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철철 남는다면 누구나 임서기
한마디 말에 필이 꼽힐 때가 있다. 유튜브를 보다가 전현수 선생이 말한 것에 공감했다. 정신과 전문의 전현수 선생이 불교TV(BTN) 마음테라피에서 말한 것이다.
전현수 선생은 노년의 삶에 대해 말했다. 불자로서 노년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이에 바라문 사주기로 설명했다. 그 중에서 임서기에 대해서 시간부자라고 말한 것에 공감했다.
은퇴하면 누구나 시간부자가 된다. 그런데 고대인도에서 바라문들은 손자가 태어 났을 때 시간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손자가 태어나는 것을 보고서 "나는 이제 할 일을 다했다."라며 가업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집을 떠나 숲에 사는 것이다. 가주기에서 임서기로 가는 것이다.
손자가 태어 났다는 것은 가문이 끊기지 않음을 말한다. 재가의 삶을 사는 자에게 가업을 유지하고 가문을 계승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손자가 태어 났을 때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숲에 들어가서 수행자로 삶을 사는 것이다. 고대인도에서는 이런 삶을 이상적으로 보았다. 요즘 시대 삶은 어떠 할까?
오늘날에도 임서기는 있을까? 아마 은퇴하여 자신의 삶을 살면 바로 그것이 임서기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고 반드시 은퇴자만 임서기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철철 남는다면 누구나 임서기의 삶을 산다고 볼 수 있다.
정년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나이가 차서 물러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강제로 퇴출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왜 그런가? 내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좀더 일찍 퇴출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임서기가 더 빨라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그랬다.
더 이상 회사를 다닐 수 없게 된 것은 사십대 중반에 일어났다. 갑자기 사오정이 된 것이다. 직장이 탄탄했다면, 능력이 있었다면, 공무원이었다면 정년까지 갔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큰회사, 중간회사, 작은회사, 벤처를 떠돌아다니다 보니 회사수명이 짧아졌다. 강제로 사오정이 되었을 때 시간부자가 되었다.
시간부자는 임서기와 동일하다. 해야 할 일을 다해 마친 자가 숲에 들어가서 수행만 하고 사는 것과 같다. 수행은 하지 않았지만 그대신 글을 썼다. 매일 블로그에 의무적 글쓰기를 한 것이다. 직장 다녔다면 어림없는 일이다.
시간이 철철 남으면 무엇을 해야 할까? 아마 수행밖에 없을 것이다. 고대인도 바라문들도 그랬다. 그들은 가주기에서 스스로 임서기를 선택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강제적으로 임서기가 된 듯하다. 정년이라는 이름으로 시간부자가 되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임서기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정년퇴임하면 나이가 60세가량된다. 65세에 정년 하는 계층도 있다. 강제로 퇴출 됐을 때 무엇을 해야 할까? 새로운 사업을 하기에는 어정쩡한 나이이다. 대개 연금이나 타먹으며 텃밭이나 가꾸며 사는 것 같다. 현대판 임서기라고 볼 수 있다.
임서기라 하여 숲에 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임서기는 노년수행을 말한다. 정년퇴임이든 강제퇴임이든 시간부자가 되었을 때 수행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임서기라고 볼 수 없다. 물론 자기계발하는 것도 해당된다.
노년수행은 쉽지 않다. 몸도 마음도 늙어 버린 자는 젊은 사람과 비교된다.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은퇴자에게 치열한 수행은 쉽지 않다. 힘도 없고 정열도 없다. 그래서 수행은 젊어서 하는 것이라고 했다.
초기경전을 보면 마라와 기녀의 속삭임이 있다. 마라(악마)는 늙은 바라문 수행자로 변신하여 이제 갓 출가한 젊은 수행승에게 "존자들은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받았으나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고 출가했습니다. 존자들은 인간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십시오.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 (S4.21) 라고 유혹한다.
악마는 젊었을 때는 마음껏 감각적 욕망을 즐겨야 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수행이라는 것은 나이 들어서 해도 늦지 않음을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은 바라문 사주기에 기반한 말이라는 것이다. 전현수 선생이 유튜브에서 임서기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듣고서 이 문구를 떠올려 보니 기가막히게 들어 맞는 말임을 알게 되었다.
고대인도 바라문 들은 사주기의 삶을 살았다. 범행기(학습기), 가주기, 임서기, 유행기의 삶을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 제자들은 범행기의 삶을 계속 살았다는 것이다. 젊은 나이에 출가하여 계속 수행자로 사는 것은 학습기(범행기)가 연장된 것이다. 수행승에게는 가주기가 없음을 말한다.
바라문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범행기만 살면 일종의 기존 체제에 대한 도전에 해당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전을 보면 마라가 늙은 바라문 수행자로 변신해서 젊은 수행승에게 감각적 쾌락을 즐기라고 했을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범행기 삶을 살았으면 이제 가주기의 삶을 살라는 말다. 가업을 이어 받아 살다가 손자가 태어 났을 때 출가하여 수행자로 살아도 늦지 않음을 말한다.
초기경전을 보면 도처에 젊은 수행승을 유혹하는 장면이 있다. 기녀도 새내기 수행승을 유혹했다. 테라가타를 보면 어느 기녀는 수행승에게 "젊어서 그대는 출가했다. 나의 가르침을 따르시오. 인간의 감각적 쾌락을 즐기시오. 내가 재산을 주겠소. 정말 그대에게 약속하겠소. 아니면, 내가 불을 가져오겠소.” (Thag.461)라며 유혹한다.
기녀는 수행승에게 젊어서는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범행기가 늙어 죽을때까지 지속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한다. 범행기가 끝나면 가주기로 들어 가는 것이 그때 당시 사회관습이었다. 그래서 기녀는 "우리가 늙어서 둘이서 지팡이에 의지하게 될 때, 둘이서 함께 출가하면, 두 곳에서 행운의 주사위가 던져지는 것입니다.” (Thag.462)라고 말한다. 가주기의 삶을 살다가 노년에 수행해도 늦지 않음을 말한다.
마라와 기녀가 젊은 수행승을 유혹한 것은 고대인도 시대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바라문 인생사주기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인생사주기를 부정했다. 범행기가 끝까지 지속되도록한 것이다. 그래서 출가한 자의 삶을 청정한 삶이라고 하는데 이를 빠알리어로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라고 한다. 이는 '범행기의 삶을 계속 살아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왜 브라흐마짜리야(범행기)의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청정한 삶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불교의 목적은 해탈과 열반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한다. 나이가 어려서 출가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이는 범행기가 계속 연장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 출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주기의 삶을 살다가 임서기가 되면 자연스럽게 수행자의 삶을 살게 된다. 이를 노년출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노년에도 수행할 수 있다. 젊은 시절 감각적 욕망을 마음껏 누리다가 노년에 출가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노년출가는 쉽지 않다. 부처님은 노년출가의 어려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노년의 출가자가 가르침을 따르기 어렵다. 가르친 것을 기억하기 어렵다. 가르친 것을 잘 이해하기 어렵다. 설법을 하기 어렵다. 계율을 수지 하기 어렵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다섯가지 원리를 성취한다는 것은 노년의 출가자자 얻기 어렵다."(A5.60)
노년에 출가하면 가르침을 이루기 어렵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기억력 등 다섯 가지 이유를 들었다.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려면 힘이 있을 때 해야 한다. 젊은 시절이야말로 가장 공부하기 좋은 때라는 것이다.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이 있다. 늦게라도 부처님 가르침을 접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오십이 되어서 초기불교를 접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무엇보다 사십대 중반 사오정이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오늘날 임서기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철철 남는 삶을 살고 있다면 임서기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먹기만 한다면 무위도식이 될 것이다.
밥 먹는 것이 하루일과 중에 가장 큰 행사가 되어서는 안된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자기계발도 하고 타인을 기쁘게 하는 일도 해야 한다. 가주기가 가족을 위한 삶이라면 임서기는 사회에 봉사하는 삶이 된다. 이것이 현대판 임서기 아닐까?
2021-09-0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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