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내가 사는 이유, 내가 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

담마다사 이병욱 2021. 9. 17. 10:15

내가 사는 이유, 내가 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



사는 이유를 알았다.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발견한 것이다. 그것도 오래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를 발견했다.

흔히 왜 사십니까?”라고 말한다. 이에 대한 대답은 다양하다. 그냥 산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사니까 산다는 사람도 있고, 사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가장 압권은 아마도 죽지 못해 삽니다.”라는 말일 것이다.

왜 사는 걸까? 왜 살아야 하나? 이런 질문은 누구나 한번쯤 해 보았을 것이다. 대체 왜 사는 걸까?

왜 사느냐고 자꾸 묻다 보면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삶이 있으면 죽음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왜 살아야 할까?”라며 고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죽음이란 무엇일까?’라며 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삶과 죽음은 함께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생사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 돈도 사랑도 명예도 부질없는 짓이다. 대체 나는 왜 사는 걸까? 나는 왜 살아야만 하는 것일?

오늘 새벽 마침내 그 단서를 찾아 냈다. 경에 있었던 것이다. 오래 전부터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근거가 되는 경전이 있는 줄 몰랐다.

 

 

경전적 근거를 발견하고

 

새벽이 되면 생각이 넘쳐 흐른다. 대부분 좋은 생각들이다. 이는 마음의 문만 열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럴 때 스마트폰을 보면 달라진다. 대상에 마음이 머무르면 번뇌가 일어난다.

 

새벽에는 스마트폰도 보지 않고 당연히 TV도 보지 않고, 책도 보지 않는다. 오로지 마음의 문에서 일어나는 생각만 지켜볼 뿐이다. 그때 한 생각이 떠 올랐다. 그제 경전을 보다가 인상적인 구절이 발견되어서 사진 찍어 놓은 것이다. 그것은 왜 사는지에 대하여,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왜 살아야만 하는지에 대하여, 그것도 왜 오래 살아야만 하는지에 대한 해법에 대한 것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왕자여, 계행을 갖추고 선한 원리를 갖춘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오랜 세월 머무르면 머물수록, 많은 공덕을 낳습니다.”(D23.15)

 

 

디가니까야 빠야씨의 경’(D23)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제자 깟싸빠 존자가 꼬살라국의 빠야씨 왕자에게 답한 것이다. 그런 빠야씨 왕자는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허무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허무주의적 견해를 가진 왕자에게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오래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경에서는 비유를 들어서 말했다.

 

저 세상은 있기나 한 것일까?

 

왕자가 허무주의적 견해를 가지게 된 것은 죽어서 돌아온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죽어 가는 사람에게 저 세상으로 가게 되면 반드시 돌아와서 저 세상이 있는지 알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저 세상에 간 다음에 돌아오는 자가 없었다. 이에 왕자는 아무도 오지 않았고 아무도 알려주지도 않았습니다. 존자 깟싸빠여, 저는 이러한 이유로 저 세상도 없고, 홀연히 생겨나는 화생의 삶의 뭇삶도 없고, 선행이나 악행도 없고, 업의 과보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합니다.”(D22.7)라고 말했다. 이는 단멸론이고 허무주의적 견해이다.

 

저 세상은 있을까? 누구나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저 세상에 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저 세상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없다. 마치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것과 같다. 과연 저 세상은 있기나 한 것일까?

 

저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유일신교에서는 천국과 지옥을 말할 것이다. 불교에서는 육도를 말한다. 가장 아래 지옥에서부터, 축생, 아귀, 아수라, 인간, 천상을 말한다. 천상은 다시 세 부분으로 나뉜다. 욕계천상, 색계천상, 무색계천상을 말한다. 지옥부터 천상까지 모두 합하면 33개 세상이 있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33개 세상 중의 하나이다. 사람이 죽으면 33개 세상 중에 하나의 세상에 태어난다.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33개 세상 중에 하나로 태어나게 할까? 그것은 다름 아닌 업(: kamma)이다. 그래서 33개 세상은 발생방식에 따라 구분하는데 이는 다름 아닌 자신이 지은 행위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살생을 하는 등 잔인한 자는 지옥에 태어난다. 우치하고 탐욕이 많으면 축생으로 태어난다. 인색한 자는 아귀로 태어나고, 분노가 많은 자는 아수라에 태어난다. 인간으로 태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오계를 들고 있다.

 

오계만 잘 지켜도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살생을 하지 않고 도둑질을 하지 않는 등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삶은 최소한 인간으로 태어날 자격조건이 됨을 말한다. 이는 축생과 같은 삶을 살지 않음을 말한다. 그가 잔인하여 살생을 밥먹듯이 하고 매사에 분노하는 삶을 산다면 인간 이하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천상에 화생하려면

 

인간으로 만족할 수 없다. 인간세상은 희로애락이 있어서 즐거움과 괴로움이 번갈아 일어난다. 오로지 즐거움만 있는 세상은 없을까? 이에 대하여 불교적 세계관을 보면 욕계 여섯 가지 천상이 있다. 오래 살고 오로지 즐거움만 있는 세상을 말한다. 욕계 육욕천에 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보시와 지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천상에 나려면 오계만 지켜서는 안된다. 보시하는 삶도 살아야 한다. 남도 도울 줄 아는 삶을 산 사람은 천상에 태어날 자격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남을 도와 그들을 기쁘게 했다면 그 마음은 선하고 깨끗한 것이다. 악업보다 선업이 훨씬 더 많았을 때 선처에 나기 쉬운 것이다.

 

불교적 세계관에서 천상은 세 가지가 있다. 욕계천상, 색계천상, 무색계 천상이다. 색계천상에 태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색계천상 형성조건을 보면 선정을 닦아야 한다. 초선부터 4선까지 선정을 닦은 공덕으로 색계천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무색계천상에 태어나려면 공무변처정 등 무색계 선정을 닦아야 태어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색계천상과 무색계 천상은 선정을 닦는 수행자들이나 갈 수 있는 저 세상이다. 과연 저 세상은 있을까?

 

돌아 가셨다고 하는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저 세상은 있다. 왜 그런가? 이유는 분명하다. 이 세상이 있기 때문에 저 세상이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저 세상도 없을 것이다. 저 세상이 있는 것은 연기법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연기송이 있다. 이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imasmi sati ida hoti: 若有此卽有彼)”(M38)로 시작되는 연기송을 말한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 것이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저 세상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사실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저 세상은 반드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죽어서 돌아온 사람이 없기에 증명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요즘 사람들은 저 세상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오로지 현재 살아 있는 이 세상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저 세상은 단지 언어적 개념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서울대공원에서 들은 것이 있다. 어느 나이든 노인이 막걸리를 잔뜩 마시고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천당이 어디 있고 지옥이 어디 있어? 죽으면 끝이지.”라고 말했다. 아마 대부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왜 이런 견해가 생겨났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은 사람에 대하여 돌아 가셨다.”라고 말한다. 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어디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가만 생각해 보니 자연으로 돌아 간다고 말하는 것 같다.

 

오로지 이 세상만 있다고 보는 사람들에게 저 세상은 증명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세상은 믿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썩어서 자연의 일부가 되는데 이런 것을 두고서 돌아가셨다.”라고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돌아 간다는 말은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다. 육사외도 스승 중의 하나인 유물론자 아지따 께싸깜발린은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이루어진 사람의 그 목숨이 끝날 때에 땅은 땅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물은…”(S24.5)라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 몸은 지, , , 풍 사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죽으면 사대가 모두 흩어지는 것을 말한다. 자연으로 돌아 가는 것이다. 그래서 또 다른 존재의 자양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를 유물론이라고 한다.

 

한국인들은 얼마나 종교적일까? 아마 반은 유물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죽으면 돌아가셨다.”라고 말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신을 믿는 사람은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랄 것이다. 저 세상을 인정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저 세상을 말한다.

 

불교에서 저 세상은 자신의 행위()에 따라 결정된다. 그래서 깟싸빠존자가 빠야씨 왕자에게 왕자여, 그대는 이러한 이유로 저 세상도 있고, 홀연히 생겨나는 화생의 뭇삶도 있고, 선행이나 악행도 있고, 업의 과보도 존재한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D23.15)라고 말했다. 이렇게 본다면 돌아가셨다.”라는 말은 유물론적 견해에 가깝다.

 

부처님의 제자 깟싸빠 존자는 왕자의 잘못된 견해를 바로잡아 주고자 했다. 그러나 왕자는 자신의 눈으로 확인된 이외에는 믿지 않았다. 이에 존자는 흉악한 도둑의 비유등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었다. 이 모든 것이 디가니까야 빠야씨의 경에 실려 있다. 한마디로 이 경은 단멸론과 허무주의를 논파할 수 있는 경이라고 보여진다.

 

연기법적으로 저 세상은 있다

 

부처님 당시 부처님은 외도의 견해를 연기법으로 논파했다. 초기경전을 보면 외도 사상에 대한 논파에 대한 것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연기법적으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로 대표되는 사견을 논파한 것을 보면 매우 타당하다는 것이다. 이는 연기법이 매우 위대함을 말한다.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사상통일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연기법으로 어떻게 저 세상이 있음을 밝힐 수 있을까?

 

연기송에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상호의존적 연기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이 있기 때문에 저 세상도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연기에는 상호의전적 연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건발생적 연기도 있다. 이는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Imassuppādā ida uppajjati: 若生此卽生彼)”(M38)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생겨남으로써 저 세상도 생겨난다.”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저 세상은 분명히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했다고 해서 믿지 않고,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다고 하여 수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세상만 있다고 생각하면 어떤 생각이 들까? 술취한 노인처럼 천당이 어디 있고 지옥이 어디 있어? 죽으면 끝나는 거지 뭐.”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위대한 연기의 가르침을 믿는 불제자라면 당연히 저 세상이 있다고 믿을 것이다. 비록 두 눈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는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를 보면 너무나 자명한 것이다.

 

인생이 단 한번뿐이라면

 

저 세상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내세와 윤회를 인정하는 말과 같다. 만일 우리 인생이 원타임(One Time)’으로 끝나 버리는 것이라면 애써 공덕을 닦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인생이 단 한번뿐이라면 애써 지계도 할 필요가 없다. 그저 되는 대로 살면 된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자는 등 본능에 의한 삶을 살아 가면 된다. 마치 축생과도 같은 삶이다.

 

인간이 축생과 다른 것은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는 언어능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정신능력이다. 그런데 유물론자들은 정신도 물질적인 것으로 본다. 정신은 뇌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몸이 무너져 죽으면 정신도 사라져 없어지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저 세상도 있고, 홀연히 생겨나는 화생의 뭇삶도 있고, 선행이나 악행도 있고, 업의 과보도 존재한다.”(D23.15)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만 있고 저 세상이 없다면 굳이 애써 힘들게 오계를 지키고 공덕을 쌓고 살 필요가 없다. 이런 견해를 가진다면 보시는 바보나 하는 것이고 현자는 취한한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는 인과를 부정하는 말과 같다. 과보를 부정했을 때 도덕적으로 금하는 것도 서슴지 않고 자행할 것이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세상이 되었을 때 약육강식의 축생의 세상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왜 장수축원 하는가?

 

불과 삼사십년전 회갑을 맞이하면 오래 사십시오.”라고 말했다. 이른바 장수축원을 말한다. 왜 사람들은 오래 살라고 말하는 것일까? 대부분 사람들은 오래 즐겁게 살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남은 세월 즐기며 살라고 말한다. 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가 단지 인생을 즐기기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인생을 즐기는 것이라고 본다면 커다란 괴로움에 빠질 수 있다. 몸이 젊고 건강할 때는 즐기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 힘이 빠지고 몸의 기능이 저하될 때 즐기고 싶어도 즐기지 못한다.

 

이빨이 망가져서 씹을 수 없을 때 맛 있는 것을 먹을 수 없어서 즐겁지 않을 것이다. 설령 이빨이 멀쩡해서 맛있는 것을 먹어도 소화를 시킬 수 없다면 역시 즐겁지 않을 것이다.

 

즐거운 것이 괴로운 것으로 되는 것은 시간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즐거운 일도 오래 가지 않는다. 오래 가지 않아서 불만인 것이다. 나이 든 사람에게 남은 생 즐겁게 즐기며 사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통속적이다. 불자라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보시를 하면 축원을 해준다. 이는 절에 가면 알 수 있다. 교회나 성당에서도 그렇게 할 것이다. 대개 사대축원이기 쉽다. 이는 자신과 가족을 위한 건강, 사업, 학업, 치유와 같은 것이다. 진정한 불자라면 이런 축원을 바래서는 안된다.

 

법구경에 사대축원이 있다. 어떤 것인가? 이는 “예경하는 습관이 있고 항상 장로를 존경하는 자에게 네 가지 사실이 개선되니, 수명과 용모와 안락과 기력이다.(Dhp.109)라는 게송으로 알 수 있다. 여기서 사대 축원은 수명, 용모, 안락, 건강을 말한다.

 

사대축원을 빠알리어로 “아유 완노 수캉 발랑(āyu vaṇṇo sukha bala)(Dhp.109)라고 말한다. 이는 “장수하고 아름답고 즐겁고 건강하기를!”라는 뜻이다. 이것 보다 더 좋은 축원이 이 세상에 있을까?

 

사대축원 중에서 최상의 축원은 아마도 장수(āyu)일 것이다. 그렇다면 장로가 왜 장수축원을 해주는 것일까? 오래 살아서 즐기라는 뜻으로 말하는 것일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장로가 보시자에게 장수축원 해 주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오래 살아서 공덕을 많이 지으라는 것이다. 오래 살면 살수록 공덕 지을 기회가 더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보시하는 자에게 “아유 완노 수캉 발랑라며 사대축원해 주는 것이다.

 

과학적 유물론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세상에는 수많은 견해가 있다.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다. 누군가 이 세상만 있다고 말하며 즐기는 삶에 대하여 말한다면, 지금 여기에서 행복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그런 견해에 동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알고 나서 세계관에 변화가 생겼다. 이 세상만 있는 것이 아니고 저 세상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는 연기법적으로 너무나 명백한 것이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저 세상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소위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은 저 세상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일까? 심지어 선승들도 말하지 않는다. 그것까지는 좋다. 오로지 이 세상만 있다고 말했을 때 모두 유물론자들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특히 과학하는 사람들이 유물론자가 되기 쉽다.

 

물질을 기반으로 한 과학을 탐구했을 때 이를 과학적 유물론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가 철학자라고 하더라도 정신은 뇌의 작용에 지나지 않다고 본다면 역시 유물론자라고 보아야 한다.

 

어느 재미철학자는 최근 교계신문에 발표한 칼럼에서 유물론적 견해를 말했다. 그는 사람이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또한 죽기 전에 가지고 있던 생각은 다른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한 유전된다고 보았다. 바로 이런 것이 물질에 기반한 과학적 유물론자라도 보아야 할 것이다. 선승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선승들은 좀처럼 저 세상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오로지 지금 여기에서 행복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 같다. 그 행복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즐거움이다. 이는 빠알리어 수카(sukha)가 행복(happy)를 뜻하지만 쾌락(pleasure)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세상만 말할 뿐 저 세상을 말하지 않는다면 불교인이라고 볼 수 없다. 부처님은 분명히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라고 하여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를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역도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오로지 이 세상의 행복과 즐거움과 쾌락을 말할 뿐 저 세상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불교인이라고 볼 수 없다.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 스승인 아지따 께싸깜발린이 말한 유물론과 같고, 오늘날 리차드 도킨슨 등이 말하는 과학적 유물론과도 같은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저 세상은 분명히 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은 언어적 개념이 아니다. 용수의 중론으로 논파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용수도 부처님의 연기법은 인정했다. 용수가 비록 연기송에서 환멸적 연기로 모든 언어적 개념을 부수어 버렸지만 부처님의 연기법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불교인들 중에도 저 세상을 부정하는 자들이 많다. 많이 배웠다는 어느 불교학자도 저 세상을 부정한다. 심지어 즉문즉설로 유명한 스님도 저 세상을 부정한다. 과연 그들을 부처님 제자라고 볼 수 있을까? 과학적 유물론이 득세하는 세상이 되었다.

 

오랜 세월 머무르면 머물수록

 

그제 디가니까야 빠야씨의 경을 읽다가 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한 근거를 발견하고 기뻤다. 이를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어 두었다. 언젠가는 글로 써야 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오늘 새벽 떠 올라서 이렇게 글로서 남기게 되었다.

 

법구경 사대 축원 “아유 완노 수캉 발랑에서 아유는 장수축원에 대한 것이다. 보시공덕을 지은 자에게 장수하시기를!”라며 축원해 주는 것이다. 여러 가지 축원중에서 최상의 축원은 장수축원이다. 이와 같이 장수축원 해 주는 이유에 대하여 선업공덕을 많이 지으라는 뜻이라고 2016년 도이법사로부터 배웠다. 이후 장수축원에 대한 글을 수없이 썼다. 그런데 마침내 그제 경전적 근거를 발견한 것이다. 이는 계행을 갖추고 선한 원리를 갖춘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오랜 세월 머무르면 머물수록, 많은 공덕을 쌓습니다.”(D22.15)라는 말이다.

 

누구나 오래 살고자 한다. 그러나 오래 살고자 한다면 삶의 목적이 있어야 한다. 삶의 목적도 오래 살고자 한다면 허무한 것이다. 늙고 병들어 길게 오래 살아야 할까? 백세까지 숨만 쉬고 있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즐기지도 못하면서 병고에 시달리며 오래 산다면 차리리 죽지 못해서 산다.”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삶을 살 수 없다.

 

짧더라도 굵게 살아야 한다. 오래 산다면 더 좋을 것이다. 오래오래 아름답게 행복하게 건강하게 사는 것이다. 오래 살면 살수록 공덕도 많이 쌓일 것이다. 그래서 "오랜 세월 머무르면 머물수록, 많은 공덕을 쌓습니다.”(D22.15)라고 한 것이다. 오래 살아서 즐기는 삶이 아니라 오래 살아 공덕 쌓는 삶을 살아야 한다.

 

 

2021-09-1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