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크공 출신 시민군 이정모와 주먹밥
올해 김동수 열사 추모제가 5월 20일 조선대에서 열렸다. 이날 추모제가 끝날 무렵 전일빌딩 앞으로 갔다. 광주 동구청에서 주관하는 5.18 사적지 투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세버스를 타고 5.18묘역에 도착했다. 혹시나 했는데 그 사람들이 있었다. 광주불교환경연대 사람들이다. 주먹밥 나누어 주는 행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세버스가 2시 이후에 도착해서 다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녹색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주먹밥을 나누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주먹밥은 본래 구묘역에서 행사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남아서 정문 주차장 입구에서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행사가 끝날 시간에 버스가 도착했다. 수십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주먹밥 한덩이씩 받았다.
주먹밥 행사하는 사람들 중에 이해모 선생이 틀림없이 있을 것 같다. 회원 중의 한사람에게 어디 있는지 물어 보았다. 바로 옆에 있었다. 페이스북에서 보던 그대로의 얼굴이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 보았다. 이것도 인연인데 기념사진 찍자고 제안했다.
주먹밥 맛이 이렇게 맛 있을 줄 몰랐다. 점심을 먹지 않았다. 아마 시장해서 더 맛있었던 것 같다. 주먹밥에 김을 둘렀는데 한입 먹으니 참기름 맛이 고소했다. 1980년 5.18 당시에도 이런 맛이었을까?
이해모 선생의 친형은 시민군이었다.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단지 열심히 환경운동하는 환경운동가로만 알고 있었다. 이해모 선생의 친형이 시민군이었다는 사실은 올해 5월 27일 부처님오신날 천장사에서 알았다.
천장사 주지스님은 중현스님이다. 2010년 이후 천장사에 자주 가게 되었다. 천장사 일요법회팀과 인연이 있어서 지금도 일년에 한두차례 간다. 올해 부처님오신날에도 가게 되었다. 그때 중현스님과 차담 중에 이해모 선생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해모 선생에 따르면 중현스님은 광주불교환경연대 지도법사였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페이스북 댓글을 통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해모 선생 이야기를 했다. 그때 중현스님은 이해모 선생의 친형이 시민군이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또한 죽었다고도 말해 주었다.
이해모 선생은 올해 5.18기념식 때 어머니와 함께 초대받은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써놓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자신의 친형이 시민군이었기 때문에 초대받은 것이었다. 5.18묘역 정문 앞에서 주먹밥 행사를 한 것도 죽은 형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제서야 퍼즐이 풀리는 것 같았다.
2주전에 이해모 선생으로부터 메시지를 하나 받았다. 그것은 자신의 친형 이정모 열사의 책을 하나 보내주겠다는 것이다. 제목은 ‘이름없이 죽어간 브로크공 오월 시민군 이정모’이다. 브로크공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나흘전에 택배를 하나 받았다. 이해모 선생으로부터 온 것이다. 브로크공 출신 시민군 이정모에 대한 책이다. 여러 장의 그림과 함께 무게가 대단히 가벼운 책을 받아 보았다. 거기에는 이해모 선생이 이름없이 죽어간 자신의 친형 이정모를 세상에 알리는 글이 있었다.
브로크공 출신 이정모는 시민군이었다. 시민군이 되고 싶어 시민군이 된 것이 아니라 시대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때 당시 전남대 법대에 다니던 큰형을 찾아 광주로 갔다가 시민군의 트럭에 탄 것이 시초가 되었다.
이정모 열사에 대한 책은 불과 104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짤막한 기록이다. 그러나 읽어 보면 그때 당시 시대상황과 가족상황이 잘 반영되어 있다. 그때 당시 이해모 선생은 초등학교 6학년이라고 했는데 책을 읽어 보면 마치 현장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다. 그 중에 주먹밥과 관련된 이야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주먹밥과 관련된 이야기)
전쟁터 같은 난리판에 나눔과 연대의 손길도 끊임없이 이어 졌다. 계엄군의 총탄에 부상당한 부상자들을 위한 피가 부족 하다는 소식에 시민들은 병원마다 줄지어 헌혈에 참여했고, 양동, 대인동 등 전통시장을 비롯한 거리 곳곳에서 솥단지를 내걸고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아이고 시상에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네. 아무리 분하고 억울해도 먹고 살아서 끝까지 싸워야 헝께 이거 드시고 허시오.”
미니버스에 탑승한 시민군들은 너도나도 내려서 주먹밥으로 한 끼를 때웠다.
“아따, 배고팠는디 진짜 맛있소”
“싸움도 배고프면 못헝께 잘 드시고 허씨요.”
“그라제라. 주먹밥이 징허니 맛나요.” “워메, 얼매나 크게 외쳤는가 목소리가 다 잠겨브렀소.”
“그랑께라. 분하고 원통해서 소리내어 외쳤더니 그라요.”
“시민들이 계엄군한테 총맞아 많이 죽었다는디 시방 어떤 상황이다요.”
(이름없이 죽어간 브로크공 오월 시민군 이정모, 52쪽)
광주에서 주먹밥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아마도 대동의 상징일 것이다. 주먹밥이 왜 대동정신의 상징일까? 그것은 나눔에 있다.
광주가 해방구가 되었을 때 질서는 유지 되었다. 왜곡된 보도를 일삼던 방송사 건물은 불탔다. 그러나 방화, 살인, 약탈은 일어나지 않았다. 광주시민들이 대동단결했기 때문이다.
광주에서는 공권력이 없어도 시민들 자치로 도시가 운영되었다. 그 상징적인 사건이 주먹밥 나누어주기 행사일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는 민주와 대동세상이었던 것이다.
이해모 선생이 쓴 ‘이름없이 죽어간 브로크공 오월 시민군 이정모’의 표지를 보면 하나의 상징적인 그림이 있다. 시민군 이정모가 카빈소총을 어깨에 매고 두 손에는 주먹밥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이 2023년 5월 20일 5.18묘역 주차장 입구에서 광주불교환경연대의 주먹밥 행사를 연상케 한다.
시민군 이정모는 1984년 12월 5일 서른 한 살의 나이로 자살했다. 상무대 영창에서 겪은 모진 고문 후유증과 폭도라는 누명을 벗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땅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살다가 어쩌면 시대의 희생자가 된 것인지 모른다.
시민군 이정모는 5월 27일 도청이 함락될 때까지 끝까지 저항했다. 이는 총을 들고 전일빌딩 경비 근무를 선 것에서 알 수 있다. 방송국 직원의 기지로 목숨을 구해서 탈출에 성공했지만 곧바로 붙잡혀서 상무대 영창생활을 했다.
상무대 영창을 가 봤다. 김동수 열사 추모제 때 가 본 것이다. 기록을 보니 2020년 김동수 열사 추모제 때 갔었다.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서“반원형으로 되어 있는 영창은 6개의 방이 있는데 한방에는 많게는 150명을 수용했다고 한다. 누워서 잠도 잘 수 없는 가혹한 환경이었던 것이다.” (김동수열사의 승의적 초월의 길, 2020-05-25)라고 기록을 남겼다.
이해모 선생의 책에도 상무대 영창의 가혹 행위가 묘사 되어 있다. 해설사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일치한다. 해설사로부터 들은 것에 대하여 “영창에서는 폭력이 난무했다고 한다. 말을 안들으면 독방에 가두었는데 무려 20명이나 들어 갔다고 한다. 더구나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폭도로 몰고 갔는데 이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짜 맞추기 위한 각본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해설사는 그때 당시를 회상하며 ‘우리들 이름은 폭도였습니다.’라고 했다.” (김동수열사의 승의적 초월의 길, 2020-05-25)라고 블로그에 기록해 놓았다.
브로크공 출신 이정모는 폭도로 몰렸다. 짜여진 각본대로 조사를 받은 것이다. 김대중 내란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폭도로 내몰린 것이다. 이정모는 이런 것이 너무나도 억울했었던 것 같다.
1980년대는 철권통치 기간이었다. 그렇게 물러가라고 외치던 대상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것도 임기가 7년이나 되었다. 설령 그가 물러난다고 해도 그 후임들이 이어서 정권을 가져갈 것이 뻔한 상황이었다. 이럴 때 폭도로 내몰린 이정모는 희망을 잃었을 것이다. 그래서 생을 마치기로 결심한다. 이정모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와 전화대화)
“어머니, 나 확 죽어불라요.”
“왜 그냐. 왜 그냥 정모야 왜 그러냐. 그러지 마라.”
“나 억울해서 더 이상 살기가 힘드요.”
“정모야. 왜 그냐.”
“난 폭도가 아니란 말이요. 난 범죄자가 아니랑께요.”
“에미는 너 마음 다 안다. 정모야.”
“나도 살고 싶소 어머니.”
“정모야~~”
(이름없이 죽어간 브로크공 오월 시민군 이정모, 129쪽)
이정모는 폭도로 낙인 찍혔던 것이 억울했다. 범죄자로 내몰린 것이 억울했던 것이다. 암울했던 당시 어디 하소연 할 데도 없었을 것이다. 홀로 고민하다 극한 선택을 했다. 그러면서 “나도 살고 싶소 어머니.”라고 말했다.
사람의 생명은 유한하다. 때가 되면 누구나 죽는다. 짧고 굵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늘게 길게 사는 사람도 있다. 어떤 죽음이 최상의 죽음일까?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죽음이 가장 최상의 죽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가 쉽지 않다. 인류 역사이래 자신의 이름을 남긴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후대 사람들이 기억해 준다면 이름은 남는다. 왜 그런가? 사람들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한 영원히 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불교환경운동가 이해모 선생은 친형 이정모를 부활시켰다. 이정모가 그토록 살고자 했는데 이 책을 출간함으로 인하여 다시 살아난 것이다. 이정모라는 브로크공 출신 시민군은 시대를 잘못 만나 짧은 생을 마쳤다. 그러나 이정모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렇게 살아난 것이다.
2023-07-0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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