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려거든
사람들은 "마음, 마음"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마음공부한다’고 말한다. 불교공부를 마음공부한다는 것이다. 마음과 불교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흔히 마음을 닦는다고 말한다. 닦아야 할 마음이 따로 있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법구경 찟따왁가 즉, 마음의 품 열한 게송을 보면 '닦는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제어한다'든가, '수호한다'는 말이 많이 나온다. 마음은 닦는 것일까?
법구경 찟따왁가(마음의 품)를 다 외웠다. 모두 열한 개의 빠알리 게송이다. 하루 한 게송을 목표로 했으나 더 걸렸다. 기록을 확인해 보니 9월 4일부터 시작되었다. 오늘 9월 24일이니 20일 걸려 외웠다. 대략 400자가량 된다. 마지막 게송을 외울 때 이전에 외운 열 게송을 확인했다. 그래서 마지막 게송 외우는날이 다 외우는 날이 된다.
열한 게송을 다 외웠으니 이제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암송해야 한다. 이 때가 가장 즐겁다. 애써 어렵게 외운 게송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막히지 않고 줄줄이 외웠을 때 상쾌하다. 마치 큰 공덕이라도 지은 것 같다.
공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지계공덕, 보시공덕, 수행공덕을 말한다. 수행공덕은 사마타수행공덕과 위빠사나수행공덕으로 나눌 수 있다. 경전암송하는 것은 어느 공덕에 해당될까?
불교인으로서 지계하는 것과 보시하는 것은 기본이다. 마치 보험드는 것과도 같다. 왜 그런가? 오계를 지키는 등 지계공덕을 쌓으면 인간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 축생은 오계를 지킬 수 없다. 인간은 오계를 지킬 수 있다. 오계를 지킨다면 인간적 삶을 산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오계를 지킨 공덕으로 최소한 인간으로 재생된다.
보시공덕을 쌓으면 천상에 태어난다. 여기서 말하는 천상은 욕계천상이다. 구체적으로 욕계육욕천이다. 욕계천상에 형성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마음을 내야 한다. 남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이웃과 사회에 봉사하는 삶을 말한다. 이런 자가 천상에 태어날 것이다.
이기적 삶에서 이타적 삶으로 전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자신의 마음을 닦아야 할 것이다. 마음을 어떻게 닦아야 할까?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을 닦는 것은 습관들이는 것으로 본다. 닦아야 할 마음이 있어서 닦기 보다는 관찰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왜 그런가? 마음은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마음은 늘 대상에 가 있다. 이런 마음에 대하여 "흔들리고 동요하고 지키기 어렵고 제어하기 어려운 마음"(Dhp.33)라고 했다. 어느 마음이 내마음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마음을 닦는다기 보다는 제어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바로 잡는다. 마치 활제조공이 화살을 바로 잡듯." (Dhp.33)이라고 했다.
마음에 대한 열한 게송을 보면 제어하고 지키고 보호하고 수호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거나 찰나찰나 변하는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전자는 사마타이고 후자는 위빠사나이다.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수행공덕이 된다. 사마타를 닦으면 색계와 무색계천상에 태어나고 위빠사나수행을 하면 해탈과 열반이 실현된다. 이렇게 본다면 위빠사나수행공덕이 가장 수승하다.
경전을 암송하는 것은 수행공덕에 해당된다. 사마타일까 위빠사나일까? 사마타수행공덕에 가깝다고 본다. 왜 그런가? 담마를 암송하는 것은 법수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르침에 대해 늘 기억하는 것이 법수념이다. 이를 빠알리어로 담마누사띠(Dhammanussati)라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경을 암송하는 것은 사마타수행공덕에 들어가는 것임에 틀림없다.
게송을 암송할 때는 집중을 해야 한다. 어느 일이든지 집중을 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집중을 방해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감각적 욕망이다. 술마시는 것도 감각적 욕망에 따른 것이다. 취한 자는 집중을 할 수 없다. 취한 상태에서 공부할 수 없다. 당연히 일도 할 수 없다. 수행은 말할 나위 없다.
게송외우기를 하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오로지 담마를 기억해 내기 위해서 노력하다 보면 잡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만큼 집중이 되었기 때문이다.
흔히 읽고 쓰기를 말한다. 말하기는 기본이다. 말은 누구나 하지만 누구나 책을 읽는 것은 아니다. 일년에 책 한권 읽지 않는 사람도 많다. 책은 정보와 지혜의 보고 임에도 읽지 않는 것이다. 쓰는 사람은 더욱더 드물다.
읽고 쓰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읽었으면 써야하듯이, 읽었으면 암송해야 한다. 한번 보는 것으로 그친다면 시간낭비가 될 수 있다.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지만 새겨 둘 만한 것이 있으면 기억해 두어야 한다. 암송을 해야 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오래전부터 경을 외워 왔다. 중요하다고 판단되면 외웠다. 내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가르침의 핵심을 모아 놓은 것이 경전이다. 필요할 때마다 책을 열어 본다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다. 머리 속에 기억하고 있다면 0.5초도 걸리지 않아 꺼내 볼 수 있다.
지난 17년동안 수많은 경과 게송을 외웠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다. 자발적으로 외웠다. 외워 두면 좋을 것 같아 외웠고, 나의 능럭을 시험하기 위해 외웠고, 무엇보다 마음을 잡기 위해 외웠다. 이번에 법구경 찟따왁가 열한 게송 외운 것은 마음을 잡기 위해서 외운 것이다.
남들이 잘 하지 않은 것을 하고 있다. 글쓰기도 그렇다. 매일 장문의 글을 쓰고 있는데 남들이 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도 오전일과를 글쓰기로 보낸 세월을 살아 왔다. 2006년 이후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쓰다시피 했다. 이를 이해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돈도 되지 않는 글쓰기에 시간낭비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글쓰기하면 이점이 있다. 먼저 생각이 정리된다는 것이다. 정리된 생각이 글로 표현되는 것이다. 또한 글쓰기는 수양이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다는 것 자체가 수행이 되는 것이다.
악한 마음을 가진 자는 글을 쓸 수 없다. 힘드는 일을 애써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쾌락을 즐기는 삶을 사는 자에게 글쓰기는 시간과 정력의 낭비로 보일 것이다. 욕망으로 사는 사람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쓸데없는 짓이다.
남들이 보기에 쓸데없는 글쓰기를 오랜 세월 해왔다. 그 결과 엄청난 자료가 축적되었다. 2006년 이후 15년 동안 6천개의 글을 썼다. 모두 인터넷에 공개된 글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다. 누군가 글을 읽고서 공감했다면 글쓴 보람을 느낀다. 여기에 책으로 엮어내면 결실을 맺는 것 같다. 100권 만드는 것이 목표이다.
글쓰기로만 그쳐서는 안된다. 읽었으면 써야 하듯이, 썼으면 실천해야 한다. 수행하는 것이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외우기를 하고 있다.
게송과 경을 외우는 것은 법수념에 해당된다. 법수념은 마흔 가지 사마타수행 중에서 하나에 해당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법수념하는 것도 선정에 해당된다. 근접삼매까지 가능한 것이다.
법수념은 근본삼매(본삼매)까지는 힘들다. 왜 그런가? 청정도론에 따르면 "가르침의 덕성은 심오하기 때문에 여러 종류의 덕성을 새기는데 전념하다 보면, 근본삼매에 이르지 못하고 단지 근접삼매에 이른다."(Vism.7.87)라고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법수념을 비롯하여 불수념과 승수념 등 여덟 가지 수념은 근접삼매까지가 한계이다. 그럼에도 대상에 마음집중하기 때문에 마음의 통일(심일경성)을 이룰 수 있다. 마음의 통일을 이룬 상태는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그는 그 가르침에 대하여 의미를 이해하고 원리를 이해한다. 그 의미를 이해하고 원리를 이해하면 즐거움이 생겨난다. 즐거움이 생겨나면 기쁨이 생겨난다. 기뻐하면 몸이 안온해지고 안온해진 몸은 행복을 느낀다. 행복하면 마음이 집중된다."(A5.26)
가르침을 접하면 기쁨과 행복이 일어난다고 했다. 이런 조건이 있기 때문에 삼매에 드는 것이다. 근본삼매(본삼매) 들기전에 근접삼매도 그렇다. 위빠사나의 순간삼매도 근접삼매와 같은 것이어서 기쁨과 행복이 있다.
오늘로서 법구경 찟따왁가 열한 게송을 모두 다 외웠다. 다음 부터는 잊지 않기 위해 틈만 나면 암송할 것이다. 그런데 암송하다 보면 기쁨이 일어난다. 이는 근접삼매에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마타수행이라 하여 반드시 좌선하는 것 만을 말하지 않는다. 청정도론에서는 무려 마흔 가지 사마타수행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법수념이다. 게송을 외우고 암송하는 것도 수행이다. 그런데 게송을 외우고 나면 기쁨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물론 행복감도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암송에 집중했을 때 근접삼매의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매일 글을 쓰는 세월을 살아왔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여 게송외우기를 하고자 한다. 글쓰기 보다 몹시 힘이 드는 작업이다. 그러나 이루고 나면 글쓰기 보다 더 강렬한 성취감을 맛본다. 그것은 다름아닌 기쁨과 행복이다. 매일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려거든 외워야 할 것이다.
2021-09-2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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