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죽음보다 깊은 잠을
수면의 질이 좋지 않다. 깊은 잠을 자지 못한다. 특히 새벽에 그렇다. 새벽에 깨면 자지 않는 것이 좋다. 잠을 다시 청하여 자면 악몽이나 쩔쩔매는 꿈을 꾼다. 오늘 새벽에도 그랬다.
오늘 새벽 눈을 떠서 스마트폰 시계를 보니 두 시대이다. 남들 같으면 잘 시간이다. 무엇을 해야 할까? 스마트폰으로 글을 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다. 그저 누워 있었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다. 예외 없이 꿈을 꾸었다. 이번에도 쩔쩔매는 꿈이다. 나이가 들만큼 들어 노년에 이르러 직장으로 출근한 날 겪은 것에 대한 꿈이다.
요즘 꿈을 꾸면 직장에서 쩔쩔매는 꿈을 꾼다. 새 직장에 들어 갔는데 적응하지 못하는 꿈을 말한다. 이전에는 군대에 다시 끌려 가는 꿈을 꾸었다. 무려 20년가량 꾼 것 같다. 군대 꿈이 끝나니 이제 직장 꿈을 꾸고 있다.
나는 왜 직장 꿈을 계속 꾸는 것일까? 직장생활을 그만 둔지 16년 되었다. 이후 일인사업자의 삶을 살고 있다. 가장 긴 기간이다. 이전 직장 생활할 때는 가장 긴 것은 7년이었고, 그 다음은 4년이었다. 이후로는 2년짜리도 있고 1년짜리도 있고 6개월짜리도 있었다. 심지어 다닌 지 며칠 만에 그만 둔 경우도 있었다.
첫 직장을 가장 오래 다녔다. 7년 다녔으니 장수한 것이다. 수 없이 직장을 옮겼다. 자의로 옮긴 것은 드물다. 타의로 옮긴 것이 많다. 내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은 개인사업자로 삶을 살고 있다. 내것이기 때문에 옮길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직장 꿈을 꾸는 것은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개 직장을 옮기고 적응하기 위해서 애쓰는 꿈이다. 능력을 보여주지 못해서 쩔쩔매는 꿈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직장 꿈을 꾸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아마 생존과 관련이 있는것 같다. 직장이 없으면 죽음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월급을 받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직장이 없으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이와 같은 생존본능이 무의식의 영역에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
꿈을 깨고 나면 안심이다. 그래도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기판설계업을 말한다. 이 일을 해서 지금까지 먹고 살아왔다. 앞으로도 별일 없는 한 이 일로 먹고 살 것이다. 쩔쩔매는 꿈을 꾸다가도 깨어나면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은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군대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군대 삼년은 무척 힘들었다. 몸이 약해서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 더 힘들었다. 무엇보다 상명하복의 군대생활은 맞지 않았다. 일개월 단위로 동기가 끊어져서 한달이라도 먼저 들어온 자에게 복종해야 했다. 나이가 어린 자들도 많았다. 세상에 이런 불합리가 없다.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은 ‘집합’이라는 말을 잘 알고 있다. 집합이라는 말은 대단히 무서운 말이다. 오늘 저녁에 집합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그날 저녁 밥이 잘 넘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얻어 맞는 날이기 때문이다. 주먹으로 배를 맞으면 신음하며 고꾸러진다. 이런 기억은 군대갔다고 온 사람들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군대생활 할 때 감옥에 있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 감옥은 한번도 갖다 온 적이 없다. 아직까지 경찰서 유치장에도 한번도 가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군대보다 감옥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기합과 구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대에서는 집합이라는 말은 살 떨리는 말이다.
군대에서 기억은 트라우마로 남은 것 같다. 다시는 뒤돌아보기도 싫은 기억이다. 근처에도 가지 않을 정도의 기억이다. 그러나 무의식의 영역에는 남아 있다. 세월이 지나서 모두 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으나 무의식의 영역에서는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는 꿈으로 나타난다.
군대꿈에서 가장 갑갑한 것은 군대에 다시 가는 것이다. 군대에 갔다 왔음에도 다시 끌려 가야 하는 것이다. 하소연도 못하고 다시 군대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데 꿈도 진화하는 것 같다. 군대 갔다 왔다고 말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군대꿈을 꾸지 않는다. 트라우마가 치유된 것일까? 아마 자연스럽게 트라우마가 치유된 것 같다. 무려 20년 걸린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직장꿈이다. 새로 들어간 직장에서 적응하지 못해서 쩔쩔매는 꿈이다. 아마 생존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언제 직장꿈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직장을 열번 이상 옮겼다. 이력서를 쓸 때 너무 많아서 1년 이하는 쓰지 않았다. 이렇게 자주 옮겨 다니다 보니 적응할 만하면 또 다시 새로운 직장 찾는 식이 되었다. 내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것이라면 옮긴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지금은 더 이상 옮겨 다니지 않는다.
지금은 내 일을 하고 내 사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미래는 불안하다. 누가 월급 주지 않는다. 스스로 벌어먹고 살아야 한다. 일감이 없으면 놀아야 한다. 아마 이런 불안이 직장꿈으로 나타나는 것인지 모른다. 대체 얼마를 벌어 놓아야 안심할 수 있을까?
사업자등록을 한 것은 2007년도의 일이다. 이제 14년차 사업자가 되었다. 사업을 해서 3년이 지나면 자립의 기반이 마련된다. 10년 이상 되었으니 자리를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혼자 일하고 있다. 일인사업자인 것이다. 원맨컴퍼니이고 일인사장인 것이다. 벌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직원을 두고 할만한 처지가 아니다.
일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논다. 일하는 날 보다 노는 날이 더 많다. 노는 입에 염불한다고 노느니 글을 쓰고 있다. 그러다 보니 느는 것은 글 밖에 없다. 사업을 하면서 번 돈은 온데간데없지만 한번 써 놓은 글은 남아 있다. 물질적으로 부유하지는 않지만 정신적으로는 충만하다. 그럼에도 생존의 트라우마에서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직장꿈도 군대꿈처럼 언젠가 꾸지 않게 될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꿈을 꾸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새벽잠을 자지 않아야 한다. 새벽에 잠이 깨면 명상을 하든지, 책을 읽든지, 운동을 하든지, 글을 쓰든지 해야 할 것이다. 새벽 꿈은 무익한 것이다. 꿈을 분석하여 무언가 얻으려고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초기경전을 보면 의외로 꿈에 대한 가르침은 거의 없다. 방대한 빠알리니까야에서 꿈에 대한 경은 서너 개의 불과하다. 그 대신 부처님은 늘 깨어 있을 것을 강조했다. 어떻게 깨어 있어야 할까? 다음과 같은 정형구가 이를 잘 말해 준다.
“수행승들이여, 깨어있음에 철저한 것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낮에는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밤의 초야에는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밤의 중야에는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눕는다. 밤의 후야에는 일어나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수행승들이여, 깨어있음에 철저한 것은 이러한 것이다.”(A3.16)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이는 잘 때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다고 잠자면서까지 깨어 있으라는 것은 아니다. 잠을 잘 때는 무의식의 영역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깨어 있을 수가 없다. 그 대신 잠들기 직전까지 깨어 있어야 하고, 잠에서 깨어나자 마자 또 깨어 있어야 한다. 이는“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눕는다.”라는 표현으로 알 수 있다.
어떤 이는 잠자면서도 화두를 든다고 말한다. 몽중일여라고 하여 꿈속에서도 화두를 든다고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몽중일여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거닐거나 앉아 있는 등 깨어 있을 깨 철저히 깨어 있을 것을 강조했다. 그래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눕는다고 했는데, 이와 같이 해서 잠을 잔다면 꿈을 꿀 수 없다.
잠드는 순간까지도 사띠하고, 잠에서 깰 때도 사띠하면 꿈을 꿀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짧은 잠을 자더라도 깊은 잠을 자는 것을 말한다. 마치 죽음 보다 더 깊은 잠을 말한다.
지난 일요일 죽음보다 깊은 잠을 잤다. 고향에 갔다가 귀가하는 길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잠을 잔 것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수면 질이 좋지 않아서인지 자주 졸립다. 그날도 그랬다.
휴게소에서 잠시 눈을 붙였는데 네비에서 시간을 알리는 알람 소리에 깼다. 순간 어리둥절했다. 깨긴 깼는데 어느 곳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기억이 모두 지워진 것이다. 몇 초 후에 기억이 되살아 났다. 불과 10-20분 가량 죽음보다 깊은 잠을 잔 것이다.
죽음보다 깊은 잠을 잘 때 꿈을 꾸지 않는다. 완전히 이전과 단절이 되는 것 같다. 아마 사람이 죽으면 이런 상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화생(化生)으로 태어난 존재가 죽음보다 깊은 잠에서처럼 깨어난 것처럼 태어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본다.
천상에서 화생으로 태어난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청정도론에 있다. 천신이 된 ‘개구리 만두까이야기’가 그것이다. 개구리가 각가라 연못에서 부처님의 설법에 표상을 취하고 있다가 설법을 듣던 목동의 막대기에 짓이겨 죽었는데 눈을 떴더니 삼십삼천 환희동산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잠에서 깨어난 듯, 거기서 천녀의 무리에 둘러싸인 자신을 보고”(Vism.7.51)라고 묘사했다.
화생하는 것은 마치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다고 본다. 눈을 번쩍 떴는데 전혀 다른 세계에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 세계는 천상과 같은 선처일 수도 있고, 지옥과 같은 악처일 수도 있을 것이다.
화생하는 존재는 과거생이 기억나는 것 같다. 태생의 존재의 경우 태에 들기 때문에 전생이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화생의 존재는 마치 꿈에서 꿈을 깬 듯 눈을 번쩍 뜨는 것과 같기 때문에 전생이 기억날 것이다. 초기경전을 보면 천상의 존재가 이전 생을 기억하는 장면이 종종 있다. 지옥의 존재도 이전 생이 기억나기 때문에 괴로워할 것이다.
죽음보다 깊은 잠을 자고 나면 순간적으로 “멍”해진다. 수초 후에 기억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꿈이 있을 리가 없다. 죽음보다 깊은 잠을 자고 난 후에 운전했더니 전혀 졸리지 않았다. 깨끗이 ‘리셋’ 된 것 같았다. 부처님이 깨어 있음에 철저하라고 한 것도 아마 죽음보다 깊은 잠을 자라고 말한 것 같다. 꿈이 없는 잠을 말한다.
수행자라면 매일 죽음보다 깊은 잠을 자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의식의 영역은 본래 깨어 있을 때의 영역이지만 부처님이 말씀하신 깨어 있음은 매사에 늘 사띠하라는 말과 같다.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지 않고 근심과 걱정 등 망념에 사로잡혀 있지 말라는 말과 같다.
지금은 더 이상 군대꿈을 꾸지 않는다. 그 대신 직장꿈을 꾼다. 그것도 새벽에 꿈을 꾼다. 그러나 깨어 있음에 철저한다면 꿈을 꾸지 않게 될 것이다. 잠을 잘 때 일어날 것을 염두에 두고 사띠하며 잠을 잔다면 죽음보다 더 깊은 꿈을 꾸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다.
융의 분석심리학에서는 무의식을 의식화하라고 한다. 이를 자아에서 자기에게 가까이 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무의식의 영역은 가르침의 대상이 아니다. 늘 깨어 있음을 강조하기 때문에 꿈을 꿀 수가 없다.
잠들기 전에도 사띠하고 잠에서 깨는 순간에도 사띠한다면 꿈을 꿀 수 없다. 그래서 죽음보다 깊은 잠을 잘 것이다. 짧은 잠이라도 전혀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필름이 끊어질 정도로 죽음보다 깊은 잠을 체험했다. 수행에서도 적용한다면 더 이상 직장꿈을 꾸지 않아도 될 것 같다.
2021-07-1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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