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기

개념놀음에 속지말자, 마하시사야도의 안심법문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2. 1. 07:55

개념놀음에 속지말자, 마하시사야도의 안심법문

 


대체 이 불안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달마대사의 안심법문도 무력화 된다. 불안한 그 마음이 있을리 없건만은 마음은 근심과 걱정으로 애태운다.

해법은 알고 있다. 이론적으로는 무엇이 문제인지 잘 알고 있다. 한마디로 그것은 "개념 놀음에 속지말자."라는 것이다. 근심도 개념이고 걱정도 개념인데 언어로써 이루어지는 개념은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

요즘 의무적 경전 읽기를 하고 있다. 머리맡에는 디가니까야가 있고, 사무실에서는 의자만 돌리면 수타니파타를 꺼내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책도 읽고 있다. 그 중에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이 있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선물 받았다. 올해 5월 붓다의 날에 일창스님으로부터 받았다. 마하시사야도가 지은 책이다. 니까야와 아비담마, 청정도론에 기반하고 있다. 일종의 복주석서와 같은 느낌이 난다.

어제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인상적인 구절을 발견했다. 내가 딱 고민하던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것 같다. 비난 받는 것에 대해서 먼저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저 사람이] 몰라서 비난하는 것이다. 생각한 대로 함부로 말하는 것은,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이들의 본성(dhammata)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91쪽)

비난 받을 때 힘들다. 반박하면 싸움이 되어 버린다. 입에 칼을 물고 서로가 서로를 찌른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의 경우는 피하는 것이다. 피함으로써 번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마하시사야도는 그 사람 탓으로 보자고 했다. 그 사람의 본성이 그러함을 알자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이 편한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윤회 윤전의 빚이 아직 남아 있어 비난당하는 것이니 마음 상할 필요없다."(91쪽)라고 여기자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것도 안심법문일 것이다.

비난 받으면 화가 난다. 분노를 다스리는 수많은 방법이 있다. 니까야에도 있고 청정도론에도 있다. 특히 청정도론 제9장 자애수행편에서는 열 가지 이상의 방법으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대상을 오온으로 보기'이다.

마하시사야도도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오온으로 보기'에 대해서 설명해 놓았다. 예를 들어가며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비난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성냄을 뿌리로 한 마음과 함께 생겨나는 정신법들, 마음에 의해 생겨난 물질법들일 뿐이다. 다섯 무더기[오온]일 뿐이고, 물질과 정신일 뿐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92쪽)

먼저 비난 하는 사람에 대한 설명이다. 비난은 있지만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는 말과 같다. 비난자는 개념, 즉 빤냣띠이기 때문이다. 언어적 형성에 대한 것임을 말한다. 있다면 정신과 물질만 있을뿐이라고 했다.

비난자는 없다. 있다면 정신과 물질의 과정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비난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어떠한 존재는 따로 없다. 그 물질과 정신들도 비난하는 바로 그 사이에 사라져 버린다."(92쪽)라고 했다.

사람들은 실체도 없는 것에 집착한다. 언어적 형성은 실체가 없다. 비난자라는 명칭은 있지만 비난자라는 실체가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은 정신-물질적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실체도 없는 자를 미워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해서 마하시사야도는 이런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그러니 지금 화낼 일도 없다. 비난하는 물질과 정신들이 없는데도 그 뒤에 화를 내고 있으면 그 물질과 정신들의 연속된 결과인 새로운 물질과 정신들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이 된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92쪽)

참으로 멋진 말이다. 이제까지 이런 법문을 들어보지 못했다. 복주석이 발달된 미얀마 문헌에서나 접할 수 있는 고귀한 말이다. 마치 마하시사야도의 안심법문을 접하는 것 같다.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이 몸과 마음이 오온의 현상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저기 여자가 간다."라고 말하지 않고, "저기 오온이 간다."라고 말한다. 여자는 언어적 형성에 대한 것으로 개념에 해당된다. 실체가 없는 것이다. 있다면 오온만 있을 뿐이다. 정신-물질적 현상만 있는 것임을 말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감각적 욕망 등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 비난에 따른 분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분노가 일어 났을 때 비난 자에게 화를 낸다. 그러나 비난자는 없다. 있다면 그가 낸 정신-물질적 현상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정신-물질적 현상은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다른 정신-물질적인 생멸 현상이 계속된다. 그래서 마하시사야도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화를 내는 것은 마치 부모에게 원한을 가져 그들이 죽은 뒤에 그 아들이나 손자에게 복수를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92쪽)

참으로 멋진 비유이다. 아직까지 이런 비유를 들어 본 적이 없다. 미얀마 불교의 힘을 본다. 미얀마불교의 힘은 이와 같이 복주석에 있는 것이다. 한국불교,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결코 접할 수 없다. 일창스님이 번역해 놓지 않았다면 접할 수 없는 고귀한 가르침이다.

비난 받았을 때 화가 난다. 그 사람에게 화풀이 하는 것은 어리석다. 왜 그런가? 그 사람은 과거의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령 방금 전의 그 사람이라고 해도 이미 지나간 것이다. 지난 것에 대해서 화를 낸다는 것은 허공에 주먹질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아들-손자의 비유를 들었다.

"비난 당하는 있는 그대도 다섯 무더기일 뿐이다. 그 다섯 무더기, 물질과 정신들도 바로 지금 사라져 간다. 그러한 물질과 정신의 연속된 결과인 바로 지금 물질과 정신들이 화를 내고 있다면 부모 시대에는 어찌할 수가 없어 아들, 손자, 손녀 시대가 되어야 복수 하는 것과 같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92쪽)

비난 하는 사람도 없고 비난 당하는 사람도 없다. 비난 하는 사람도 오온이고 비난 당하는 사람도 오온이다. 모두 정신-물질적 현상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 사람을 미워한다면 허공에 대고 외치는 것과 같다. 마치 맞바람에 재를 뿌리는 것과 같다. 모두 자신에게 돌아 올 것이다.

지금 마음이 불안하다. 근심과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이다. 마음을 안심시켜야 한다. 불안한 그 마음을 가져 오라고 했을 때 찾을 수 없다. 불안한 마음이라고 알았을 때 불안한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알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불안하고 초조하다면 마하시사야도의 아들-손자의 비유를 떠올려야 한다.

생겨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것도 생겨나자마자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찰나멸에 사무쳐라."라고 말한다.

화가 났을 때 이를 "내가 화를 낸다."라고 말하면 일반사람이나 하는 말이다. 위빠사나 수행자라면 "오온이 화를 낸다."라거나, "정신-물질의 과정이다."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근심걱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근심걱정은 정신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일어날만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일어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빨리 사라진다. 그런데 일어나는데는 조건이 필요하지만 사라지는데는 조건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그냥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찰나멸'이라고 말한다.

찰나멸에 사무치라고 했다. 근심걱정이 조건에 따라 발생하지만 찰나멸이기 때문에 일어나자마자 사라진다. 그럼에도 붙잡고 있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삼사가 화합해서 느낌이 발생된다. 호불호에 대한 느낌이다. 좋으면 거머쥐려 하고, 싫으면 밀쳐 내려고 한다. 전자는 탐욕이고 후자는 성냄이다. 그런데 탐욕과 성냄은 52가지 마음부수에 속하고 또한 82구경법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근본법이라 불리우는 구경법은 각자 고유한 특성과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 탐욕과 성냄에는 호와 불호라는 고유한 특성이 있다. 동시에 무상, 고, 무아라는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 그래서 구경법은 조건에 따라 생겨나서 즉시 사라진다. 다만 대상에 대한 갈애가 있어서 애착이 된다. 근심과 걱정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마음 속에 불안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것이 집착인줄 알면서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이론적으로는 잘 알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무력화 된다. 이런 때 마하시사야도의 아들-손자의 비유는 신선한 충격이다. 이를 마하시사야도의 안심법문이라고 해야 할까?

2022-12-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