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기

송기원 작가의 소설 ‘숨’을 읽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1. 9. 4. 17:37

송기원 작가의 소설 ‘숨’을 읽고

 

 

오늘로서 작가 송기원 선생의 소설 숨을 다 읽었다. 하루밤에 다 읽을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매일매일 조금씩 읽었다. 기억하고 싶은 부분은 밑줄 쳤다. 한번에 다 읽고 깨끗이 잊어버리면 안될 것 같아서이다. 무엇보다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소설을 쓰기 위하여 얼마나 오래 갈고 다듬었을까?

 

 

소설 숨을 다 읽고 나자 허탈했다. 대체 그 동안 나는 무엇을 했을까?’에 대한 것이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사선정을 체험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무색계 선정도 체험했고 깔라빠도 체험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두루 섭렵한 것이다. 그것도 이전에 수행을 해 본적이 없는 상태에서 미얀마 파옥 센터에 들어가서 모두 이룬 것이다.

 

지혜를 갖춘 사람(naro sampanno)

 

소설 속에서 본 니밋따(表象)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놀랍다. 파옥센터에서는 위빠사나 수행센터이기는 하지만 선정체험을 먼저 하게 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사선정 체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니밋따가 떠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니밋따는 아무에게나 뜨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전생부터 수행했던 사람이나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청정도론 제1장 제1절에 나오는 게송으로 알 수 있다.

 

 

계행을 확립하고 지혜를 갖춘 사람이

마음과 지혜를 닦는다.

열심히 노력하고 슬기로운 수행승이라면,

이 얽힌 매듭을 풀 수 있으리라.”(Vism.1.1, S1.23)

 

 

게송에서 지혜를 갖춘 사람(naro sampanno)’은 생이지자를 말한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 세 가지 원인에 의한 업생적 결생의 지혜로 지혜를 갖춘 자”(Vism.1.7)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전생에 무탐, 무진, 무치의 수행을 했던 자가 이 세 가지를 원인을 하여 금생에 태어남을 말한다. 이는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학이지자가 아님을 말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선천적으로 지혜를 타고 났기 때문에 전생에 이어서 금생에서도 수행자로 살아 갈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수행을 하면 선정에 쉽게 들 수 있고, 선정수행에 반드시 필요한 니밋따도 뜰 수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소설 숨에서 작가는 전생의 수행자였음에 틀림없다.

 

나는 전생의 수행자였을까? 이런 의문을 해 본다. 아닌 것 같다. 전생에 수행자였다면 선정에 들어야 하고 니밋따도 떠야 할 것이다. 물론 가능성은 남아 있다. 작가처럼 미얀마로 가서 머리를 깍고 단기출가하면 니밋따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능성은 희박할 것 같다. 아직까지 수행근기가 없기 때문이다.

 

32가지 몸관찰

 

작가는 소설에서 자신의 수행체험을 밝혔다. 한마디로 놀라운 것이다. 마치 청정도론에 있는 사마타 수행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32가지 몸관찰이 그렇다. 니밋따를 이용하여 마치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비추듯이 머리털, 내장, 골수 등 몸의 구석석을 샅샅이 비추고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일까?

 

살갗에 대해서는 니밋따의 빛 아래 드러난 온몸의 살갗은 그 성장이 요란스러웠다.”(, 196)라고 했다. 니밋따로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살갗을 들여다 보았을 때 성장하는 모습이 보였다는 것이다. 장기에 대한 것은 어떨까? 이에 대하여 이어서 콩팥까지 저마다 살아서 움직인다.”(, 197)라고 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마치 눈 앞에서 본 것처럼 볼 수 있음을 말한다.

 

인간의 정신세계는 불가사의한 것 같다. 정신을 고도로 집중하면 육안으로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음을 말한다. 이를 경전에서는 법안으로 설명한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후에 처음으로 다섯 수행자에게 가르침을 설했을 때 꼰당냐에게서 법안이 일어난 것이 대표적이다.

 

초전법륜경에서 꼰당냐에게 법안이 생겨난 장면이 있다. 이는 그 가르침을 설할 때에 존자 꼰당냐에게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S56.11)라는 가르침에 근거한다. 여기서 진리의 눈은 법안(法眼: dhamma cakkhu)을 말한다. 육체의 눈 이외 진리의 눈이 새로 생겨난 것이다.

 

32가지 몸관찰은 부정관에 대한 것이다. 몸의 안팎을 세밀히 관찰했을 때 더럽고 역겨운 것으로 가득차 있음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여러가지 오물로 가득한 것으로 성찰한다.”(Vism.8.44)라고 했다. 이는 대념처경에서 서른 두 가지 양상에 대한 혐오관찰로 설명된다. 그래서 발가락 위에서부터 머리카락 아래에 이르고 피부의 표피에 이르기끼지 여러가지 오물로 가득한 것으로 개별적으로 관찰한다.”(D22.7)라고 했다.

 

32가지 신체기관을 관찰하는 목적은 신체에 집착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마치 오물장같은 장기를 관찰했을 때 세상의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세상의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D22.7)고 했다. 이렇게 관찰하려면 마치 눈에 보듯이 장기를 관찰해야 할 것이다. 선정에 들어서 니밋따로 비추면 가능하다고 한다.

 

윤회는 없다고 하는데

 

소설 숨은 마치 수행지침서처럼 보인다. 선정삼매에 들어서 니밋따로 한번도 비추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소설 속에서 니밋따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할까?’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세계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긍정도 부정도 하기 힘들다. 그저 그러려니한다.

 

소설을 마치 수행지침서 읽듯이 밑줄 치며 읽었고 또한 새기며 읽었다. 나중에 볼 때 도움이 되고자 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접어 놓았다. 그런데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바로 윤회에 대한 것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전생의 죄업으로 현생에 천민으로 태어났다는 이들에게, 붓다는 당당하게 외친다. 윤회는 없다고. 있는 것은 자신이 짊어진 몸과 마음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현생의 바로 여기에서 자유로운 자가 되는 것이라고.”(, 155-156)

 

 

 

작가는 윤회가 없다고 말한다. 더구나 부처님도 윤회가 없다고 당당하게 선언했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고개가 갸웃해진다. 초기경전에서는 분명히 윤회가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파옥 사야도도 자신의 법문집을 모아 놓은 책 업과 윤회'에서도 윤회를 말했다. 그럼에도 윤회가 없다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작가는 윤회에 대하여 고대인도의 카스트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법륜스님도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들어 보면 부처님은 윤회를 말씀하신적이 없다고 하면서 있다면 힌두교의 윤회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심지어 천당도 없고 지옥도 없다고 즉문즉설에서 말했다.

 

 

작가는 윤회에 대하여 사성계급을 조장하는 브라만교 또는 힌두교의 악습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윤회를 말한적이 없다고 한다. 더구나 책에서 붓다의 가르침 중 핵심을 이루는 삼법인의 제행무상과 제법무아, 일체고통 어디에도 윤회는 없다.”(, 156)라고 했다.

 

작가는 양보해서 윤회가 있다면 순간윤회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구태여 강변한다면, 윤회란 바로 여기의 한생각에서 다음 생각으로 이어지는 찰나의 변화라고 해야 한다.”(, 156)라고 나름대로 윤회관을 밝히고 있다.

 

작가의 윤회관에 의문을 제기하며

 

작가의 윤회관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수행체험이 없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처지이지만 경전에 있는 부처님 가르침과 너무 차이가 난다. 경전에 있는 것은 그야 말로 방편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체험해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작가의 윤회관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작가는 순간윤회는 인정했다. 매순간 오온이 생멸하는 것에 대하여 윤회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윤회라기 보다는 윤전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그러나 부처님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일생윤회를 말씀 하셨다. 대표적으로 상윳따니까야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의 모음’(S15)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고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점을 알 수 없다.”(S15.1)고 했다.

 

부처님은 윤회하는 원인에 대하여 무명과 갈애로 보았다. 무명에는 덮이고, 갈애는 속박되어서 세세생생 윤회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현재의 삶에서 순간윤회만을 인정하는 것은 너무 좁혀 본 것이다. 순간윤회가 있으면 일생윤회도 있는 것이다.

 

작가는 소설에서 바왕가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바로 바왕가가 일생윤회에 해당되는 것이다. 작가는 파옥 사야도의 선정삼매에 대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그런데 파옥사야도 이름으로 나온 책이 업과 윤회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어디에도 윤회따위는 없다고 하면서 심지어 아니, 없는 것이 아니라 윤회에 대한 강한 거부만이 있을 뿐이다.”(,156)라고 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윤회는 불교의 정체성과 같다. 불교에서 윤회를 빼 버리면 무엇이 남을까? 아마 철학만 남을 것이다. 기독교에서 신을 빼 버리는 것과도 같다. 니밋따가 떠서 니밋따를 이곳저곳 비추어 보고 더구나 깔라빠 수행까지 했으니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모두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윤회가 없다고 하니 대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스승이 없는 시대에

 

스승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 이런 말 저런 말이 오간다. 부처님 당시에도 그랬을 것이다. 육사외도를 말한다. 그런 외도 중에서도 업과 윤회를 부정하는 스승이 있었다. 아지따 께싸깜발린은 보시도 없다. 공양도 없다. 선악의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업과 업의 과보를 부정하는 것이다.

 

업과 업보를 부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는 인과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행위에 대하여 책임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 된다. 업과 업보가 부정되기 때문에 내세도 부정된다. 윤회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외도의 사상에 대하여 부처님은 저 세상이 있을 때에 저 세상은 없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준다면, 그는 올바른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려 주는 것이 됩니다.”(M60)라고 했다.

 

부처님은 초기경전 그 어디에도 윤회는 없다고 말한적이 없다. 그럼에도 소설 숨에서는 부처님이 윤회가 없다고 당당하게 외쳤다고 했다. 물론 이것은 전생의 죄업으로 현생에 천민으로 태어났다는 것에 대한 부정이다. 이에 대하여 경전의 한구절을 예로 들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브라만이나 천민 가릴 것 없이 누구에게나 전생이며 후생은 없다. 있는 것은 현생인 지금 바로 여기다. 바로 여기서 깨닫기만 하면 누구든지 붓다가 된다. 아니 브라만이 된다. 누구나 닙바나를 얻어 현생의 노예적 삶에서 벗어나고 고통에서 자유롭게 된다.”(, 155)

 

 

작가는 지금 여기를 강조하고 있다. 누구든지 깨닫기만 하면 부처가 됨을 말한다. 부처가 되면 당연히 윤회가 없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자들은 세세생생 윤회해야 한다. 그럼에도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윤회는 없다고 선언한 것은 너무 섣부르다.

 

윤회와 관련하여 작가의 말을 믿을 것인가 부처님 가르침이 실려 있는 경전을 믿어야 할까? 이는 명확하다. 맛지마니까야에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이 있다. 경에 따르면 그대들이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M60)라고 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한마디로 믿을 만한 스승이 없으면 경전에 의지하라라는 것이다.

 

진주에 대하여

 

소설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동의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동의하지 못한 것도 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마치 중유를 인정하는 듯한 장면이다. 딸이 죽었는데 사선정 상태에서 만나는 장면을 말한다. 딸의 입장에서 아빠의 빛 덩어리에서 처음으로 나의 감각을 찾아낸 것은, 내가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오던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138)라고 했다. 이를 소설에서는 존재의 부재 속에서 실존의 증거를 찾는 있는 나의 감각’(137)이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중유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

 

소설을 읽어 갈수록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허구인지 알 수 없다. 이는 작가처럼 선정체험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다. 선정상태에서는 정신이 고도로 집중된 상태이기 때문에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신통은 사선정에서 발생한다. 이렇게 본다면 작가의 상상력은 그대로 체험일 수 있다. 그러나 윤회를 부정하면서 중유를 인정하는 듯한 구성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소설 말미에 진주라는 말은 더욱더 이해하기 어렵다.

 

소설을 한달에 걸쳐서 다 읽었다. 그것도 밑줄쳐 가며 메모해 가며 꼼꼼하게 읽었다. 그러나 다 수용할 수 없다. 일부만 받아 들여야 한다. 다 받아 들이기에는 가르침과 충돌하는 것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저 소설로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경전은 경전이고 소설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나가는 글에서 진주에 대한 것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무명의 어리석음에서 깨어나면, 지금까지 나라고 여겼던 뼛조각들이 산산이 부서져 흩날린 뒤에 무언가 다른 것이 있다. 무엇이 있다고 해도 전에 있던 것과 같은 상태는 아니다. 뼛조각들이 부서져 흩날린 뒤 그 빈자리에 무엇이 나타났을 뿐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다. 바로 진주다. 그러고 보면 찢어진 옷을 걸치고 유랑하던 나도, 실은 진주가 비추어내고 있던 나다. 나 이외에 다른 진주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진주는 누구에게나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다.”(, 나가는 글, 319)

 

 

작가는 나가는 글에서 진주를 언급했다. 진주목걸이할 때 진주였는 줄 알았다. 그러나 한글로만 써 놓았기 때문에 어떤 진주를 말하는지 알 수 없다. 문맥상 진주(眞主)로 보인다. 진짜 주인을 말한다. 진아나 참나 같은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는 작가가 나가는 말에서 선()에 대하여 언급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허구인지

 

소설은 730일부터 읽었다. 소설을 읽기 시작할 때 글을 하나 남겼다. 이는 피는 더럽다”송기원 작가의 구도소설 ‘숨’’ (2021-07-30)라는 제목의 글이다. 글에서 구도소설일 것이라고 언급하고서 앞으로 소설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다.”라고 했다. 그리고 천천히 음미하며 읽을 것이라고 했다. 마침내 한달이 넘게 걸려 320여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을 다 읽었다. 그러나 의문이 남는다.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과 맞지 않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선정체험을 하면 가르침은 무시되는 것일까? 선정체험을 하면 경전상의 가르침은 달을 가리키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체험해 보지 않아서 알 수 없다. 그래서 더욱 더 경전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제아무리 저명한 학자가 말했다고 해도 경전의 권위만은 못한 것이다. 제아무리 유명한 선사가 한마디 했다고 하더라도 전승된 경전의 권위만 못한 것이다.

 

작가의 작품세계는 이해하기 어렵다. 나의 체험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수용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윤회가 없다거나, 중유를 인정하는 것이라거나, 진주를 말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과는 다르다. 소설은 소설로 보아야 할까?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허구인지 알 수 없다.

 

 

2021-09-0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