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기

누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지 않고 깨달음을 논할 수 있으랴?

담마다사 이병욱 2023. 2. 18. 08:55

누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지 않고 깨달음을 논할 수 있으랴?


지금시각 4 4, 아침 6시가 넘은 줄로 착각했다. 스마트폰을 보고서야 시간을 알게 되었다. 약간 허탈하기도 하고 안심되기도 했다. 이 긴 시간에 글 하나 나올 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금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위대한 책이다. 어느 정도인가? 1권에서 3 '빠라맛타와 빤냣띠의 구별'에 대한 항목을 다 읽은 다음에 연필로 "누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지 않고 깨달음을 논할 수 있으랴?"라고 써 놓았기 때문이다.

 


책에는 온통 밑줄로 가득하다. 연필로 밑줄 친 것도 있고 형광메모리펜으로 칠한 것도 있다. 모두 새겨 두고자 하는 것들이다. 읽고 또 읽어 보아도 새롭다. "부처님의 바른 깨달음이 바로 이런 것이다."라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된다.

청정도론에서 절정은 어디일까? 열반에 대한 설명이라고 말하기 쉽다. 그러나 열반에 대한 설명은 의외로 짧다. 그러나 열반에 이르기 위한 과정은 매우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견해청정이 절정이라고 본다. 나마루빠, 즉 물질과 정신에 대한 것이다.

열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물질과 정신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몸과 마음이 사라지는 것이다. 어떻게 사라지는가?

깨달음이 무엇인지 알려면 초기경전, 즉 나까야를 봐야 한다. 니까야를 보면 부처님 그분이 누구인지, 부처님 그분이 어떤 말씀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당연히 열반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무위상윳따(S43)에서는 갖가지 비유를 들어 열반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본래 언어로 진리를 설명하기 불가능하기 때문에 섬의 비유나 동굴 등의 비유로서 설명한 것이다. 그래서 열반에 대해서 탐, , 치가 소멸된 상태라고 했는데, 이런 상태에 대해서 안전하기가 섬과 같고, 안온하기가 동글 같다는 등의 비유로 설명했다.

열반에 대해서 수행방법론적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언어적 형성과 신체적 형성과 정신적 형성이 차례로 소멸한 것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2선정에서 사유와 숙고가 사라지기 때문에 언어적 형성이 소멸된다. 4선정에서는 호흡이 사라지기 때문에 신체적 형성이 소멸된다. 9선정에서는 지각과 느낌이 사라지기 때문에 정신적 형성이 소멸된다. 상윳따니까야 '까마부의 경'(S41.6) 등에 경전적 근거가 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정신물질(명색)을 관찰할 수 있다. 이는 열반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명색의 소멸이 열반인 것이다. 이는 물질과 마음부수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의식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의식이 소멸되면 죽음이다. 나마루빠(명색)를 관찰했을 때 언어적 형성(위딱까와 위짜라), 신체적 형성(아나빠나), 정신적 형성(산냐와 웨다나)이 차례로 소멸되는데 이를 열반의 상태라고 말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열반에 이르게 하기 위한 방법론이다. 미얀마 마하시 사야도가 지었다. 니까야와 주석서를 바탕으로 지은 것이다. 청정도론과 유사한 구조로 되어 있다. 어쩌면 청정도론 주석서처럼 보인다. 청정도론을 더 심화한 것처럼 보인다. 1 3장에 있는 빠라맛타와 빤냣띠에 대한 설명도 심오하다. 무려 30페이지에 걸쳐서 설명되어 있다.

자칭타칭 깨달았다는 사람들이 많다. 대체 그들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선사들의 깨달음에 대한 오도송이 있는데 알듯말듯하다. 구체적이지 않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본래 진리는 말이나 문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언어도단이라고 한다. 그래서 비유로 설명했을 것이다.

진리는 언어로써 설명할 수 없다. 열반도 언어로써 설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갖가지 방편으로 설명했다. 부처님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경이나 응송, 게송, 비유 등 구분교의 가르침으로 설명했다. 깨달음을 이룬 밤부터 열반의 밤에 이르기까지 45년 동안 쉼없이 설법했다. 이를 84천법문이라고 한다. 오늘날 니까야에서 접할 수 있다.

부처님의 뛰어난 제자들은 가르침을 해석했다. 그리고 주석으로 남겼다. 가장 위대한 주석서는 청정도론이다. 5세기 스리랑카에서 붓다고사가 고주석을 바탕으로 새롭게 주석한 것이다. 그런데 청정도론은 오부니까야 주석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곱 가지 단계의 청정이 있어서 열반에 이르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청정도론은 니까야 주석서이자 동시에 훌륭한 수행지침서이기도 하다.

청정도론을 접한지 10년이 넘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 3권으로 출간 되었는데 이를 구입해서 보았다. 참으로 읽어내기 힘들었다. 한번도 체험 해보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내로 읽었다. 감명 깊은 구절은 글로 남겼다.

청정도론을 읽고 또 읽었다. 읽을 때마다 새로웠다. 체험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수행체험 했다면 즉각 이해 되었을 것이다. 청정도론은 주로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과 병행해서 봐야 한다.

세월이 흘렀다. 한국빠일리성전협회(KPTS)에서도 청정도론이 완역되었다. 2018년의 일이다. 전재성 선생은 오부니까야 번역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스님들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번역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KPTS
에서는 왜 청정도론을 번역하게 되었을까? 기존 번역서도 있지만 미흡했던 것 같다. 그래서 3년 동안 번역하게 되었는데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해 놓았다.

KPTS
본 청정도론은 각주가 풍부하다. 청정도론의 주석도 번역하여 실은 것이다. 또한 게송의 경우 빠알리 원문을 실었고 술어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해 놓았다. 이 뿐만이 아니다. 관련된 경의 문구도 실어 놓아서 기존번역서와 차별화를 시도했다.

KPTS
본 청정도론 교정작업에 참여 했다. 방대한 청정도론을 두 번 읽었다. 그것도 깨알 같은 각주도 빠짐없이 읽었다. 그리고 노트도 만들었다. 기억하고 싶은 문구, 새기고 싶은 문구를 타이핑하여 별도의 파일로 보관한 것이다. 나중에 글 쓸 때 참고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 청정도론노트를 보고서 수많은 글을 썼다.

미얀마 위빠사나 스승들은 주로 청정도론에 근거해서 수행법문한다. 수많은 수행법문서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우 조띠까 사야도의 '마음의 지도'가 가장 가슴에 와 닿는다. 마치 아름다운 시를 접하는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진리를 노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 조띠까 사야도의 마음의 지도 역시 청정도론에 근거한 것이다. 청정도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수행을 곁들여 지은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역시 명색에 대한 것이다. 정신과 물질에 대한 설명을 보면 "위빠사나 수행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수많은 위빠사나 수행서를 읽었다. 우 쿤달라 사야도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 요인', 우 자나카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 28', 우 조띠까 사야도의 '마음의 지도'와 같은 수행지침서를 말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수행지침서의 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이다.

머리맡에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이 있다. 머리맡에 있어서 수시로 열어본다. 그러나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청정도론 읽는 것만큼이나 힘들다. 그것은 체험해 보지 않은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진도가 나가는 것은 약간이나마 위빠사나 수행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니까야와 아비담마, 그리고 청정도론과 갖가지 수행지침서를 읽은 것이 도움이 된 것 같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2권으로 되어 있다. 한국마하시선원의 일창스님이 미얀마 원본을 우리말로 직역한 것이다. 영역을 중역한 것과 다르다. 이제 1 3장까지 읽었을 뿐이다. 진도는 하루에 몇 페이지가 고작이다. 새기며 읽기 때문에 진도를 빨리 나갈 수 없다. 한구절 읽고 숙고하는 식이다. 특히 명색에 대한 것이 그렇다.

깨달음에 대하여 말이 많다. 자칭타칭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남겨 놓은 오도송을 보면 맞는지 틀리는지 알 수 없다. 진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침묵한 각자들도 많을 것이다. 정말 깨달음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일까?

깨달음에 대한 갈증이 있다. 깨달았다고 하지만 깨달음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할이나 방, 침묵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미얀마 스승들은 언어로써 깨달음을 설명했다. 선사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훌륭한 깨달음 지침서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이 왜 위대한가? 그것은 읽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오늘 새벽에 빠라맛타와 빤냣띠를 읽으면서 읽는 맛을 느꼈다. 언어를 사용하여 어떻게 이렇게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을까?

빠라맛타와 빤냣띠, 실재와 개념이라는 뜻이다. 범부는 빤냣띠(개념 또는 관념)로 살지만 수행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범부는 빤냣띠로 살기 때문에 빠라맛타(실재)를 볼 수 없지만 수행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범부는 '내가 간다'라고 안다. 이는 명칭과 뜻으로 아는 것이다. 이때 나마루빠(명색)는 이름-형태가 되어 버린다. 언어로 개념화 된 것을 아는 것이다. 이를 빤냣띠(개념)라고 한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내가 간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 몸과 마음에서 생멸하는 정신과 물질을 관찰하기 때문에 실재를 본다. 이때 나마루빠(명색)는 정신-물질이 된다. 이를 빠라맛타(실재)라고 한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수행문답할 때 종종 듣는 말이 있다. 개념을 말하지 말고 느낌을 말하라는 것이다. 수행보고 할 때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지 말고 감각적으로 느낀 것을 말해야 한다. 빤냣띠로 말하지 말고 빠라맛타로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위빠사나 수행자가 아는 모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생겨나는 물질과 정신을 끊임없이 관찰하는 이는 지혜가 성숙되었을 때 가려는 마음도 있다. 그러한 마음 때문에 한 동작씩 한 동작씩 움직여 가는 물질도 안다. 앞의 움직임이 다음 움직임에 도달하지 않고 사라져 가는 것도 차례로 안다. 따라서 '내가 간다는 말은 명칭일 뿐이다. 가는 나라고 하는 것은 없다. 가려는 마음과 움직이는 물질의 여러 단계만 존재한다'라고 스스로의 지혜로 알아야 한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 278-279)


이 구절은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중에서 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에 해당된다. 왜 이런 지혜가 필요할까? 이는 나마루빠(명색)에 대해서 이름-형태가 아닌 정신-물질로 아는 지혜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내가 간다'라고 했을 때 나라는 빤냣띠가 가는 것이 아니라 조건발생하는 정신과 물질이 가는 것임을 말한다.

나는 있을까? 위빠사나 수행으로 명색을 관찰하면 나에 대한 환상은 깨진다. 그래서 니까야에서는 마치 모든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이. 이와 같이 존재의 다발에 의해 뭇삶이란 거짓이름이 있다네.”(S5.10)라고 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자칭타칭 깨달은 자들이 있다. 범부들은 깨달은 자를 알아 볼 수 없다. 각자가 각자를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범부가 각자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가 탐, , 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각자가 아닐 것이다.

그가 깨달았는지 아는 또 하나 방법이 있다. 그가 명색에 대해서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말하는지 보는 것이다. 그가 자아, 참나, 영혼 등 불변하는 것들을 말한다면 빤냣띠(개념)를 말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개념을 말했을 때 귀신도 있게 된다. 그러나 각자는 마음으로 만들어 내어 드러나는 대상 모두는 빤냣띠일 뿐이다.”(299)라고 안다.

그가 깨달았는지 아는 세 번째 방법이 있다. 그것은 그가 연기법적으로 말하는지 보는 것이다. 그가 "물질과 정신들의 연속만이 존재한다."(272)라고 알면 각자일 것이다. 왜 그런가? 조건발생하는 연기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색의 연속은 조건발생하는 사건과 사건의 연속이기때문에 연기법에 대한 것이다.

지금 시각은 아침 6 28분이다. 새벽 4 4분부터 2시간 24분 동안 줄기차게 엄지치기 했다. 이제 정리할 시간이 되었다. 조금도 피곤하지 않다. 오히려 뿌듯하다. 그것은 진리를 안 것에 대한 기쁨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이라는 위대한 수행지침서가 있다. 이런 책을 보는 것은 큰 즐거움이고 행운이다. 니까야와 청정도론 못지 않다. 이런 책을 접하면 헤매지 않을 것이다. 깨달음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것이다. 깨달음의 방법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미얀마불교가 왜 세계불교를 주도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출재가를 막론하고 왜 미얀마에 가서 수행하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같은 귀중한 책을 저술한 마하시 사야도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이와 같은 위대한 책을 번역한 일창스님께도 감사드린다.


2023-02-1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