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기

무아(無我)가 되면 두려울 것이 없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4. 4. 28. 10:13

무아(無我)가 되면 두려울 것이 없다
 
 
지금 시각 7시 31분, 하얀 여백을 대하고 있다. 매일 아침 늘 계속되고 있는 일상이다. 오늘 아침에는 ‘행복총량의 법칙’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모두 잠든 일요일 이른 아침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일요일에 늦잠을 잔다. 그러나 일인사업자는 하루도 빠짐 없이 일찍 일어난다. 주말도 예외가 아니다.
 
요즘 잠을 대체로 잘 자고 있다. 그것은 환경과 관련 있다. 잠자리를 옮겼기 때문이다. 안방에서 작은 방으로 옮겼다.
 
아파트는 대로 변에 있다. 관악대로 바로 옆에 있어서 차량소음으로 시끄럽다. 그러나 건축자재의 발달로 인하여 소음은 상쇄된다. 이른바 이중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서 소음이 작게 들린다. 더구나 요즘 새로 나온 차는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다. 다만 오토바이의 폭탄음이 거슬린다.
 
공부가 안되면 그곳을 떠나라
 
공부가 안되면 그곳을 떠나라는 말이 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다.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이와 같이 ‘나는 이 숲속에 의지해서 지낼 때에 나는 아직 이루지 못한 새김을 새기지 못하고, 아직 집중하지 못한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고, 아직 소멸하지 못한 번뇌를 소멸하지 못하고, 아직 도달하지 못한 위없는 안온에 도달하지 못하고, 또한 출가생활에서 조달해야 할 의복, 음식, 깔개, 필수약품을 조달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밤이건 낮이건 그 숲속에서 떠나는 것이 좋으며, 그 곳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M17)
 
 
수행승이 수행처에 머물 때 수행의 향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조건이라면 미련없이 떠나야함을 말한다. 심지어 주석에서는 “그가 이 모든 것을 밤에 숙고하여 안다면, 바로 그날 밤에 떠나야 한다.”라 했다. 그러나 머물기에 적합한 장소라면 계속 남아있으라고 했다. 특히 의지할 만한 스승이 있어서 지혜의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면 “그 수행승은 목숨이 붙어있는 한 그 사람에게 머무는 것이 좋으며, 쫓겨날지라도 그 사람을 떠나서는 안 된다.” (M17) 라 했다.
 
안방은 한쪽 면이 툭 터져 있다. 그러다 보니 소음에 취약하다. 더구나 방도 크다. 그런데 뒤베란다와 마주하고 있는 작은 방은 사면이 벽이나 다름 없다. 더구나 사이즈도 크지 않다. 밤이 되면 고요해서 마치 암자에 있는 것과 같다. 자연스럽게 숙면하게 된다.
 
사람이 사는데 있어서 환경이 중요하다. 이는 생활의 질, 삶의 질과도 관련이 있다. 비록 스물두 평 아파트에 지나지 않지만 방이 세 개 있어서 작은 방을 이제 잠자는 방으로 활용하고 있다. 더구나 작은 방은 책장이 있다. 이제까지 만든 책을 진열해 놓은 것이다.
 
방에는 책이 121권 있다. 책장으로 가득하다. 책장 아래에 이불을 깔아 놓았다. 그리고 스탠드도 하나 가져다 놓았다. 스탠드 옆에는 경전이 있다. 머리맡에 있는 경전이다.
 

 
작은방에 있으면 아늑하다. 나만의 공간이다. 이곳에서 주로 책을 읽는다. 머리맡에 경전이 있어서 손만 뻗치면 된다. 스탠드불을 켜고 돋보기 안경을 끼고 노랑형광메모리로 칠하면서 읽는다. 121권의 책과 함께 있는 작은방은 작은 아지트가 된다.
 
작은 아지트가 있다면 큰 아지트도 있다. 백권당을 말한다. 백권당에도 121권의 책이 있다. 백권당에는 일인사업자의 일터이자 블로거의 글쓰기 공간이자 재가수행자의 명상공간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매사에 새김(sati)이 있어야
 
생활속에서 수행하는 삶을 실천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매순간 새김과 올바른 알아차림이 있어야 한다. 이는 싸띠와 쌈빠자나를 말한다.
 
싸띠와 쌈빠자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이는 동작을 천천히 하는 수밖에 없다. 마치 허리 아픈 환자가 천천히 일어서고 천천히 앉는 것과 같다. 이럴 때 새김과 올바른 알아차림이 있게 된다.
 
바지를 입을 때 천천히 입는다. 한쪽 발을 끼고 입고 또 한쪽 발을 끼고 입는다. 이때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로지 한 순간에는 하나의 일만 해야 한다.
 
세수할 때는 다른 일을 할 수 없다. 오로지 세수만 해야 한다. 머리 감을 때는 머리만 감아야 한다.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해서는 안된다. 그러다 보니 머리 감을 때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
 
머리 감을 때는 머리 감는 일에만 집중하게 된다. 이럴 때 아무 생각이 없다. 그런데 그 때 좋은 생각이 떠 오른다는 것이다. 대개 오늘 글쓰기에 대한 것이 많다.
 
좋은 생각이 떠 오르면 놓치지 않는다. 잊어 버리기 전에 메모해 둔다. 스마트폰 메모앱을 활용한다. 키워드만 써 놓아도 나중에 기억할 수 있다.
 
일상에서 수행 아닌 것이 없다. 그것은 한 동작 한 동작 천천히 하는 것에서 실현된다. 동작을 빠릿빠릿하게 하면 수행이 되지 않는다. 마치 농구선수가 시합할 때 한동작 앞서는 것과 같이 빠르게 행동하면 되지 않는 것이다.
 
수행자는 마치 허리 아픈 환자처럼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염처경에 따르면 “수행승이 걸어가면 걸어간다고 분명히 알거나 서있으면 서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앉아있다면 앉아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누워있다면 누워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신체적으로 어떠한 자세를 취하든지 그 자세를 그대로 분명히 안다.”(M10)라고 했다.
 
수행자로서 삶을 살고자 한다. 비록 재가수행자에 지나지 않지만 출가수행자보다 더 수행자다운 수행자로 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매사에 새김(sati)이 있어야 한다.
 
싱그러운 사월의 아침에
 
사월의 아침은 싱그럽다. 배낭을 메고 백권당을 향하여 길을 가는 아침 사뿐사뿐 발걸음도 가볍다. 일년에 이런 날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사월과 오월은 확실히 축복받은 계절이다. 덥지도 춥지도 않아서 좋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천에 피어 있는 꽃이다. 이제 가로에 이팝나무꽃이 피었다.
 
이팝나무꽃은 풍성해서 좋다. 마치 머리가 반백에서 백발로 넘어 가는 것처럼 하얕다. 마치 옛날 밥그릇에 쌀이 가득 담긴 고봉밥그릇처럼 풍성해 보인다.
 

 
저 멀리 수리산은 사월의 신록에 손이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연두색이었으나 이제 초록이 되었다. 조금 더 지나면 진한 초록이 될 것이다.
 

 
백권당에 도착했다. 아침에 잠시 햇볕 드는 사무실이다. 창이 북동방향이라 두세 시간이 고작이다. 그럼에도 식물은 물만 주어도 잘 자란다. 이럴 때 특히 관심 보이는 것은 보리수이다.
 

 
보리수는 부활했다. 지난 겨울 잎이 모두 졌을 때 낙담 했었다. 죽은 줄 알았다. 그런데 잎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걱정하지 않는다. 하트모양에 긴 꼬리를 특징으로 하는 보리수를 보면 마음이 충만 된다.
 
오늘 써야 할 글이 있는데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다. 일요일임에도 이렇게 나온 것은 의무적 글쓰기를 하기 위한 것이다. 지난 18년동안 매번 반복되는 일상이다. 토요일도 없고 일요일도 없고 공휴일도 없다. 오늘 하나의 글을 완성해야 숙제가 끝나는 것이다.
 
어제 밤부터 오늘 글쓰기 할 것을 생각했다. 그것은 최근 읽은 ‘냐나띨로까 스님의 생애’에 대한 것이다.
 
책을 읽었으면 독후감을 써야 한다. 모임이나 강연에 참석했으면 후기를 쓰는 것과 같다. 여행을 갔으면 여행기를 쓰는 것과 같다. ‘냐나띨로까 스님의 생애’에 대한 글도 써야 한다.
 

 
냐나띨로까 스님의 생애를 보면 행복총량 법칙을 떠오르게 한다. 이는 스님의 일생이 순탄치 않았음을 말한다. 독일사람이라는 이유로 두 번이나 수용소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냐나띨로까 스님은 1878년 독일에서 태어나 1957년 스리랑카에서 입적했다. 스님이 산 79년의 세월에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시기가 있었다. 그때 마다 수용소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는 스리랑카에 있었기 때문이다.
 
양차대전 당시 스리랑카는 영국식민지였다. 독일이 영국과 전쟁을 했기 때문에 독일출신 수행승들은 격리 되었다. 간첩활동을 할 것을 염려한 것이 큰 이유이기도 하다. 그 전쟁 기간만큼 억류된 것이다.
 
냐나띨로까 스님의 고난
 
냐나띨로까 스님은 수용소 생활할 때 위의를 잃지 않았다. 테라와다 수행승으로서 계를 지키고자 한 것이다. 그런 한편 수용소에서 번역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경서와 논서를 번역한 것이다.
 
책은 3부로 되어 있다. 책에서 2부는 냐나띨로까 스님 직접 작성한 자서전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1926년까지만 기록 되어 있다. 나머지는 스님의 제자들과 인연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기록된 것이다. 그렇다면 냐나띨로까 스님의 고난은 어떤 것일까? 이는 스님이 직접 작성한 다음과 같은 글에서 알 수 있다.
 
 
마침내 나는 전쟁으로 인한 12년의 유배와 투옥 생활을 뒤로 했습니다. 1914년부터 1915년까지는 디야탈라바 감옥에 있었고, 그 다음에는 1915년부터 1916년까지 호주에 있었습니다. 1916년 12월에 나는 호놀룰루로 떠났고 1917년부터 1919년까지 중국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감옥에 있었고 천연두에 걸렸습니다. 다음으로 나는 독일에 머물렀고(1919~1920), 1920년부터 1923년까지는 일본과 태국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나는 말라리아에 걸렸습니다. 이 모든 일은 내 나이 34세에서 48세 사이에 일어났습니다.”(냐나띨로까 스님의 생애, 203쪽)
 
 
냐나띨로까 스님은 1903년 미얀마에서 출가했다. 이후 스리랑카에서 머물렀다. 그런데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서 감옥과 강제수용소에 있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고난이 있었다.
 
스님의 고난은 어느 정도였을까?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단테의 “여기에 들어 오는자여,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는 지옥에 대한 문구가 떠올랐다고 한다.
 
냐나띨로까 스님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다시 스리랑카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는 1926년의 일이다. 무려 11년만의 귀환이다. 이에 대하여 스님은 “나는 어느 곳에서도 스리랑카에서처럼 편하게 느끼지 못했습니다.”(187쪽)라고 써 놓았다.
 
섬 암자의 전성시기
 
스리랑카를 가 보았다. 2022년 12월에 미주현대불교 김형근 선생과 함께 갔다. 스리랑카사람 혜월스님과 세 명이서 스리랑카 현지 운전기사와 함께 성지순례 했다.
 
처음 가본 스리랑카는 천국이었다. 왜 그런가? 불교국가인 것이 가장 크다. 어디를 가나 불탑이 있고 불상이 있고 사원이 있었다. 또한 사시사철 온화한 기후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부처님 당시의 불교가 고스란히 보전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스리랑카에 대하여 ‘교학의 나라’라고 말한다. 아소까 대왕 당시 제3차 결집이 이루어졌는데 삼장이 고스란히 전승되어 온 것이다. 더구나 스리랑카는 테라와다불교 종주국과도 같다. 아마도 냐나띨로까 스님이 스리랑카에 머문 이유 중의 하나라고 본다.
 
냐나띨로까 스님은 스리랑카에 머물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써 놓았다. 이 시기는1932년부터 1939년까지로서 섬 암자의 전성시기였다고 말한다. 섬 암자는 스님이 머물던 섬을 말한다. 갈레 위에 위치해 있고 만 안에 있다.
 

 
섬 암자에서 스님의 삶은 대전으로 인하여 고생한 것이 충분히 보상받고도 남은 것이다. 고생 끝에 행복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그렇다면 스님은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견디어 냈을까?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마법의 주문을
 
냐나띨로까 스님은 양차대전 당시 고난의 세월을 살았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스님은 또 다시 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다. 스님은 인도 데라 둔 수용소에서 1939년부터 1946년까지 7년동안 살았다. 그런데 수용소에서도 담마의 끈을 놓치 않았다는 것이다. 수용소에서도 번역작업을 계속한 것이다.
 
냐나띨로까 스님은 감옥과 수용소에서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담마에 의지하며 살았다. 특히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상기했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님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무아사상이다.
 
냐나띨로까 스님이 어려운 시기를 견딘 것은 무아사상의 힘이 컸다고 본다. 이는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가르침을 말한다. 이와 같은 정형구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마법의 주문’과도 같다고 했다.
 
마법의 주문은 어려움이 닥치면 마치 주문 외우듯이 암송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냐나띨로까 스님은 감옥과 수용소에서 어려움에 부딪치면 이 마법의 주문을 암송했다는 것이다.
 
서양불교의 개척자
 
냐나띨로까 스님에 대하여 흔히 서양불교의 개척자라고 말한다. 이는 스님의 저서에서 확인된다. 스님은 가장 먼저 ‘붓다의 말씀’(1906년)을 저술했다. 이 책은 불교입문자의 고전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이 책을 읽고 출가했다는 사람도 있다. 특히 어느 러시아 여인은 이 책을 기도문으로 간주하여 항상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스님은 갖가지 빠알리어 경전을 번역했다. 앙굿따라니까야와 밀린다왕문경을 들 수 있다. 감옥과 수용소 생활을 할 때도 번역했다. 또한 스님은 논서도 번역했다. 인시설론과 청정도론을 들 수 있다.
 
스님은 언어에 능숙했던 것 같다. 빠알리어 등 갖가지 언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빠알리어에 매우 능숙했는데 빠알리 문법에 대한 책을 쓰고 빠알리 사전도 만들었다. 제자들에게는 빠알리어를 배우게 하여 빠알리 원문으로 읽을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냐나띨로까 스님에게는 제자도 많았다. 주로 냐나로 시작되는 이름의 제자를 말한다. 대표적으로 냐나뽀니까 스님을 들 수 있다.
 

 
책을 읽어 보면 냐나뽀니까 스님은 2대라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초대는 냐나띨로까 스님이 된다. 이는 서양스님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그렇다면 3대는 누구일까? 아마도 빅쿠보디 스님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늘날 빅쿠보디는 살아 있는 전설이 되었다. 스님은 쌍윳따니까야를 비롯한 사부니까야를 영역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빅쿠보디 영역이 가장 널리 익혀지고 있다.
 
왜 빅쿠보디 스님이 3대로서 계보를 잇는 것이 될까? 이는 김재성 선생이 번역한 냐나띨로까 스님의 일생 추천사에서 볼 수 있다. 추천사에서 빅쿠보디 스님은 “저는 냐나뽀니까 스님을 저의 영적 아버지라고 생각하며, 그의 스승이었던 냐나띨로까 스님을 저의 영적 할아버지입니다.”(26쪽)라고 표현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냐나로 시작되는 제자중에는 냐나몰리도 있다. 이 스님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제자가 되었다. 영국 출신이다. 그런데 독일출신이 아니어서 그런지 계보를 잇지 못한 것 같다. 더구나 일찍 입적했다. 1960년에 입적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그것은 청정도론을 영역으로 편역한 것이다.
 
오늘날 영역 청정도론은 냐나몰리의 편역본이 가장 널리 읽혀지고 있다. 이는 냐나띨로까 스님의 독일어판 청정도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본다.
 
청정도론은 참으로 위대한 책
 
청정도론은 참으로 위대한 책이다. 일종의 사부니까야의 주석서이자 동시에 수행지침서나 다름 없다. 이 청정도론 하나만 있으면 불교가 무엇인지, 깨달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일까 붓다고사 이래 수많은 수행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청정도론은 2010년에 알게 되었다. 처음 보았을 때 너무 어려웠다. 그러나 인내를 가지고 다 보았다. 이후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번역되었는데 교정작업에 참여 하여 또다시 보게 되었다.
 
오늘날 미얀마의 수행법은 대부분 청정도론에 기반하고 있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대하여 남방 테라와다불교의 부동의 준거틀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청정도론은 냐나띨로까 스님이 독역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 냐마몰리 스님이 영역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행복총량법칙에 대하여
 
냐나띨로까 스님의 일생을 보면 고난에 찬 것이었다. 양차대전으로 인하여 두 번의 수용소 생활을 했다. 독일사람인 것이 큰 이유가 된다. 그런데 스님은 전쟁이 끝날 때마다 스리랑카에 돌아 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스님에게 스리랑카는 제의 고국이나 다름 없다.
 
냐나띨로까 스님은 2차 대전후에 스리랑카 국민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스님이 입적했을 때 국장수준으로 장례가 치루어졌다. 출생지는 독일이지만 마음의 고향은 스리랑카였던 것이다.
 
냐나띨로까 스님의 생애를 읽고서 행복총량법칙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젊었을 때 고생하면 노년에 행복한 것을 말한다. 이는 어떤 사람에게도 적용되리라고 본다.
 
젊었을 때 행복하게 산 자가 노년에도 행복하게 산다는 보장이 없다. 그 사람에게 주어진 행복의 총량이 있다면 젊었을 때 행복하게 산다면 노년에도 행복하게 산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반대로 그 역은 성립한다.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 한다고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행복총량법칙에 따르면 젊어서 고생하는 것은 괴로움의 총량을 젊어서 다 써버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노년에 고생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게 됨을 말한다.
 
흔히 말년운이 좋아야 한다고 말한다. 초년에 운이 좋으면 말년에 불운하기 쉽다는 것이다. 물론 초년도 좋고 중년도 좋고 말년도 좋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행복의 총량이 큰 사람이다. 그러나 초년에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은 말년이 좋을 수 있다. 왜 그런가? 말년에 겪어야 할 불운을 초년에 다 겪었기 때문이다.
 
냐니띨로까 스님은 중년에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장년을 지나 노년에는 제의 조국이나 다름 없는 스리랑카에서 행복한 삶을 살았다. 말년운이 좋았다고 본다. 그러나 무엇보다 항상 담마와 함께 했기 때문이다.
 
무아가 되면 두려울 것이 없다
 
부처님 가르침과 함께 하면 두려울 것이 없다. 이는 “가르침은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수호하고 잘 닦여진 가르침은 행복을 가져온다.”(Thag.303)라는 게송으로도 알 수 있다. 법을 지키면 법이 보호해주듯이, 담마를 따르면 담마가 보호해 주는 것이다.
 
냐나띨로까 스님은 수용소에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 주문처럼 외운 것이 있다. 그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정형구를 말한다. 이 정형구는 니까야에 무수히 등장한다. 이 문구는 갈애와 자만과 견해에 대한 것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무아를 말한다.
 
무아가 되면 두려울 것이 없다. 내가 있다고 했을 때 번뇌가 생겨난다. 내가 없다고 생각하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냐나띨로까 스님은 무아에 대하여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나쁜 사람은 없고 나쁜 자질만 있을 뿐이다.”라는 말을 즐겨 말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규정하는 것이다. 언어로써 한계 짓는 것이다. 마치 이름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것과 같다. 이는 실재가 아니다. 그 사람의 성향이 그 사람을 규정짓는다. 그런데 성향이라는 것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무상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무상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섬 암자 부도탑
 
책을 잘 읽지 않는다. 일반 서적을 말한다. 그러나 고전은 다르다. 경전은 고전 중에서 고전이기 때문에 머리맡에 두고 읽는다. 그런데 이번에 미주현대불교에서 냐나띨로까 스님의 생애가 출간되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새기며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무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빅쿠보디의 추천사에서 “제가 그곳에 살 때 암자 밖에서 놀던 원숭이 무리는 냐나띨로까 스님이 암자에 살 때 본 원숭이들의 후손이었을 것입니다.”(27족)라는 대목을 말한다.
 
빅쿠보디는 냐나띨로까 스님을 본 적이 없다. 스님이 입적한 후에 냐나뽀니까 스님의 제자로 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함께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왜 그런가? 냐나띨로까 스님이 살던 그 암자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원숭이가 등장한다. 냐나띨로까 스님이 살던 시기의 원숭이 후손으로 보는 것이다.
 
냐나띨로까 스님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머물던 섬 암자가 궁금했다. 유튜브 검색해 보니 섬 암자에 대한 영상이 있다. 그 중에 ‘Island hermitage of Polgasduwa in Sri Lanka By Maharagama Dhammasiri’ (https://youtu.be/y1v2ysOKfAg?si=VBhKXu65TaNoTnV8) 라는 영상을 보니 냐나띨로까 스님의 부도탑이 있다.
 

 
책을 보면 냐나띨로까 스님의 묘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묘비에는 앗사지 게송이 실려 있다. 어떤 것인가? 이는 “원인 따라 발생하는 것, 그들의 원인을 여래께서 설하셨다. 또한 그들의 소멸도. 이와 같이 대사문은 가르치셨노라.”라는 게송을 말한다.
 
책을 혼자서만 보아서는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인터넷 주문했다. 전재성 선생에게 주기 위한 것이다.
 
지난 4월 26일 금요니까야모임 시간에 책을 전재성 선생에게 전달해 주었다. 전재성 선생은 이제 막 밀린다왕문경을 완역했다. 한국 최최의 빠알리원문을 완역한 것이다. 그런데 밀린다왕문경의 독역은 냐나띨로까 스님이 1924년에 완역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보다 백년이 빠른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2018년 청정도론을 완역했는데 냐나띨로까 스님은 1931년에 독역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의 전재성 선생은 젊은 시절 독일에서 유학했다. 그때 당시 쾰른대학 숲에서 거지성자라 불리우는 페터 노이야르를 만났다. 전재성 선생은 이 거지성자와의 만남으로 인하여 번역에 대한 꿈을 갖게 되었다.
 
냐나띨로까 스님의 독역은 전재성 선생의 번역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는전재성 선생이 독일어판 청정도론을 소개하면서 매우 정교하게 번역되었다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특히 마음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에 대하여 경탄했다. 이는 냐나띨로까 스님이 아비담마 논장에 정통했기 때문이라 본다.
 
시간 낭비가 되지 않았으면
 
오래 전에 유행하던 노래가 있다. 사월과 오월의 장미라는 노래를 말한다. 노래 가사에 싱그러운 잎사귀라는 말이 와 닿는다. 지금은 싱그러운 사월의 오전이다.
 
지금 시각은 9시 54분이다. 자판을 치기 시작한지 2시간 23분이 지났다. 이제 마무리 해야 한다. 글을 마치고 또 다른 일과를 시작해야 한다.
 
싱그런 사월 축복받은 날씨에 자판을 정신없이 때렸다. 책을 읽었으면 후기를 써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써 놓으면 누군가 보게 될 것이다. 시간 낭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2024-04-2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