진 왕도 속수무책이다. 빠세나디 왕은 부처님과 대화에서 이런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믿을 것은 공덕 밖에 없다고 말한다.
지금 현재의 나는 과보가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지금 괴롭다면 잘못 산 것이다. 지금 음주로 괴롭다면 과음한 것에 대한 과보를 받고 있는 것이다. 지금 몸과 마음이 편안 하다면 잘 산 것에 대한 과보를 받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처지를 보면 과거를 알 수 있다. 출가자도 예외가 아니다. 어느 출가자는 탁발 나갔을 때 밥을 잘 얻어 온다. 왜 그럴까?
“쑤마나여, 출가한 자로서 그 보시하는 자는 다른 보시하지 않는 자를 다섯 가지 점에서 능가합니다. 즉, 구걸하지 않으면 그렇지 않지만, 구걸만으로도 많은 의복을 향유합니다. 구걸하지 않으면 그렇지 않지만, 구걸만으로도 많은 음식을을 향유합니다.”(A5.31)
보시하기를 즐겨 하는 자가 출가했을 때 밥을 더 받음을 말한다. 평소 인색한 자가 출가했을 때 밥을 잘 빌어 오지 못할 것이다.
출가자라고 해서 같은 출가자가 아니다. 출가하기 전에 보시공덕을 많이 지은 자는 밥 걱정에서 자유롭다. 마치 자신이 낸 것을 찾아 먹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성자의 흐름에 들면 모두 똑같다. 해탈자가 되면 밥 얻어먹는데 차별이 없게 된다. 북전(福田: puññakkhetta)이 되었을 때 밥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보시공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보시공덕에 대한 과보는 사후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보시의 과보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도 나타난다. 보시를 함으로 인하여 아름다운 마음을 내었다면 선업과보를 받은 것이 된다. 그래서 “보시하는 자와 후원하는 자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호의를 받는데, 그것도 지금 눈앞에 보이는 보시의 과보입니다.”(A5.34)라고 했다.
보시는 바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보시는 지혜로운 자가 하는 것이다. 단멸론자는 보시과보를 믿지 않는다. 내생과 윤회를 믿지 않으니 즐기는 삶을 살게 된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오욕락의 삶이다.
단멸론자들은 삿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윤회가 참이라 해도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보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보시는 즉각적이다. 보시를 하면 아름다운 마음이 되어서 지금 여기에서 선과보를 받는다. 죽어서는 든든한 노자돈이 된다. 그래서 보시하고 후원하는 자는 다음과 같이 지금 눈앞에서 보이는 보시의 과보를 받는다고 했다.
“1)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호의를 받는다.
2)선한 참사람들과 교류한다.
3)훌륭한 명성이 퍼져 나간다.
4)어느 모임에서든지 두려움이 없고 부끄러움이 없다.
5)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난다.” (A5.34)
보시공덕이라는 것이 반드시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보시를 하면 이 세상에서도 즐겁고 저 세상에서도 즐거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보시를 즐겨 해야 할 것이다. 왜 그런가? 보시는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시는 나 자신에게 보시히는 것이다.”라는 결론을 갖게 된다.
글을 치다 보니 날이 밝았다. 하지로 갈수록 해가 길어지고 있다. 6시가 되면 일어서야 한다. 세수를 하고 아침을 간단히 먹고 사무실로 달려 가야 한다.
사무실에서는 해야 할 일이 있다. 요즘 해야 할 일이 갈수록 늘어 나는 것 같다. 사무실은 일하는 공간만은 아니다. 이제 수행의 공간도 되었다. 물론 글쓰기 공간도 된다. 모두 의무적으로 하는 것들이다.
스스로 족쇄를 채우고 있다. 글은 의무적으로 하루 한개 이상 써야 한다. 요즘에는 팔정도경을 의무적으로 암송하고 있다. 또한 의무적으로 좌선을 한다. 하루라도 하지 않으면 의무를 다 하지 않는 것 같다. 마치 숙제하지 않은 것 같다.
세상 살아 가는데 의무 아닌 것이 없다. 주로 강제적인 것이 많다. 납세의 의무가 있다. 사업하는 사람은 세금을 내야 한다. 각종 공과금도 의무적으로 내야 한다. 가장의 의무도 있다. 그러나 자율적 의무도 있다. 자신을 향상하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의무적 글쓰기, 의무적 빠알리팔정도경 암송, 의무적 행선과 좌선이 이에 해당된다. 매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상이 된다.
나이 들어도 갈 곳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작은 공간이긴 하지만 눈만 뜨면, 밥만 먹으면 갈 데가 있어서 다행이다. 마치 직장처럼 다닌다. 일인사업자에게 작은 사무실공간은 직장과도 같다.
일감이 있으면 일을 하고 일이 없으면 의무적 일을 한다. 일인사업자에게 주말은 없다. 어제 일요일임에도 하루 종일 그곳에서 보냈다. 스마트폰이 밝아지는 것을 보니 6시가 되었다. 오늘도 하루가 시작되었다.
새벽에 홍삼꿀차가 달콤했다. 어제 저녁 자기 전에 머리맡에 두었기 때문에 마신 것이다.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면 과보로 나타난다.
2021-06-1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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