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사이비정법이 출현할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21. 6. 29. 12:28

사이비정법이 출현할 때

 

 

한국불교에 이상한 풍조가 있다. 경전을 근거로 해서 글을 쓰면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진리는 마음과 마음으로, 뜻에서 뜻으로 전승되는 것이라며 문자로 전승된 것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견월망지라 하여, 달을 가리켰으면 달을 보아야지 손가락을 본다고 말한다.

 

한국불교에서 빠알리니까야는 거의 완역되었다. 쿳다까니까야 계열의 일부 몇 개 경전을 제외하고 모두 우리말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한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볼 수 있다. 심오한 내용도 있지만 현실적 삶에 대한 것들도 많다. 이런 가르침을 지금 여기에서 접할 수 있는 것은 시대의 행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정법은 오래 가지 않는다. 언젠가 사라지게 되어 있다. 그것은 정법이 오염되기 때문이다. 본래 가르침과 다른 것이 섞여 들어왔을 때 정반대의 것이 되어 버린다. 부처님은 무상, , 무아, 부정을 설했는데 이를 정반대로 상, , , 정이라고 했을 때 정법이 오염되어서 변질된 것이다.

 

부처님의 설법만 듣고서도

 

흔히 이런 말을 한다.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의 설법만 듣고서도 깨달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법구경 인연담에서도 확인된다. 이는 이 가르침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흐름에 든 경지 등을 성취했다.”라는 정형구로도 확인된다. 이에 대하여 마하 깟싸빠 존자는 부처님과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물어본다.

 

 

예전에는 수행의 계법이 더 적었는데도 보다 많은 수행승들이 최상의 지혜를 얻은 것은 어떠한 원인, 어떠한 연유 때문입니까? 그리고 또한 지금은 수행의 계법이 더 많은데도 보다 적은 수행승들이 최상의 지혜를 얻은 것은 어떠한 원인, 어떠한 연유 때문입니까?”(S16.13)

 

 

상윳따니까야 정법에 대한 허위조작의 경’(S16.13)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부처님의 전법제자로 알려져 있는 깟싸빠 존자가 부처님에게 깨달은 자가 출현하는 것에 대하여 예전과 현재가 다른 원인과 연유에 대해 물은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는 말만 듣고서도 깨달음을 이루었다. 이는 제자들의 능력이 수승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수행자들에게 설법했을 때 말 한마디에 깨달음을 이룰 수 있음을 말한다. 마치 초전법륜경에서 볼 수 있는 다섯 명의 수행자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법안이 열린 것과 같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초창기 때는 준비된 수행자들이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준비된 수행자에게는 한마디 말만 해 주어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현업에서도 볼 수 있다. 일을 하다 문제가 생겼을 때 전화통화로 해결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나의 멘토는 열 살 아래

 

캐드를 이용한 기판설계를 하고 있다. 십년 넘게 이 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가끔 막힐 때가 있다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때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본다. 전화로 현상을 설명하면 어디를 보라고 말한다. 알려 준대로 해보면 문제가 깨끗이 해결된다. 이럴 경우 그 사람은 나의 멘토가 된다.

 

문제가 생겼을 때 물어볼 사람이 있다는 것은 마음 든든한 일이다. 설령 그가 나이가 어려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제로 나의 멘토는 나보다 열 살가량 어리다. 그럼에도 일을 하다 막히면 전화로 물어본다. 말로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이는 동종업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 다섯 명의 수행자에게 설법했다. 그들은 준비된 수행자들이었다. 마치 동종업계의 엔지니어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한마디 하면 척하고 알아듣는 것이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이 사성제를 설했을 때 “또한 그 가르침을 설할 때에 존자 꽁당냐에게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S56.11)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사이비정법이 출현할 때

 

정법은 언젠가 사라지게 되어 있다. 이는 과거 수많은 부처님들이 출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정법이 유지되고 있다면 부처가 출현할 수 없다. 왜 그런가? 깨달음은 모두 동일한 것이다. 과거 모든 부처님들은 연기법을 깨달아 부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법은 어떻게 사라질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깟싸빠 존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깟싸빠여, 그것은 이와 같다. 뭇삶들이 타락하고 올바른 가르침이 파멸할 때는 수행의 계법이 더 많더라도, 더 적은 수행승들이 최상의 지혜를 얻는다. 깟싸빠여, 그러나 올바른 가르침이 사라지지 않는 한 세상에서 올바른 가르침에 대한 허위적 조작은 초래되지 않는다. 깟싸빠여, 세상에서 올바른 가르침에 대한 허위적 조작이 세상에 나타나면, 그때는 올바른 가르침의 소멸이 초래된다.”(S16.13)

 

 

부처님은 올바른 가르침에 대한 허위적 조작이 세상에 나타나면 정법이 사라진다고 했다. 여기서 올바른 가르침에 대한 허위적 조작은 삿담마빠띠루빠까(Saddhammapatirūpaka)를 번역한 말이다. 정법처럼 보이지만 사이비법을 말한다.

 

사이비는 비슷하지만 아닌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법과 율이 아무리 방대해도 사이비법이 끼여 들면 정법이 오염되어서 힘을 잃고 만다. 마침내 소멸되어 사라질 것이다. 이는 깟싸빠 존자가 주도한 제1차 결집과도 관련이 있다.

 

위기를 느낀 깟싸빠 존자

 

부처님은 사이비법의 출현을 예견했다. 이에 대하여 황금의 비유를 들었다. 황금이 사라지지 않는 한 세상에서 황금에 대한 허위적 조작도 초래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황금에 대한 조작이 세상에 나타나면, 그 때는 황금의 소멸이 세상에 초래된다.”(S16.13)라고 했다.

 

부처님이 완전한 열반에 들었을 때 수밧다라는 늦깍이 비구가 있었다. 그는 부처님이 열반에 들자“그대들은 슬퍼하지 마시오.”라며 말했다. 그는“우리는 ‘이것은 그대들에게 옳다. 이것은 그대들에게 그르다.’라고 간섭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고 원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Vin.II.285) 라며 말하고 다녔다. 이런 사실을 목격한 깟사빠 존자는 위기를 느꼈다.

 

깟싸빠 존자는 정법(dhamma)이 훼손되고 ‘비법(adhamma)’이 득세하게 될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벗들이여, 우리는 가르침과 계율을 결집합시다. 예전에 가르침이 아니었던 것이 번영하고 가르침이었던 것은 쇠퇴하고, 예전에 계율이 아니었던 것이 번영하고 계율이었던 것은 쇠퇴하고, 예전에 가르침이 아니었던 것을 설하는 자가 강해지고 가르침이었던 것을 설하는 자가 약해지고, 예전에 계율이 아니었던 것을 설하는 자가 강해지고 계율이었던 것을 설하는 자가 약해집니다.(Vin.II.285)라고 말했다. 이것이 제 1차 결집의 원인이 된다.

 

학습을 많이 해야 하는 이유

 

어느 시대나 사이비는 있기 마련이다. 정품이 있으면 유사품이 있는 것과 같다. 정법이 있으면 정법 비슷한 사이비법도 나타난다. 그렇다면 정법이 파괴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깟싸빠여, 예를 들면, 배가 선적하여 침몰하듯이 깟싸빠여, 이와 같이 올바른 가르침이 파멸하는 것은 아니다.”(S16.13)라고 하여 선박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선박의 비유는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물건을 많이 선적하면, 가라 앉는 배와는 달리, 학습을 많이 채운다고 해서 선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학습이 사라지면, 실천이 사라지고, 실천이 사라지면 성취도 사라진다. 그러나 학습이 채워지면, 실천도 채워지고, 성취도 채워진다.”(Srp.II.204)

 

 

주석을 보면 한국불교에서 선사들이 말하는 것과 반대임을 알 수 있다. 일부 선사들은 책을 보지 말라고 했다. 책을 보면 알음알이만 생겨서 진리를 볼 수 없음을 말한다. 물론 개념에 메이지 말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언제가 불교방송에서 유명선사의 녹음 테이프 법문을 들었다. 선사는 참선은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고 아~알 쑤 없이, ~악 막힌 상태로 나가는 거여. ~알 쑤 없는 의심만이 있어야지 ‘아하 그런것이구나!’그렇게 하면 공부를 잘못한것이여.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여.”라고 말했다. 선사는 심지어 바보 멍청이가 되어야 공부를 잘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법을 지켜 내려면 학습을 많이 해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교리와 교학공부를 많이 해야 함을 말한다. 성취는 실천에서 나오고, 실천은 학습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교리와 교학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는“뿐니야여, 수행승이 1)믿음을 갖추었고, 2)찾아와서, 3)가까이 앉아, 4)질문하고, 5)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듣고, 6)가르침을 기억하고, 7)기억한 가르침의 의미를 탐구하더라도, 8)의미를 알고 원리를 알아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때까지 여래가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A8.82)라고 말씀 하신 것으로 알 수 있다.

 

정법이 유지되고 사이비법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학습을 해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고 실천해야 함을 말한다. 그러나 유사정법, 사이비법을 공부한다면 배에 짐을 잔뜩 싣는 것과 같이 된다. 결국 배는 침몰하고 말 것이다.

 

비법이 득세할 때

 

비법이 득세할 때 정법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비법이 득세할 때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

 

 

깟싸빠여, 여기 수행승, 수행녀, 재가의 남녀신자들이 1)스승을 존중하지 않고 따르지 않는다. 2)가르침을 존중하지 않고 따르지 않는다. 3)참모임을 존중하지 않고 따르지 않는다. 4)수행을 존중하지 않고 따르지 않는다. 5)삼매를 존중하지 않고 따르지 않는다. 깟싸빠여, 이 피해야만 하는 다섯 가지 원리가 올바른 가르침을 혼란과 파멸로 이끈다.”(S16.13)

 

 

정법이 오래 머물지 못하는 첫번째 이유는 스승을 존중하지 않는 것에 있다. 여기서 스승(saṭṭha)이라고 한 것은 부처님을 말한다. 부처님을 존중하지 않았을 때 부처님 가르침도 존중하지 않게 되고, 승가도 존중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되면 팔정도가 없게 된다. 팔정도가 없으면 여덟 가지 삼매도 없을 것이다.

 

정법시대 세 가지 조건은

 

배에 물건을 가득 실으면 갑자기 침몰한다. 그러나 정법은 하루 아침에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서서히 사라질 뿐이다. 교학이 쇠퇴하면 수행이 쇠퇴하고, 수행이 쇠퇴하면 증득도 쇠퇴한다. 정법시대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Smp.225에 따르면, 정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1) 교법상의 정법(pariyattisaddhamma): 삼장의 모든 부처님 말씀, 2) 행도상의 정법(paipattisaddhamma): 열세 가지 두타행, 열네 가지 의무, 여든 두 가지 대의무, 계행-삼매-통찰, 3) 증득상의 정법(adhigamanasaddhamma): 네 가지 고귀한 길(四向)과 네 가지 경지(四果)와 열반을 뜻한다.”(율장 부기 7,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 율장통합본, 3214, 6426번 각주)

 

교학이 있으면 수행도 있다. 수행이 있으면 증득도 있다. 그래서 교학과 수행과 증득이 있어야 정법시대라고 볼 수 있다. 빠알리 삼장이 있고, 팔정도 수행이 있고, 사향사과와 열반이 있으면 정법시대인 것이다.

 

 

2021-06-2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