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감동시키는 삶을 살고자
요즘 화두는 사람을 어떻게 하면 감동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남을 감동시키는 삶을 살아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한테 폐 끼치지 않고 착하게만 살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감동적인 삶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것은 배려라고 본다. 이를 '동등한 배려'라고도 말할 수도 있다. 일종의 눈높이인 것이다. 사섭법에 있는 동사가 이에 해당된다.
동사에 대하여 흔히 고락을 함께 하는 것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니까야에서 빠알리 원어를 풀이해 보면 '동등함'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래서인지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에서는 동사에 대해서 '동등한 배려'로 번역했다.
사람들을 감동케 하려면 디테일에 강해야 한다. 그것은 약속지키는 것부터 시작된다. 점심약속도 약속이다. 하물며 공개적인 약속은 어떠할까?
강리도에 관한 글을 썼다. 페이스북친구(페친)가 "저도 하나 부탁합니다"라고 했을 때 "당근이지요"라고 답했다. 또 한 페친이 "저두요"라고 했을 때 "당연하지요"라고 답했다.
약속은 지켜야 한다. 그러나 예산이 초과 되었다. 강리도를 족자형태로 세 개를 만들었는데 비용이 꽤 들어 갔다. 그래서 한지로 출력해서 보내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약속은 지키고자 했다.
요즘 페이스북 계정을 새로 만들었다. 진실한 친구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가상공간에서는 공감할 수 있는 자를 진실한 친구로 본다. 수많은 사람들이 친구요청을 한다. 왠만하면 다 수락한다. 공감해 줄 것을 잊지 않는다. 이런 것도 배려일 것이다.
글을 쓸 때 공감해 주는 사람이 가장 고맙다. 필요할 때 도움이 되는 사람을 친구라 하는데 사이버공간에서 친구는 공감능력으로 밖에 판가름 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어느 페친이 책을 냈다. 평소 공감을 잘 해주시는 정재수 선생을 말한다. 공지를 보고서 책을 신청했다. 돈 주고 산 것이다. 어제 택배로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이라는 제목의 책을 받았다. 이런 것도 남을 감동시키는 행위에 해당될 것이다.
정재수 선생의 책을 열어 보았다. 표지 안쪽에는 친필 사인이 있다. 한번도 대면한 적이 없지만 수없이 공감해 주어서 얼굴이 익숙하다. 오프라인에서 만나면 말이 잘 통할 것 같다.
역사에 관심 있지만 역사서는 잘 읽지 않는다. 아마 관심분야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초기경전에 근거하여 글을 쓰고 테라와다불교와 관련된 수행에 관심을 갖다 보니 다른 분야는 생소하다. 특히 역사분야가 그렇다.
정재수 선생과 이석연 선생이 공동집필한 역사서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서문을 읽어 보았다. 신기하고 놀라운 것으로 가득하다. 본문을 빨리 읽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이다.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야 세상에 나오게 된 것 같다.
흔히 말하길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또한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한다. 누군가 그 시대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을 때 역사가 된다. 정재수 선생의 역작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도 남당 박창화 선생이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요즘 책읽기를 생활화 하고 있다. 집에서는 머리맡에 디가니까야를 두고 있다. 사무실에서는 의자만 돌리면 꺼내 볼 수 있는 수타니파타가 있다. 하루에 한페이지 또는 때로 한게송 읽는다. 무협소설 읽듯이 빠르게 읽고 잊어 버리면 안된다. 새기며 읽고자 하는 것이다.
책을 읽을 때 경전만 읽는 것은 아니다. 일반책도 병행하며 읽고 있다. 선물로 받은 것도 있고 돈 주고 산 것도 있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잘 읽힌다. 관심분야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재수 선생의 역작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은 머리맡에 두고 읽고자 한다. 역사고증서의 성격이 짙기 때문에 진도를 빨리 나갈 수 없다. 하루 한페이지씩 읽으면 일년 걸릴 것 같다. 이렇게 읽는 것이 작가의 노고에 대한 보답일 것이다.
남을 감동시키는 삶을 살고자 한다. 남을 감동시킨다고 생각하면 흐믓해진다. 그것은 주는 행위로 나타난다. 페이스북에 올려져 있는 페친 글에 '좋아요'라고 공감표시하는 것도 주는 행위에 해당된다.
2022-12-0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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