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암송

공작같은 삶보다는 백조같은 삶을

담마다사 이병욱 2021. 9. 19. 08:37

공작같은 삶보다는 백조같은 삶을

 

 

요즘 유튜브에서 새에 대한 다큐를 종종 접한다. 에이아이(AI)가 자동연결해 주는 것이다. 알에서 부화된 새끼가 폭풍성장한 다음에 둥지를 떠날 때까지 과정에 대한 것이다.

 

새다큐를 보면 먼저 텅 빈 둥지를 보여준다. 이후에도 텅 빈 둥지를 보여준다.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 이전과 이후 사이에 사건이 있었다. 불과 한달 정도밖에 되지 않는 기간에 기적같은 일이 벌어진다.

 

가장 인상깊게 본 새다큐가 있다. 일단의 두 마리 부모새가 새장에 들어온다. 그들은 열심히 집을 짓는다. 나무로 된 새장안에 나무조각, 풀, 깃털을 모아 아늑한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그 다음에 알을 낳는다. 무려 11개의 알이다.

 

드디어 새끼가 나온다. 11마리 새끼새는 눈도 뜨지 못하고 몸도 가누지 못하는 핏덩이 같은 것이다. 그러나 생존본능이 있어서 입을 찢어지게 벌린다. 어미새는 애벌레를 넣어준다. 새끼새는 거친 먹이를 꿀꺽 삼키고 난 다움 뒤돌아 배설한다. 어미새는 배설물을 받아서 먹어 치운다. 이와 같은 과정을 하루에 수십번 반복한다. 그 결과 새끼새는 하루가 다르게 폭풍성장한다.

 

둥지는 발 디딜 틈조차 없이 꽉 찬다. 처음 빈둥지는 널널했으나 불과 한달만에 생명체로 가득한 것이다. 11마리 새가 성체가 되었을 떼 더 이상 비좁은 새장에 있을 필요가 없다. 새끼새는 작은 구멍을 통하여 하나 둘 새장 밖으로 떠난다. 새장에는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텅 비어 있다. 다만 둥지의 흔적만 남아 있다.

 

 

새다큐를 보면서 인생을 생각해 보았다. 사람도 새와 다를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짝을 이루어 자식을 낳고 사는 것이 새의 일생과 다름없어 보이는 것이다. 집을 떠나지 못하는 자식이 있다면 둥지를 떠나지 못하는 새와 같다. 새는 둥지를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사람은 때가 되어도 집을 떠나지 못한다.

 

둥지를 떠나지 못하는 새는 없다. 날지도 못하는 새라면 둥지를 떠나지 못할 것이다. 새는 날개가 있어서 둥지를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둥지를 떠난 새는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없다. 날개가 있기 때문에 스스로 힘으로 날아 먹이를 찾아 먹고 살 것이다.

 

사람도 둥지를 떠나야 한다. 둥지를 떠날 줄 안다는 것은 생존을 하기 위한 날개가 있는 것과 같다. 만일 집을 떠나지 못하고 집에서만 있다면 날개 없는 새와 같고 날지도 못하는 새와 같다.

 

수행승을 새에 비유할 수 있다. 부모 밑에서 자란 자가 출가하는 것은 둥지를 떠나는 것과 같다. 날개가 충분히 자랐을 때 어느날 훌쩍 떠나 버린 새처럼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떠나는 것이다.

 

출가수행자는 왜 집을 떠나는가? 이는 맛지마니까야 '랏타빨라의 경'에서 랏타빨라가 "재가에 살면서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소라껍질처럼 잘 연마된 거룩한 삶을 살기가 쉽지 않다.”(M82.4)라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재가의 삶은 가르침을 실천하기도 어렵고 가르침을 이루기도 어렵다. 이는 숫따니빠따 '성자의 경'에서 "재가는 아내를 부양하고, 덕행자에게는 내것이 없어, 둘은 처소와 생활양식이 같지 않다. 재가자는 남의 생명을 해치는 것을 삼가기 어렵지만, 성자는 항상 남의 목숨을 보호한다.”(Stn.220)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떠난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부모를 설득해야 한다. 가장 큰 설득자는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눈물로 막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번 출가의 마음을 지닌 자는 포기하지 않는다. 눈물로 만류하는 어머니에게 "풀잎 끝의 이슬이 태양이 떠오르면 사라지듯, 이와 같이 사람의 목숨도 그러하니 어머니, 저를 방해하지 마시오.”(JA.IV.122)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출가를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자는 자유롭게 하늘 높이 날아다니는 새와 같다.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새김을 갖춘 님들은 스스로 노력하지 주처를 좋아하지 않는다. 백조들이 늪지를 떠나는 것처럼 그들은 집마다 그 집을 떠난다.”(Dhp91)라고 했다.

 

초기경전을 보면 출가자에 대하여 백조로 비유하고 있다. 왜 백조라고 했을까? 백조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백조의 흰 이미지가 청정한 삶을 추구하는 수행승의 이미지와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다음으로 백조는 널리 하늘 높이 날아간다. 이는 닭이나 오리와 같은 가금류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새중에 공작이 있다. 날개를 펼쳤을 때 공작의 화려함을 따라올 새가 없다. 그러나 공작은 높이 날지 못한다. 숲에서만 산다. 이는 하늘 높이 날아서 어디든 갈 수 있는 백조와는 다른 것이다. 그래서 숫따니빠따에서는 "하늘을 나는 목이 푸른 공작새가 백조의 빠름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 재가자는 멀리 떠나 숲속에서 명상하는 수행승, 그 성자에 미치지 못한다.” (Stn.221)라고 했다.

 

하늘을 난다고 해서 모두 같은 새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 해서 다 같은 인간은 아니다. 백조처럼 하늘 높이 나는 수행승이 있는가 하면, 화려함을 뽐내는 공작처럼 재가의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백조가 되기를 바란다. 백조처럼 하늘 높이 어디든지 날아가는 새가 되고 싶다. 그러나 현실은 화려한 공작새의 삶을 추구한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이 늦다. 물론 근기가 안되는 것도 요인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백조가 되고자 한다.

 

매일매일 새로워지고자 한다. 매일매일 같은 일상이지만 어제와는 다른 일상이 되고자 한다. 그래서 "구일신일일신우일신(苟日新日日新又日新)"의 삶을 살고자 한다. 이 말은 "진실로 날로 새로워지려면,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라는 뜻이다. 다음은 오늘 외워야 할 게송이다.

 

Aciraṃ vatayaṃ kāyo,

pathaviṃ adhisessati;

Chuddho apetaviññāṇo,

niratthaṃva kaliṅgaraṃ.

 

아찌랑 와따양 까요

빠타윙 아디세삿띠

춧도 아뻬따윈냐노

니랏탕와 까링가랑

 

"아, 쓸모없는 나무조각처럼

의식 없이 버려진 째,

머지 않아 이 몸은

땅 위에 눕혀지리라." (Dhp.41)

 

 

2021-09-19

담마다사 이병욱