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근불가원

북한 관련 글을 올렸더니

담마다사 이병욱 2021. 8. 29. 13:19

북한 관련 글을 올렸더니

북한에 대한 글을 올렸더니 난리가 난 것 같다. 김태형선생의 유튜브 강연을 듣고 소감 쓴 것을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동시에 올렸는데 반론이 만만치 않다. 우리사회에서는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문제는 아직까지 용인되지 않은듯 하다.

블로그 댓글에 글이 연속으로 올려져 있다. 북한혐오에 대한 것이다. 늘 듣던 레파토리를 말한다. 이른바 보수우익들이 하는 말이다. 아직도 반공을 국시로 여기는 듯한 사람들이 울분을 토로하는 것 같다. 불교와 관련된 이야기만 쓸 것이지 왜 이런 글을 쓰느냐고 나무란다. 가장 압권은 "아니 지상천국인데 님부터 북으로가서 사세요."라는 글이다. 북한이 좋으면 북한에 가서 살라는 것이다. 이런 댓글은 승인하지 않는다. 나만 보고 말 뿐이다. 그렇다고 차단하지 않는다. 서로 생각이 다를뿐이라고 인정한다.

아직까지 우리사회는 레드콤플렉스가 있다. 이는 빨갱이라는 말로 나타난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틀린 것으로 보아 빨갱이 딱지를 붙인다. 사회에서 매장 시켜 버리겠다는 뜻으로 본다. 이런 사람들은 북한을 동반자로 보지 않는다. 그저 멸절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흡수통일이라는 말자체가 멸절대상임을 말힌다.

여가 있으면 야가 있기 마련이다. 어느 모임이나 단체이든지 주류가 있으면 비주류가 있다. 거드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생각이 다른 것이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하여 틀린 것일까? 여가 있으면 야가 있다는 것은 상대방을 파트너로 인정해 주고 있다는 말과 같다. 여만 있고 야만 없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여와 야는 어디를 가나 있기 마련이다. 상대방을 정치적 파트너로 인정하기 때문에 여도 있고 야도 있는 것이다. 남북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북한을 흡수통일 상대로 여긴다면 체제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 정치적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아 대화하지 않겠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되었을 때 대립과 긴장과 갈등이 지속될 것이다. 급기야 전쟁날지 모른다.

분노는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이는 "분노에서 파멸이 생겨나네."(A7.64)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상대방을 혐오대상으로 인식하여 멸절시키고자 할 때 분노의 전쟁이 되기 쉽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분노는 파괴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모두가 다 망하게 되어 있다. 가장 좋은 것은 분노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혐오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면,
그 때문에 그는 더욱 악해지리.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않는 것이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네.”(S11.5)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않는 것이 승리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사람이 싫다고 하여 혐오의 마음을 낸다면 그는 이미 진 사람이다. 혐오대상으로 보아 분노한다면 이미 진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이데올로기에서 해방되고 있지 못하고 있다. 혐오세력이 남아 있는 한 통일은 요원하다. 흡수통일이라 하여 멸절의 대상으로 본다면 더욱 더 멀어진다. 상대방을 파트너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대화가 된다. 철천지 원수로 보아 원수를 갚을 대상으로 본다면 혐오의 대상이 되어 대화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오로지 증오와 적개심만 남게 된다. 그 결말은 무엇일까? 파멸이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분노는 파멸적으로 작용한다.

이제 보복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이는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고, 분노를 분노로 갚지 않고, 욕지거리를 욕지거리로 갚지 않는다."(A4.164)라는 부처님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끊어야할까?

율장대품에 디가부이야기(Dīghāvuvatthu)(Vin.I.341)가 있다. 꼬삼비다발에 실려 있는 이야기로서 복수에 대한 것이다. 꼬살라국의 왕자 디가부가 자신의 부모를 무참하게 살해한 까시국의 브라흐마닷따에게 복수하고자 한 것이다. 사전에 이를 눈치챈 아버지는 죽임을 당하기 전에 아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사랑하는 디가부야, 너는 길게도 짧게도 보지 말라.
사랑하는 디가부야, 원한은 원한으로 쉬어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디가부야, 원한은 원한을 여읨으로써 쉬어진다.”(Vin.I.345)

아버지는 원한은 원한으로 갚을 수 없다고 했다. 복수하지 말라는 것이다. 만약 원한을 원한으로 갚으면 어떻게 될까? 복수를 하면 복수를 당한 쪽에서는 보복하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죽이는 자는 죽임을 당하게 되고 이긴 자는 패하게 된다. 싸움 그칠 날 없게 된다. 그래서 디가부의 아버지는 간곡하게 “원한은 원한을 여읨으로써 쉬어진다.”라고 말한 것이다.

다시는 이땅에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국방을 강화해야 한다. 감히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침략하는 군대가 아니라 지키는 군대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마치 여와 야처럼 상대방을 대화상대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나와 견해가 맞지 않다고 하더라도 나와 틀린 것이 아니라 나와 견해가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와 체제가 다르다고 하여 부정한다면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이래 가지고서는 긴장과 갈등의 연속일 뿐이다. 무엇보다 혐오를 걷어 내야 한다. 보복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에 정답이 있다.

디가부 아버지가 '길게도 말라.’라고 한 것은 ‘오래 원한을 품지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짧게도 말라.’라고 한 것은 ‘급하게 친구와 갈라서지 말라.’는 것이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아서는 안된다. 원한은 원한을 여읠때 원한은 갚아진다. 혐오한다고 해서 혐오의 대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전쟁이 일어난지 70년이 넘었다. 두 세대가 지난 것이다. 언제까지나 대를 이어 혐오해야 할까? 이와 같은 혐오는 우리사회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망국적인 지역감정이 대표적이다. 동성애자에 대한 것도 있다. 보수와 진보라는 진영논리에도 적용된다. 그 혐오의 마음을 내려 놓아야 혐오의 대상이 사라진다.

2021-08-2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