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자만의 계급장을 떼어라

담마다사 이병욱 2021. 7. 23. 09:14

자만의 계급장을 떼어라

 

 

꽃이 피었다. 온갖 열대식물로 가득한 사무실에서 오랜만에 보는 꽃이다. 마치 흰 잎사귀처럼 생긴 꽃 안에 꽃다발이 형성되어 있다. 흰 잎사귀처럼 보이는 꽃은 아마 잎사귀일 것이다. 마치 방패가 꽃을 보호하는 듯한 형상이다. 이 꽃이름은 무엇일까?

 

 

꽃에는 이름이 있다. 누군가 붙였을 것이다. 입에서 입으로, 글에서 글로 전파되다 보니 꽃이름이 된 것이다. 산이름도 강이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도 이름이 있다. 사람은 이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컴퓨터를 사용하면 아이디가 있다. 글을 쓰면 필명이 있다. 사람에게는 번호도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예외없이 주민등록번호가 있다. 군대에 가면 군번이 있다. 사업하는 사람에게는 사업자등록번호가 있다.

 

이름이 있어서 구별된다. 이름이 있어야 불러준다. 이름이 없으면 저 산, 그 강이라 할 것이다. 이름을 붙여 주었을 때 비로소 존재가 드러난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이름을 붙여 주었을 때 존재감을 갖게 된다. 하물며 사람은 어떠할까?

 

이름을 붙여 주었을 때 형태가 드러난다. 여기 사과가 있다. 사과라는 말을 했을 때 형태가 떠오른다. 이는 다름 아닌 개념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름은 빤냐띠(槪念)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이 있으면 형태가 있다. 형태가 있다고 해서 이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름 모를 꽃은 형태는 있지만 이름은 없다. 그래서 쉽게 잊혀 진다. 그러나 이름이 부여 되면 실물이 없어도 꽃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이를 산냐(saññā)라고 한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상()을 말한다.

 

언어로 표현된 것은 모두 산냐(相 또는 想)이다. 생각속에서만 있고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이름도 상이고, 꽃 이름도 상이다. 이름을 부여했을 때 하나의 상이 형성된다. 좋은 이미지일 수도 있고 좋지 않은 이미지일 수도 있다. 나는 어떤 이미지일까?

 

필명 담마다사(Dhammadasa)하면 떠 오르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자신은 잘 모른다. 남들은 잘 알고 있다. 직접 보아서 아는 사람도 있고 글을 통해서 아는 사람도 있다. 주로 글을 통해서 이미지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이미지는 매우 중요하다. 특히 인기를 먹고 사는 사람들이 그렇다. 연예인이나 정치인이 대표적이다. 대중에게 잘 보여야 한다. 부정적인 이미지는 치명작이다. 긍정적 이미지를 주어야 한다.

 

정치인은 표를 먹고 산다. 그래서인지 정치인의 프로필을 보면 꼬리표가 길다. 하다 못해 동네 시나 군의 의원직이라도 출마하고자 한다면 이미지 관리를 해야 한다. 긴 학력과 긴 경력이 이를 증명한다.

 

꼬리표만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 만나서 대화를 해보기 전에는 그 사람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사람의 이미지만 보고 표를 준다. 이미지에 속는 것이다.

 

이미지는 하나의 가면과 같다. 수많은 학력과 수많은 경력은 수많은 가면과 같다. 수많은 가면을 쓰고 있으면 본래 얼굴을 알 수 없다. 이미지 관리하는 사람들은 가면 뒤에 숨어 버린다.

 

가면을 페르조나(Persona)라고 한다. 융의 분석심리학에 따르면 기능 콤플렉스라고 했다. 페르조나가 왜 기능 콤플렉스인가? 이는 사회집단이 개인에게 요구하고 기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유유서(長幼有序) 같은 것이다.

 

페르조나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 가면극에서 유래했다. 배우가 왕의 가면을 쓰면 왕의 역할을 한다. 다른 가면을 쓰면 다른 역할을 한다. 현대를 살아 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집에서는 가장역할을 해야 하고, 직장에서는 직위에 맞는 역할을 해야 한다.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가면이 있다. 하루에도 수없이 가면을 썼다가 벗었다가 한다. 이런 삶이 계속되면 어느 것이 자신의 얼굴인지 알 수 없다. 가장 심각한 것은 가면을 자아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무대에서 왕의 가면을 쓴 자가 있다. 현실의 삶에서도 왕과 동일시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왕이로소이다!”라며 떠들고 돌아다닐 것이다. 사람들은 미쳤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가면과 자아를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학위를 자아와 동일시하고, 지위를 자아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할까?

 

나에게도 가면이 있을까? 수많은 가면이 있다. 가장의 가면이 있다. 남편으로서 가면이 있고 아버지로서의 가면도 있다. 블로거로서 가면도 있다.

 

한때 글을 쓸 때는 필명으로 썼다. 얼굴과 실명을 숨기고 필명으로 소통한 것이다. 필명을 가면으로 했을 때 글을 쓰기가 편했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썼다. 얼굴을 숨기고 이름을 숨기니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글이 인터넷에 퍼지자 사람들은 궁금했던 것 같다. 대체 누구냐는 것이다. 가장 많이 묻는 것은 스님 아니냐는 말과 교수 아니냐는 말이었다. 지금은 이런 문의는 없다. 모두 다 공개했기 때문이다.

 

스님이라는 상이 있다. 이를 스님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스님이 되면 스님상이 형성되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스님인데.”라는 스님상이 형성된다. 교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스님상이나 교수상이 형성되면 이를 자아와 동일시하게 된다. 이는 스님이나 교수라는 페르조나를 자신의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티를 내게 되고 교수티를 내게 된다.

 

스님이나 교수는 단지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와와 동일시했을 때 자만이 생겨난다. 이는 다름아닌 우월적 자만이다. 나의 블로그가 불교계 최고 누적조회수를 가졌다고 자랑했을 때 역시 티를 내는 것이 된다. 우월적 자만이다.

 

학위나 지위를 자신의 것으로 보아 지나치게 집착했을 때 가면의 삶을 살게 된다. 자신의 얼굴을 숨기고 가면으로 살았을 때 이중적 삶이 된다. 어느 것이 자신의 얼굴인지 모를 정도가 되었을 때 위선적 삶을 살게 된다.

 

가면이 벗겨질 때가 있다. 학위나 지위가 통용되지 않은 사회에 있게 되었을 때 정신적 충격을 받을 것이다. 속된 말로계급장 떼고 붙어 보자.”라고 했을 때 보여줄 것이 없다. 형편없고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수행처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거짓의 가면을 벗어야 한다. 융은 분석심리학에서 내면의 무의식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했다. 그 동안 소외되었던 진정한 자기를 찾으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융은 꿈의 분석을 통하여 해법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어떻게 거짓 가면을 벗어야 할까?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발견되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가죽끈에 묶인 개가 견고한 막대기나 기둥에 단단히 묶여, 그 막대기나 기둥에 따라 감겨 따라 돌 듯,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세상에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고귀한 님을 보지 못하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고,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물질을 자아로 여기거나,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거나,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S22.99)

 

 

사람에게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고 했다. 한 부류는 가르침을 배운 자이고, 또 한 부류는 가르침을 배우지 못한 자를 말한다. 가르침을 접하지 못한 사람을 일반사람 또는 범부라고 한다. 그런데 범부는 공통적으로 유신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몸과 마음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온 중의 물질에 대해서는 "물질을 자아로 여기거나,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거나,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S22.99)라고 했다.

 

오온을 자신의 것으로 여겼을 때 유신견이 생겨난다. 물질에 대한 것을 보면 네 가지가 있다. 1)물질을 자아로 여기는 것, 2)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는 것, 3)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는 것, 4)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네 가지는 나머지 수온, 상온, 행온, 식온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래서 모두 스무 가지 유신견이 있게 된다.

 

유신견은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한 윤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없다고 생각하면 윤회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떠한 물질이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든 외적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저열하든 탁월하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그 모든 물질은 이와 같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한다.”(S22.100)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관찰은 수온, 상온, 행온, 식온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학위와 지위를 자아와 동일시하는 사람이 있다. 마치 가면을 자아와 동일시하는 것과 같다. 군대에서 대장인 사람이 집에 와서도 대장노릇하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마치 가면을 쓴 자가 가면을 벗지 않는 것과 같다. 스님상도 마찬가지이고 교수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블로거상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탈을 벗어야 한다. 거짓의 가면을 벗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나의 것은 갈애에 대한 것이고, 나는 자만에 대한 것이고, 나의 자아는 사견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나의 것이라는 갈애와 이것은 나라는 자만과 이것은 나의 자아라는 사견을 부수었을 때 가면은 벗겨진다. 더 이상 가면을 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계급장 떼고 보는 것이다.

 

흰잎사귀처럼 보이는 꽃이름은 무엇일까? 사진을 찍어 모야모에 물어 보았다. 꽃이름을 가르쳐 주는 앱을 말한다. 열어 보니 스파티필룸(Spathiphylum)이다. 이름도 생소하다. 한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기 때문에 받아들인다.

 

스파티필름, 남미가 원산지이다. 어떻게 하다 사무실에까지 오게 되었다. 마침내 꽃을 피워 주목받게 되었다. 꽃이름까지 알게 되었다. 인터넷백과사전을 찾아보니 꽃처럼 생긴 희고 넓적한 방패처럼 생긴 잎파리는 생각했던 대로 잎이다. 마치 꽃처럼 생겼으나 꽃이 아닌 것이다. 이를 불염포(佛焰苞, spathe)라고 한다.

 

꽃에는 이름이 있다. 누군가 붙여준 것이다. 이제 꽃이름을 알았으니 꽃이름을 보면 꽃모양이 떠오를 것이다. 하나의 이미지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속에서만 있는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미지로 살아간다. 갖가지 이미지가 있다. 이름 붙여진 것이다. 이미지를 자아와 동일시했을 때 내면의 자기와 멀어질 수 있다. 가면을 자아와 동일시했을 때 자만이 생겨난다.

 

거짓의 가면은 벗어야 한다. 거짓과 위선과 모순의 계급장을 떼어 내야 한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야 한다. 내면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다. 마치 발가벗고 목욕탕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자만의 계급장을 떼어야 한다.

 

 

2021-07-2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