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기

수불스님의 탄지화두를 접하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1. 21. 16:33

수불스님의 탄지화두를 접하고

 


답답한 마음이다. 무언가 풀리지 않는 것이 있다. 나에게 있어서는 명쾌하지 않다. 책을 보면 볼수록 답답하다. 아마도 나의 능력이 문제일 것이다. 사띠 법문 들을 때처럼 좌절된 마음이다.

소설 '시간이 없다'를 다 읽었다. 하루이틀에 읽은 것이 아니라 거의 한달에 걸쳐 읽었다. 어떤 날은 하루 한페이지 읽었다. 수불스님의 일대기에 대한 것이다. 아직까지 살아 있는 스님에 대해서 쓴 소설을 보지 못했다.

수불스님을 한번도 뵌적 없다. 인터넷으로는 보았다. 소설에도 설명 되어 있듯이 2010년 무렵 국제간화선 세미나를 불교TV 사이트에서 본 것이다.

수불스님은 눈매가 매섭다. 무섭고 두려운 인상이다. 스님 앞에 서면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위축될 것 같다. 그러나 스님은 재가자에게는 잘 대해 준다고 했다. 그대신 출가자한테는 엄격하다고 했다.

방송에서 본 수불스님의 말버릇이 있다. 수불스님은 '입장'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서로 다른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찬주 작가에 따르면 '시간이 없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소설 제목도 '시간이 없다'라고 정했다고 한다.


왜 이리 마음이 답답할까? 그것은 그때 당시 간화선 세미나할 때 정호스님이 말한 것에서도 연유 된다. 그때 당시 정호스님은 총무원에서 직책을 맡고 있었다.

정호스님은 세미나에서 체험을 강조했다. 백번천번 얘기 해보았자 소용없다는 것이다. 이를 여러 비유로 설명했다. 사과를 먹어 봐야 안다는 사과의 비유, 물에 들어가서 헤엄을 쳐 봐야 한다는 수영의 비유가 그것이다. 그리고 운전의 비유도 들었다. 백번천번 이론으로 아는 것과 한번 운전해서 아는 것은 다르다고 했다.

정호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마음 속으로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라고 생각했다. 방법은 가르쳐 주지 않고 해보야만 알 수 있다는 말에 반발심이 생겼다.

간화선을 한번도 한 적이 없다. 불교에 늦게 입문 했고 아는 스님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것도 이유가 된다. 책에서 보고 방송에서 접한 것이 전부이다. 어떤 것인지는 이론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체험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맛을 모른다.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심지어 비난하기도 한다. 이럴 때 하는 말이 있다. 해보지도 않고 비난 한다는 것이다. 수행을 해보지 않은 자가 수행을 비난하기 쉽고, 경전을 읽지 않은 자가 경전을 비난하는 것과 같다. 간화선을 해보지 않은 자가 간화선에 대해서 말하면 비난이 되기 쉽다.

나에게는 스승이 없다. 스승이 없으면 경전이 스승이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장자들이여, 그대들이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M60)라고 말했다. 마땅히 믿을만한 스승이 없을 때 부처님 가르침을 스승으로 삼으라는 말이다.

초기경전, 즉 니까야를 스승으로 삼고 있다. 부처님 원음이라 알려져 있는 니까야말로 스승으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다른 것은 들어 오지 않는다. 대승경전도 그렇고 대승경전에 근거한 수행방법도 그렇다.

간화선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아직까지 한번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방대한 니까야를 보아야 하고 위빠사나 여러 단계를 생각하면 시간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주변에는 간화선을 해서 효과를 봤다는 사람이 있다.

정평불 공동대표 이희선 선생이 있다. 언젠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간화선 체험을 듣게 되었다. 서울 안국선원에서 집중수행 했었는데 며칠만에 신비한 체험을 했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언급된 체험담과 비슷한 것 같다.

소설은 허구이다. 그러나 사실에 바탕을 둔 허구도 있다는 것이다. 인물에 대한 소설이 그렇다. 일종의 인물평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소설에서는 간화선이 무엇인지, 간화선 수행은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그러나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에서 보는 것처럼 체계화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이론화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탄지화두가 있다. 안국선원에서 탄지 화두로 깨쳤다는 사람들이 많다. 탄지화두는 어떤 것일까? 이는 "무엇이 이 손가락을 튕기게 했습니까?"라고 묻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손가락 튕기기 하면 소리가 난다. 무엇이 손가락을 튕기게 했을까? 두 손가락을 부딪치고 비벼서 소리가 난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했는지 묻고 있다. 당연히 내가 한 것이다. 여기서 그친다면 화두가 아니다. 선사는 "내가 누구냐?"라고 물어 볼 것이다. 그러면 거의 대부분 내가 누군지 설명하지 못한다.

나는 누구일까?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궁금해 왔다. 부처님도 궁금해 했을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나를 찾지 말라고 했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M2)에 실려 있다. 나를 찾는 것은 번뇌망상만 일으킬 뿐이라고 했다. 또한 그런 나는 없는 것이라고 했다.

"마치 모든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이,
이와 같이 존재의 다발에 의해
뭇삶이란 거짓이름이 있다네.”(S5.10)

뭇삶(satta)은 중생을 말한다. 중생이라는 명칭은 있지만 중생은 없다는 것이다. 나라는 명칭은 있지만 나는 없다. 있다면 오온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걸어간다."가 아니라 "오온이 걸어간다."라고 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수불수님은 탄지화두를 주어 사람들을 깨우쳤다. 그렇다면 어떻게 참구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의심을 하되 내가 낸 문제는 생각하지 말고 답만 찾으면 됩니다. 생각으로 찾으려 하면 안 됩니다. 몸으로 찾아야 답이 나옵니다. 머리를 잘라버리고 몸으로 의심하십시오."(시간이 없다, 15쪽)

 


수불스님은 문제를 생각하지 말고 답만 생각하라고 했다. 손가락 튕기는 이 놈은 생각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질문을 보면 '무엇이'라고 했다. '누가'라고 하지 않은 것이다.

질문을 제대로 해야 한다. 부처님은 "이 괴로움은 누가 만들었습니까?"라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누구를 가정 했을 때 그 누구에 대한 답은 없다. 유일신교라면 단 하나의 원인, 즉 그분 창조주를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와 같은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 나는 ‘사람이 태어난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사람이 태어난다.’라고 말했다면 ‘세존이시여, 누가 태어납니까?’라는 질문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말하지 않은 나에게는 오로지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태어남이 생겨납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질문이다. 그것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이와 같다.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난다.”(S12.12)

부처님은 질문할 때 '무엇 때문에'라는 말을 쓰라고 했다. 그래야 질문에 대한 답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법적으로 답했다.

누군가 '누가'라고 물으면 답이 없다. 그러나 '어떻게'라고 물으면 답을 말할 수 있다. 수불스님도 탄지화두에서 "누가 이 손가락을 튕기게 했습니까?"라고 묻지 않았다. 수불스님은 "무엇이 이 손가락을 튕기게 했습니까?"라고 물었다. 이는 손가락을 튕기게 하는 나는 없음을 말한다. 있다면 오온이 있을 것이다.

수불스님은 머리는 잘라버리고 몸으로 의심하라고 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개념(빤냣띠)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름 아님 몸관찰이다. 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라는 말과 같다.

머리를 잘라버리라는 말은 파격적이다. 언어적 개념으로 파악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머리가 없으면 몸만 있게 될 것이다. 호흡관찰이나 행선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새벽에 주로 행선을 한다. 보통 6단계 행선을 한다. 발을 들어서 올리고 밀어서 내리고 딛고 누르는 동작을 말한다. 이 단계를 마음이 따라 가면 잡념이 생겨나지 않는다. 다만 아는 마음만 있게 된다.

사띠가 강하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설령 치고 들어 오더라도 금방 제압된다. 이럴 때 행위와 이를 알아차리는 마음만 있게 된다. 발을 드는 등의 행위는 인에 해당되고 이를 알아차리는 마음은 과에 해당된다. 의도가 있으면 발을 들게 된다. 이때 전자는 인이 되고 후자는 과가 된다.

매순간 인과관계가 형성된다. 그런데 한번 형성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다음 인과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어느 것도 가만 있지 않는다. 조건 발생에 따른 인과만이 계속된다.

손가락을 튕기면 "딱"하고 소리가 난다. 이 소리는 어떻게 나게 되었을까? 먼저 두 손가락을 부딪쳤기 때문에 난 것이다. 인과관계가 성립된다. 그런데 두 손가락을 부딪치게 한 것은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인과관계가 성립된다.

손가락 튕기는 소리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생겨났다가 곧바로 사라진다. 소리가 생겨나는데는 조건을 필요로 하지만 사라지는데는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냥 사라진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그래서 '찰라멸'이라고 말한다.

수불스님은 탄지화두를 말했다. "무엇이 이 손가락을 튕기게 했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서 질문은 생각하지 말고 답만 생각하라고 했다. 또 머리는 잘라 버리고 몸으로 의심하라고 했다. 간화선을 한번도 해보지 않은 입장에서 나는 무엇을 의심해야 할까?

2022-11-2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